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이, 인권 없다.
노동 없이, 인권 없다.
  • 안은정(광명시민, 인권학당수강생)
  • 승인 2013.10.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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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광명시민인권학당(4) / 안은정(광명시민, 인권학당수강생)

‘시민이 주인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광명시민인권위원회 주최로 ‘제2기 광명시민인권학당’이 10월4일부터 11월15일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평생학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25일 ‘노동 없이 인권 없다.’를 주제로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의 강연 후기를 게재한다. -편집자주-

광명시민인권학당은 인권의 눈으로 사회의 여러 영역을 살펴보고 있다. 인권감수성, 인권의식을 키우는 교육이다.

자신이 노동자라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노동자를 공장노동자 등 육체노동자에 국한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노동자이고, 주부 역시 가사노동자라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 하는 것이다.

육체노동에 대한 폄하 등 우리사회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육체노동을 기피하고, 화이트칼라가 되기 위한 대학진학율이 85%가 넘는 기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나라도 그럴까? 호주의 굴뚝청소부는 적지 않은(6-7천만원 정도) 연봉과 ‘아무나 하지 못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사회적 인정 등 서구의 육체노동자에 대한 임금이나 사회적 인식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선호하는 직업에 대해 선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육체노동에 대한 가치정립의 문제이다.

우리의 노동의 풍경은 대형마트의 계산대 여성노동자가 장시간동안 서서 일하고, 백화점에 소비자 휴게실은 있어도, 노동자 휴게실은 없는 등 노동자에 대한 권리(배려)를 찾기 힘든 모습이다. 그리고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남성중심주의의 여성노동자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우리 사회는 육체노동에 대한 가치정립을 못 했고, 노동조합과 같은 안전망 역시 10% 내외로 매우 낮다. 그런 노동현실 속에서 인권은 어떠할까? 인권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인권’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인권’에 대해 설명하기는 막연하다고 생각한다. 성·나이·인종·장애여부 등에 따른 직접적인 차별·피해가 없는 상태에서 ‘인권’은 더 막연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느낌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그 막연함은 나의 인권감수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색’이라는 표현을 아직도 쓰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2005년 ‘살색’이 ‘살구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솔직히 충격을 받았고 당황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모른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런 표현을 ‘우리’끼리 쓰는 것도 인권침해인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러분 자신이 다수의 편에 서 있음을 발견할 때는 언제나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할 시간이다. - 마크트웨인 -”

‘우리’끼리 ‘살색’이라는 표현이 계속한다면, ‘우리’가 아닌 소수자·약자에 대한 인권침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인권선언 1조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권리는 모두 똑같다. 사람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있으므로 서로 상대방을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인권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형제애(Brotherhood)라는 표현을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선언을 읽을 때 이 표현이 눈에 거슬렸지만 강의 중 나왔던 모든 예시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수의 ‘우리’를 살면서, 내 안의 인권감수성을 깨운다는 것은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함께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소수자, 약자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블루칼라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단절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역시 그렇다. 그리고 노동자 개인 역시 그렇다. 개인이 기업에서 피해를 받았을 때, 개인 혼자서 기업을 상대로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대부분의 노동자(80%~60%)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다. 1940년대에 치열한 싸움과 ‘생산성을 높이자’는 합의로부터 노동자들의 복지가 향상되었다.

노동조합의 목표는 기업을 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잘되게 하고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기업이 망하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절대 기업을 망하게 바라지 않는다.

우리사회는 일제강점기, 박정희정권 등을 거치면서, 노동조합에 대해 좌파세력이라는 굴곡된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불의를 발견(캐치)하는 능력을 가지고, 연대할 때 인권적으로 발전된 사회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강의 중 프라하에서 마트에 앉아서 계산을 하면서 사진을 찍어주는 아가씨의 사진을 보았다. 여행을 하면서 관광지의 모습 뿐 아니라 그런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진짜 인권감수성을 높은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 사회의 불편함을 느끼고, 연대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인권은 실제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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