한글날을 국경일로!
한글날을 국경일로!
  • 이태복
  • 승인 2008.10.0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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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

외국을 다닐 때마다 우리글과 말이 없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나와 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되고, 새삼스럽게 한글과 우리말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제가 36년을 지배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완전히 빼앗기 위한 정책이 창씨개명과 조선어말살정책이었는데 일제지배가 한세대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우리의 말과 글은 어쩌면 음지에서만 살아남았을지 모른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이런 절박했던 사정을 의식해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들은 독립운동 기간 내내 한글날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가갸겨겨 보급운동’을 펼쳤고, 1945년 광복이 되자마자 원래의 성씨와 말과 글을 되찾는 작업이 벌어져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율을 기록할 수 있었다.

한글에 대한 사랑이 IMF를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토란 같은 기업이 월가에 팔려나가고 제 부실조차 모르는 외국계 회사들에게 경영컨설팅까지 맡기게 되면서 이상한 유행이 우리사회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선봉은 외국자본의 지배력이 강한 금융권이었다. 국민은행이 KB로 바뀌고 영어를 모르는 농민을 주인으로 하는 농협까지 NH라는 간판으로 바뀌었다. 권력흐름을 재빨리 간파한 공기업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한국통신이 KT로, 도로공사가 EX로 회사표시를 바꾸더니 한심한 일까지 벌어졌다. 필자가 자주 다니는 서해안 고속도로에는 해미 나들목 부근에 운산터널이 있다. 서산목장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이 터널 입구에는 재치 있는 표어가 걸려 있었다. ‘동물이 지나가고 있어요’. 동물보호 이상의 얼마나 멋진 표어인가. 그 밑을 지날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도로공사가 EX로 간판을 수십억 쏟아부어 바꾸더니 어느 날 그 운산터널의 표어도 ‘Eco-bridge’로 변했다. 참 한심한 인간들이 겉멋(?)을 부린다고 저런 흉내를 내고 있으니 그 터널 근처만 가도 빨리 지나가고 싶어진다.

제 얼굴을 짓밟는 풍조는 최근 들어 아주 고질병이 되고 있다. 서울시 시내 각 자치단체는 영어로 처발라진 이름의 행사를 하고, 아예 영자로 깃발을 만들어 도로 양옆을 수놓는다. 그래야 선진국이 되고 일류가 될까? 하기야 제 글로 밥을 먹고 사는 작가라는 자가 영어공용화를 외쳐대고 있으니 그 끝이 어디일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또 국민들에게 정신의 양식을 보급한다고 외쳐대던 출판인이 제 자식을 일찌감치 미국에 조기유학을 보내고 있다.

IMF 이후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정체성도 희미해지고 국가적 과제와 기준도 없이 정체불명의 ‘글로벌 스탠다드’만 쫒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누더기가 되고 있는 한글이고, 한글날은 국경일에서조차 사라졌다.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면서 국경일 지정조차 하지 않는 것은 치욕스러웠던 역사를 잊은 못난 짓이다. 그리고 정부를 비롯한 공공영역에서 ‘락 투어’ 같은 해괴한 용어들이 난무해선 안된다. 일본이나 중국 등은 외국에서 전문용어가 나오면 바로 자국어로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데, 한국은 아예 그런 기능이 없다. 의사들의 처방전이나 전문가들의 회의에 참석해보라. 한글의 존재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한글으뜸법 등을 만들어 한글사용의 원칙과 기본을 바로세우고 적극적으로 장려해가야 한다. 그리고 초라한 한글학회의 처지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고 인터넷 시대에 대처할려면 한글의 과학성만 강조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한글주소사용에 앞장서고 한글시험을 공직자선발의 기초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한가지 다행스런 것은 최근 한글디자인을 패션에 도입하기도 하고, 몽골, 네팔, 필리핀,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700만명 해외동포의 2세들이 모국어에 대한 사랑에 눈뜨고 있다. 이들 나라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널리 알리고 한국의 상징으로서 한글이 우뚝 섰으면 좋겠다. 아울러서 우리문화의 시원과 관련이 있는 갑골문에 관한 전문적 연구도 진척시켜 역사적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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