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 닮은 두 권의 책을 읽다
감동이 닮은 두 권의 책을 읽다
  • 양영희(구름산초 교사)
  • 승인 2014.01.26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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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공빈(쓰찌다 다까시), 조화로운 삶(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
욕망을 부추기고 자극하여 몸은 더 바쁘고 지치게 만들며, 늘 두려움과 불안으로 포위된 채 살고 있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명확하고 자상하게, 그것도 실천적 삶을 통해 이야기하는 감동을 두 권의 책은 전하고 있다.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하루 반나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한 해의 양식이 마련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자급자족하며 은행에서 절대 돈을 빌리지 않는다. 최저 생계비가 마련되면 먹고 남는 채소나 과일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다. 하루에 한 번씩은 철학, 삶과 죽음, 명상에 관심을 갖는다.’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던 헬렌과 스코트의 생활원칙이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녹색평론에서도 늘 봐 온 것과 같은 주장일 수도 있는 이야기들인데 그 감동이 다른 까닭은 뭘까도 생각했다. 쓰찌다 다까시가 만들어 함께 생각하고 실천해온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은 그 이름부터 공감이 갔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모든 과정이 쓰레기를 만들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의 연속이란 생각과 죄스러움이 늘 따라다닌다. 과학기술과 공업문명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편안하게 했다는 이유로 우린 과거의 자연적 생활방식을 모조리 부정하고 폐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헬렌과 스코트는 이미 1932년에 자본주의의 황폐한 뒷모습을 체험하고 시골로 들어간다. 그리고 ‘땀 흘려 일하고 먹고 살며 여가와 휴식을 즐기고 삶이 존중되는 평온한 삶, 마음에 그리던 삶’을 살아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던진다. ‘단순하고 고요한 삶을 방해하는 복잡함, 긴장, 압박감, 부자연스러움, 만만치 않은 생활비’ 그리고 ‘오랫동안 도시에서 살다가는, 사회가 주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몸의 건강과 정신의 안정, 사회 속에서의 건전함을 지켜낼 수 없다’는 그들의 절박한 선택과 이야기는 ‘도시의 망설이는 사람들’을 향해 울린다.

헬렌과 스코트는 노동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대신 조화로운 삶을 얻어 연구를 하거나 책 읽기, 글쓰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삶으로부터 도피해 어딘가로 달아나기를 꿈꾼 것이 아니라 삶에서 더 열중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이 세운 목표 중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많은 부분을 자유 시간으로 갖는 것’이란 내용이 아주 매력적이다.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기획할 여건이 되어야 가능한 이런 계획은 정말 멋지지 않은가?

또 ‘진짜 이웃이라면 계속 옆에 붙어살아야 한다 ’ 는 깨달음을 통해 간간히 다녀오던 시골로 아예 이삿짐을 싸서 내려간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님이 아니라 그곳 사람이, 눌러 사는 주민이 되는 것은 이웃과 진정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골을 선택할 때 그곳 사람들과의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삶만을 도려내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산골짝 사람들은 날마다 일어나는 노사분쟁을 보지 않아도 되며 압력을 받지 않아도 된다. 자연과 늘 만날 수 있고 자연의 힘을 잘 알아 그것에 순응할 수 있으며, 여전히 손을 써서 일했고, 한 치도 빈틈없는 생활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더럽고 시끄러운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주중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 땅에 있었다.
사람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바람직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삶은 우리 모두가 몸 바쳐서 벌여 나가는 사업과 같은 것이다.’

‘조화로운 몸, 균형 잡힌 감정, 조화로운 마음, 더 나은 생활과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꿈’을 추구한 헬렌과 스코트는 말한다.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척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단순히 우리 두 사람이 먹고 사는 일 뿐 아니라 사회가 두루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으려고 애써 보련다.’

쓰찌다 교수가 학생들과 유기농 운동을 한 뒤 ‘학생들이 농사체험을 하는 것이 장래에 큰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교육현장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도시 아이들은 흙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식탁에 오르는 것들은 마트나 백화점을 통해 공급되는 것이니 부모가 직접 생산하는 과정을 보지 못한다. 도시의 바쁜 부모들은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입한 상품을 진열하여 식사를 해결한다. 아이들의 삶 어디에도 자연과 생명을 만날 기회가 없다. 그러니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구조, 생태문제, 물, 원자력, 평화를 연계해 이야기할 틈도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그 많은 보석같은 자연에 대한 만남과 느낌을 가질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겐 눈에 보이는 생필품들을 구입할 돈만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쓰찌다 교수가 시도한 사례는 요즘 귀촌이나 귀농을 통해 실천하는 우리의 새로운 모습과 많이 닮았다.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있으며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하는지 말한다. 된장을 만들어 먹고 유기농으로 야채를 키우고, 사료에 왕겨를 섞은 후부터 닭장의 이지메 현상이 사라졌다는 축산과정의 문제와 육류섭취문제, 환경호르몬 문제의 영향, 세제 등으로 인한 아토피, 과식으로 인한 성인병, 비만, 토지 약탈형 농업과 농토의 유실, 의약품과잉으로 면역력 저하 등’을 기록한다.


또 ‘지금과 같은 풍부한 물량을 누리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회는 불가능하며 새로운 사회제도와 삶의 방식이 마련되어야 하며 21세기는 농과 식이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는 생존의 기초인 먹을거리는 농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진리이다.
그래서 ‘공생공빈’이다. 적게 먹고 적게 가지며 함께 나누는 자연의 삶만이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이며 이의 실천은 농촌과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의 사람들은 온갖 불행 속에서 자신마저 잊고 살면서도 농촌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견디며 살고 있는 현재에서 쓰는 노력과 에너지를 반대로 농촌으로 들어가 내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위해 그리고 헬렌이 말하는 조화로운 삶을 위해 과감한 선택과 도전을 꿈꿔보면 어떨까 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저울질하다 다 흘려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지인의 책꽃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지인은 이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거란 말을 덧붙였었다. 나는 레이스에서 뒤진 사람처럼,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두 권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두 권의 책은 내게 달콤한 속삭임처럼 들렸다. (201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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