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전의 효력
처방전의 효력
  • 이태복
  • 승인 2008.10.1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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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

부시행정부의 구제금융조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 증시의 동요와 폭락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월가의 내부붕괴’라는 글에서 구제금융조치로 현재의 위기가 극복되지 않고,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미국정부는 이제까지 민영화가 최고선이라며 다른 나라에 강요해왔던 논리와 정반대로 월가의 주식을 사들여서 지급보증을 책임질 모양이다. 또 미국발 위기가 유럽과 세계경제 전체를 뒤흔들게 되자 마침내 금리 공동인하에 이어 20개 국가가 공동보조를 통해 해법마련에 나섰다.

문제는 한국이다. 미국 월가의 파산에 직접적 책임이나 형식적인 관련이 깊지 않으면서도 그 피해는 매우 크다.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석유와 원자재가격이 급격히 상승했을 때도 한국의 상승폭은 일본에 비해 2~3배가 넘었다. 물가상승률도 일본이 2.5%인데 비해 한국은 6~7%였다. 최근의 환율상승도 마찬가지다. 달러, 엔화, 위안화 등 관련 국가들의 경제적 곤경에 비해 한국화폐의 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지고 있다. 외환위기 상황도 아닌데 원화가치가 500원이나 떨어진 것은 지극히 비정상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우리 경제에 발생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IMF 이후 한국경제가 월가금융자본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다. 금융과 외환시장을 150% 개방한 결과, 한국의 주요 기업의 대주주는 월가의 큰 손들이었고, 이들의 주요한 머니게임판이 한국이었던 것이다. 한국중소기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키코의 실질 수혜자가 월가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며, 드러나지 않은 파생상품의 피해로 속앓이를 하는 한국금융기관은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국제유가와 원자재 값을 흔들어 투기판을 키웠고,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왔다. 그런데도 그동안 한국정부와 여론주도층은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를 내세워 이를 본받지 못하면 후진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댔다. 하지만 최근 사태를 통해 드러난 진면목은 스탠다드는커녕 파렴치한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월가의 내부붕괴에 따른 급속한 자금이탈에 무방비상태였던 한국은 무역적자폭의 증가, 장기적인 경기침체와 맞물려 외환시장, 증시, 실물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따라서 정부당국은 신속한 단기적 대책, 즉 환투기세력의 차단, 달러의 충분한 공급, 엔화대출의 만기연장, 눈덩이처럼 커지는 파생금융상품과 키코 등 환헤지 상품의 불공정 조사와 피해방지책을 세우면서 외부환경변화에 지극히 취약한 한국경제의 구조와 제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한국의 무역적자 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부품소재 전략을 중점 추진하는 작업이다. 수출할수록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국제경쟁에서 한국경제가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길은 대기업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보완할 수 있는 길이고, 취업난에 기죽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중소기업의 고용력을 확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둘째는 외국금융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자본시장에 대한 비정상적 구조를 바꾸는 작업이다. 금융당국이 시중은행을 통폐합하여 외국자본에 넘겨주고 제일과 외환은행을 투기자본에 헐값 매각한 결과 한국의 자본시장은 국민경제의 기반에 서있지 못한 부평초 상태가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외국자본에 국내은행을 매각하지 말고, 신협, 금고 등 서민금융기관을 활성화해서 국민생활의 안정에 기여하는 자본시장을 육성해야 한다. 동북아금융허브라는 등 말만 화려하고 한국금융시장을 망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셋째, 외국자본의 국내주식 소유한도를 일정하게 제한하고 투자금의 일시인출을 방지하면서 외국환관리 자유화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제도가 나와야 한다.

한국경제의 위기는 한국지도층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많다. 그동안 개방과 한미FTA, 민영화만이 살길이라고 떠들었던 자들이 일시적 위기일 뿐이라는 변명만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면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다. 정부, 언론, 학자 등 지도층의 확실한 반성문이 나오지 않는 한, 처방전의 효력도 지극히 제한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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