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타협의 필수조건
사회적 대타협의 필수조건
  • 이태복
  • 승인 2009.01.13 0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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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

민주노총의 핵심인 금속노조 정갑득 위원장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먼저 제안했다. 참 잘한 일이다. 힘든 내부조율을 거쳤을텐데 보기 드문 용단이다. 현재의 경제난국을 풀어갈 중요한 고리가 일단 열렸지만, 우리 사회가 으레 그렇듯 안팎에서 색안경을 낀 사람들의 갖가지 반응이 나오고 있다. 경제단체와 보수언론들은 정위원장의 제안마저 백안시 하면서 노동계의 일방적 양보만을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내의 일부도 ‘투항’이라며 일자리나누기 제안의 배경을 놓고 여러 얘기들이 나온다.

하지만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무조건 백기항복부터 하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저의가 의심스럽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경제위기를 틈타 관철하겠다는 속셈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그런 자세로 사회적 대타협은 불가능하고 만남조차 무의미하다. 또 노동계 내에서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투항론이나 무용론을 거론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심각한 고용위기에 처한 대다수 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외면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2009년 신년 초부터 구체화되고 있는 실물경제의 침체는 전국에서 대·중·소기업과 자영업을 가리지 않고 조업단축과 휴업, 폐업바람을 불러오고 있다. 침체된 경제여건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갈 곳이 있는가? 없다! 장기간 경기침체로 이미 실직한 2백여만명과 일하고 있지만 빈곤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대책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추가적인 대량실업사태는 한국사회가 감당하기 어렵다. 천문학적인 재정투입을 통해 실질적인 일자리는 토목공사의 성격상 수만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만명에 불과한 임시일자리를 365일로 곱한다고 해서 외형적인 수치는 늘어날지 모르지만, 국민생활의 파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5백만명에 달하는 실업자와 근로빈곤층에 대한 사회안전망(건강, 고용, 연금, 산재)을 튼튼히 하면서 고용유지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용유지가 가능하려면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이 가장 중요하다. 최악의 상황에서 기업에게 무조건 그 부담을 전부 떠안으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노동자들에게 해고라는 사형선고를 내려서도 안된다.

그러면 어떤 해법이 있는가. ‘공정한 고통분담’과 ‘상호양보’다. DJ정부시절 노사정위원회를 가동했지만, 결국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공정한 고통분담이 없었고, 상호양보할 자세가 돼있지 않았던 데 있다.

필자가 청와대 수석으로 들어가서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경쟁력 강화와 삶의 질 향상위원회를 노총, 민주노총, 재계가 합의하여 국민경제자문회의 내에 두기로 결정했다.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 추진했지만, 당시 경제수석의 집요한 방해와 집권세력의 의지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의 사정은 어떤가. 노동자의 삶의 질은 배제된 채 재계의 입장만 반영한 경쟁력강화위원회만 가동되고 있고, 노사정위원회는 식물기구라고 할 정도로 유명무실하다.

그렇다면, 사회적 대타협은 불가능한가.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객관적 조건도 어려워졌고, 주체적 조건은 더 힘들어진 탓이다. 왜냐하면 DJ정부는 내용이야 어쨌든 공정한 고통분담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MB정부는 노골적으로 친기업적인 여러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노동계의 대정부불신이 매우 크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마주 달리는 전차처럼 공멸의 길로 가게 내버려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기업도 노동자도 대한민국도 살아야 한다. 우선 시급한 것은 노사정간의 신뢰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전제 조건 없이 만나야 한다. 의제와 내용은 제한 없이 논의하고 합의사항을 결정하면 된다. 셋째, 정부가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방안을 갖고 중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2009년의 봄은 전투장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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