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서 시작할 것인가?
'무엇'에서 시작할 것인가?
  • 양영희 (광명혁신학교연구회장, 교사)
  • 승인 2014.03.0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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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 이반 일리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에서의 긴 생활은 자연의 질서와 흐름을 완전히 내 몸과 마음에서 걷어가 버렸다. 그러다, 잊혀져버린 감각이 8년 전 시골에 작은 농가를 구하고 난 뒤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밤이 얼마나 어두운지, 하늘에 별이 얼마나 총총 떠 있었는지, 새소리와 닭 울음으로 시작하는 아침은 얼마나 고요한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어떻게 생명을 이어가는지 그 모든 게 재부팅되듯 되살아왔다.
태어나면서부터 아파트와 마트, 학원이 생활공간의 전부인 아이들은 훨씬 그 상황이 심각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오래 만나오면서 여러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 중 가장 놀라운 것이 바로 우리 삶의 원형과 자연에 대한 왜곡이다. 아이들은 식탁에 올라오는 모든 것은 마트와 백화점에서 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물은 동물원에 있는 것이고 인간이 값을 지불하면 언제라도 이용하고 볼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이 세상엔 언제나 빛이 있어 밝고, 칠흑같은 어둠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그것은 낡고 미개한 것이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원래 시멘트와 블록들로 만들어져 있으며 흙은 농부들이나 만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많은 아이들에게 흙은 더러운 것이며 따라서 만져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과 전혀 상관없는 삶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직접 대면할 이유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캠핑이나 현장학습을 가지만 그건 일회적 관상용이며 모든 생활은 가공된 공간과 끝없이 소모되는 소비의 연속일 뿐이다.

1978년부터 1990년 사이의 강연 원고 모음인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우리에게 잊혀진 것들을 들추어내고 현재 우리에게 닥친 위기의 출발과 해결점을 명쾌하게 안내한다.

‘한 그루의 참나무는 공용이다. 여름이면 그늘은 양치기와 양떼 몫이고 도토리는 돼지와 이웃 농민, 마른 가지는 마을의 과부가 쓸 땔감이며 해거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된다.’

이처럼 그가 복원시켜주는 여러 기억 들 중 내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공용’, ‘공적 영역’이었다.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이전, 분명 우리에겐 사적 영역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여유로운 ‘공용’이 존재했다. 집 앞의 골목부터 마을의 대부분의 공간이 모두를 위한 공간이었으며 소와 가축이 다니던 길을 사람이 평화롭게 다녔다. 마을은 고요한 적막이 평화롭게 존재했으며 그 속에서 자연이 숨 쉬고 말을 했다. 새들과 꽃들과 하늘과 바람이 저마다의 색과 음을 냈으며 사람도 그 중 하나였다. 낮은 담장위로 친구를 부르고, 엄마가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해질녘이면 마을에 울리는 한가로움이 있었다.

공용인 환경에 울타리가 생겨나고 기업의 자원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으며 모든 길에 비용을 지불해야 이동권이 보장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 공동체는 재정의 되고 사람들은 상품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경제적 인간이 되었다. 고요는 사라지고 확성기를 차지한 사람의 목소리만 듣게 되었다. ‘지역의 공용물이던 언어 자체가 소통을 위한 국가 자원으로 바뀌었다. 확성기가 없으면 그 사람은 입막음을 당하는 것이며 현대적 통신수단이 잠식해 오면서 공용은 완전히 잠식되고 파괴되었다.’

일리치가 살려낸 기억 중 또 하나는 정주능력이다.

정주는 오로지 인간만이 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산다는 말은 정주한다는 뜻이다. 정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대기를 한 올 한 올 풍경 속에 적어 넣는다는 뜻이었다. 이 일대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돌에 새겨지기도 하고, 장마철에는 갈대와 나뭇잎으로 새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왕의 거리가 질서와 청결과 안전과 예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 사는 동네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면서 짓눌려버렸다. 거리마다 이름을 붙이고 집집마다 번호를 붙인 경찰에게 짓눌려 버렸다. 정주는 시민이 차고와 텔레비전을 소유할 권리를 드높인 복지로 인해 절멸되었다. 사랑하는 기술, 꿈꾸는 기술,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는 기술 등 살아가는 총체적 기술이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의료의 도움에 의지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삶의 기술이 몰수되었다. 수납창고라는 균질한 입주공간에 사는 소비자는 만들어진 세계에 산다. 그가 뭔가를 남기면 찌꺼기이므로 제거된다. 수송 수단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에 밤새 노동력을 보관해 두는 선반인 공동주택은 입주자를 수용하기 위해 칸막이를 제공한다. 이제 부자만이 문을 옮기고 벽에 못을 박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어딘가에 수용되는 것은 불행의 표시이다. 이제 정주의 자유를 고집하는 사람은 아주 부자이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된다.
정주할 자유를 선언하고 공기, 물, 여러 가지 공준 방식을 수호하며 정주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수천가지 방식으로 지구에 거주해 온 우리는, 내 손으로 집을 지을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땅 한 뼘과 서까래 같은 몇 가지 물건을 소유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울타리는 토착 언어로 환경에 대한 공용과 권력을 공유했던 세계에 계급 화된 언어를 들여와 분리했으며 끝없는 필요를 배우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완성했다. 쓸모 있는 물건을 넘치게 만들어 인간은 쓸모없는 존재로 추락했다. 병원은 수 만 가지의 할 병을 체크해내고 학교는 스스로 배우지 않고 학교에 의존하게 만들며 수많은 자동차는 교통에 방해가 된다. 필요를 매일 배운 사람들은 더 많은 필요를 위해 끝이 없는 노동구조에 포섭된다.

아직 자연을 공유하며 성장했던 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일리치가 오래전에 던진 물음들을 만나는 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경험한 공용과 공유의 의미가 어렵지 않게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요즘 불고 있는 귀촌이나 귀농의 바람은 이런 삶을 복원하고자하는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선택은 아이들에게 마당과 골목과 걸어 다닐 길을 허락하고 그 곳에서 그들의 놀이와 문화와 이웃이 자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꼭 필요한 것들만 서로 도와 만들고 나누며 고요한 적막과 작은 소리들을 듣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역사학자답게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당연시하는 모든 고정관념에 물음표를 던져주며 삶의 전환점을 모색하게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무한한 성장과 한정된 자원의 모순관계 때문이고 이는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까? 사랑하고, 꿈꾸고,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할 기술을 모두 빼앗겼다는 우리는 어디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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