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학교가 대안학교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
혁신학교가 대안학교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
  • 양영희
  • 승인 2014.06.0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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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하중초 교사, 전 구름산초교사 )
민들레 91호 평소 존경하고 좋아하는 양희창 선생님의 ‘통일, 꿈 같은 이야기’ 중
‘대안교육이 위기라고도 하고 이미 침체기에 들어섰다고도 한다. 혁신학교, 공립 대안학교가 대안교육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를 읽다가 ‘혁신학교가 대안학교를 대체할 수 없다’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기본적으로 혁신학교는 공교육의 틀거리 안에 있고, 교육과정, 교과서, 기본 시수, 평가 등 거의 모든 부분이 다르지 않다. 교사들의 인사이동도 일반학교와 다르지 않으며 교육청과 국가의 통제 하에서 일반학교가 갖는 모든 어려움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혁신학교는 그 상황에서 또 다른 시도를 개혁적으로 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혁신학교 교사들은 일반학교의 업무에 혁신학교 업무가 더해진 다고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 혁신학교의 노동강도는 일반학교보다 클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시도가 있고 학교마다 다양한 노력들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공교육이 갖는 전체적 분위기와 내용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막연히 혁신학교는 일반학교와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했다가 실망하는 학부모들이 많이 계신다.

개인적으로 공교육 시스템에서 26년을 ‘갇혀’ 살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 못지않게 숨 막혔고 탈출하고 싶을 때 많았다. 물론 지금도 그 느낌과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아마 뚜벅뚜벅 학교문을 걸어 나올 때나 그런 숨막힘은 사라질 것이라 여겨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교직에 나왔을 때는 반공교육이 남아있어서 해마다 6월이면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초등학생들이 판에 박힌 억양으로, 감정까지 실어 멸공을 외치던 시절이었다. 그런 장면을 보기도 괴로운데 아이들이 낸 반공글짓기를 심사까지 하라고 할 땐 머리끝까지 자괴감이 일었다. 그 후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학교는 요동치며 강조해야 하는 사항이 달라졌고 교육과 교사, 아이들은 어떤 항변도 없이 그 내용들을 따라야만 됐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공무원 신분인 공교육 교사들에겐 기본 사항이기도 하다.

요즘은 ‘학교폭력’, ‘자살, 왕따’ 등이 큰 화두가 되고 있어 학교에서는 스포츠클럽, 상담, 학교폭력, 성폭력교육의 시간을 강제로 할당하여 진행하고 그 결과들을 생활기록부(나이스)에 올리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이 자살하고 폭력이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대책을 고민하는 것을 학교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교육하는 공간에서 그들이 느끼고 성찰하는 문제로 교육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위로부터 지시와 명령으로 수행할 항목과 내용이 일방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평가와 나이스 그리고 입시를 통해 확인되고 통제된다. 긴 시간동안 공교육은 이런 지시와 하달이 일반화되었고 결국 학교는 시키는 일만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하는 표현 중 하나가 ‘공문이 와서’란 것이다. 공문이 와야만 움직이고 공문으로 전달된 것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없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래서 학교엔 언제나 안 해도 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교사가 있고 공문과 관련된 일만 수업보다 열심히 하는 교사가 있다.

자기 생각과 철학이 있는 교사라면 공교육에서 마음이 편하기는 힘들다. 공교육의 탄생자체가 국가의 의도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교육과정, 교과목, 교과서, 시수까지 국가가 직접 관여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학교와 교사가 가질 수 있는 자율성은 거의 없다. 국가가 정한 교육목표와 교육과정, 그리고 교과서를 가지고 교사는 진도만 나가면 되고 정해진 시수만 채우는 되는 전달자 역할 이상은 요구되지 않는 것이다.

2009개정 교육과정이 시행될 때 교육부는 학교의 자율성을 최대 보장한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앞에서 말한 모든 사항을 준수하면서’ 라는 묵시적 명제가 존재한다. 이때 찾을 수 있는 자율성을 최대한 끄집어내본다면 ‘진도의 순서를 바꾼다거나, 교과서 내용을 존중하며 교과통합을 시도하는 일, 학사일정에서 수업일수를 준수하면서 방학 일을 하루, 이틀 앞뒤로 하는 일, 갖가지 지시사항(보건, 민주시민, 평화교육, 성폭력예방, 안전교육 등)을 뺀 나머지 창의적 체험활동 내용을 정하는 일’외에는 없다. 우리가 가진 자율성은 이미 닫힌 옷장에서 가짓수 몇 안 되는 옷을 차례를 바꿔 입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실제로 학기 초에 작성하는 교육과정과 시수표에는 개인교사의 교육철학을 반영할 영역은 없다. 기껏 틈새 이용하기와 주제통합 정도이다. 외국처럼 교사들이 교과서 역할을 하고 스스로 교사집단이 모여 프로젝트를 기획해 의미 있는 수업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과서의 내용을 재구성해서 하는 프로젝트도 그나마 초등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다 하더라도 중등은 입시를 벗어난 어떤 것도 불필요하게 느끼는 수요자(학생, 학부모)들의 저항으로 좌초하고 만다. 그냥 중등은 대학가는 일에 일조하는 것과 졸업장을 주는 것 말고는 기대도 요구도 없다.

학교와 교사들의 역할은 제한적이지만 학교 안에서 생긴 문제와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교사로부터 시작되고 교사에게서 끝이 날 정도로 무한대다. 그러니 교사들은 힘들게 무언가를 벌이고 책임질 일을 만드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으로 여긴다. 게다가 산업화 이후로 증폭된 도시 밀집 형 주거형태는 학교를 지나치게 거대하게 만들었으며 익명성을 전제로 가동되는 ‘공장형 학교’는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교사들끼리도 서로 이름과 얼굴을 다 알 수 없으니 학생들은 말 할 필요도 없다. 30학급 이상의 학교들은 교사들끼리 일 년을 같이 근무하고도 단 한번의 대화도 없이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가 교사인지 구분이 안가서 이름표를 착용하는 곳도 많은데 실제로 가까이 가서 이름을 확인하며 대화를 시도하긴 어렵다. 그냥 직원이구나 하며 목례만 하고 지나간다. 또 겨우 얼굴을 익힐 만하면 전근 등으로 사람이 바뀌게 돼 버리고 그런 상황은 다시 반복된다. 큰 학교에서는 도난 사고도 많은데 실제로 교직원이나 학부모를 가장해 가난한 교사들의 지갑을 가져가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수선하고 서로 얼굴을 모르는 학기 초나 학교 행사로 많은 인원이 드나들 때는 이런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아이들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하다. 요즘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가장 큰 고민이나 좌절이 ‘존재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똑 같은 교복까지 입고 있으니 웬만해선 교사들이나 친구들 사이에 자신을 알리고 인정받는 일이 쉽지 않다. 너무나 사람이 많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투명인간으로 사는 곳, 그곳이 도시의 학교모습이다.
학부모들 또한 마찬가지다. 학부모 단체 활동을 하거나 학교일에 참여할 수 있는 소수의 학부모 외엔 학교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다. 관계 맺기도 힘들고 서로 소통할 기회도 없으니 중요한 자식교육을 두고도 단 한 번도 학부모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공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 주변 사람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있다. 학교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장’일 거라고. 교육청이나 교사들의 연수 자리에서 자신들의 학교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교장들은 근무하는 학교가 얼마나 좋은지, 학생들이 얼마나 만족 해 하는지 앞 다퉈 말한다. 그러나 과연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도 같은 표정과 같은 표현을 할까 의문이 든다.

우리나라 학교는 그 무엇도 묻지 않는다. 교사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대부분의 학교가 모두가 모여 편안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내며 토론하거나 회의를 하는 자리도 문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가 학교에 지시했듯 학교는 교장의 의지가 절대 권력이 되어 학교의 방향과 가치를 결정한다. 교장의 임명으로 결정되는 주요 자리(부장)는 일반 교사들 보다 더 교장을 눈치를 봐야하는 승진점수가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계는 수직적 학교문화를 가중시키고 초임 때부터 이런 문화를 접한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교는 원래 이런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도 아이들과 관련한 교육문제에 대해 평교사가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학교는 가동되고, 내려진 지시사항과 매일매일 처리해야할 업무량만 전달된다. 이런 환경은 침묵과 체념을 동시에 체화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고착화되어 이제는 무감해진 일들이다. 혁신학교에서조차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은 걸 문제 삼으면 ‘다른 교장은 더 그래. 이만하면 양반이야’ 라는 얘길 쉽게 할 정도다.

이런 까닭으로 대부분의 혁신학교에서 가장 먼저 노력하는 부분이 바로 민주적인 학교문화 만들기다. 이를 위해 교사 상호간의 존중과 배려, 나눔 문화 만들기, 회의와 토론문화 만들기 등을 배우고 익힌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결정되는 것들은 대부분의 교사들 내면에 스며들어 학교에 대한 주체적 존재로의 인식이 생겨나게 한다. 이런 출발은 이후 혁신학교 만들기의 초석이 되어 자발적 참여와 협력적인 공동체를 형성해 낸다. 그런 경험은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기도 하고 폐쇄적 교실주의를 벗어나 공동수업을 만들고 즐거운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의미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주체로 서게 한다. 이런 노력들은 매일매일을 반복적이고 지루하던 일상에서 활동적이고 학생중심의 다양한 교육내용들로 바꿔내 학생과 학부모들의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경쟁적이고 서열화 된 학습위주의 학교가 함께 배우고 나누는 새로운 공동체문화를 중시하는 곳으로 탈바꿈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혁신학교는 공교육의 제자리 찾기가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재원을 마련해 아이들에게 의무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그 과정과 결과가 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이 땅의 아이들 모두가 국가가 진행하는 교육의 혜택을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과 따뜻하게 관계 맺는 법을 배우고 어디서든 살아갈 힘을 배우는 곳이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아이들을 맡기는 학부모도 모두 당연한 명제 앞에서 편안해야 하고 이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는 사교육과 부모의 처지로 인한 편차가 가져온 ‘출발점이 다른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고, ‘긴 줄 세우기’가 끝나면 입시라는 결과로 아이들의 인생에 대한 등급매기기를 끝낸다. 중등에서 주로 하는 일은 줄 세우기에서 내 학교, 내 반 아이를 앞세우는 것에 대한 의무감에 대한 책임이다. 교육이 오래 전에, 이미 역할이 아주 단순하게 목표와 방향이 수정돼 버렸고 그것은 이 사회가 학력중심 사회를 재편하지 않고는 해결될 전망이 없어 보인다.

혁신학교는 그래서 공교육 기반을 전면적으로 개혁할 수 가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학교문화를 새롭게 시도하고 학생들이 개인주의, 성과주의를 벗어나 공동체 문화를 일시적으로 배운다 하더라도 그 시한은 입시 전 까지 이다. 이런 이유로 혁신학교가 가장 어려운 곳이 바로 고등학교다.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혁신학교를 성공시키거나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한계가 많고 힘들다는 얘길 한다. 입시로 셋팅된 곳에서 학교문화를 바꾸는 것도 어렵고, 한다 하더라고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죽을 고생을 해서 모델이 된 몇몇 곳이 있기도 하지만 그들의 헌신성은 눈물이 날 정도이다.

혁신학교가 해를 거듭하면서 대안학교 학생모집에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러나 공교육의 제 기능 찾기를 위한 노력을 아무리 애를 써도 ,같은 철학을 구성원 모두가 숙지하고 실천하는 대안학교를 넘어설 순 없다고 본다.

혁신학교의 어려움은 위에서 말한 공교육의 위치와 한계를 제외하고도 많다. 가장 큰 어려움은 힘들게 만들어 놓은 성과나 내용, 문화가 지속가능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교장이나 교사 등 혁신 주체들이 바뀌는 것이다.
공교육 교사들은 대부분 4~5년이면 학교를 이동해야 한다. 아무리 후임교사들에게 초기의 철학과 내용들을 연계시키려 해도 맘처럼 쉽게 되질 않는다. 같은 내용이라도 함께 만든 사람들이 아니면 해석이 제각각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것들은 쉽게 폐기되거나 수정 혹은 변형된다. 그리고 교장에 따라 절대적으로 달라지는 한국의 학교문화는 그 지속성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실제로 4년 이상이 된 혁신학교들은 끝없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연수를 진행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지만 처음의 빛깔이 퇴색되는 건 시간문제다
.
둘째는 학교 단위의 연속성외에도 교육감이나 정부정책의 바로미터에 혁신학교의 지속성이 위치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서울의 교육감사퇴로 인한 서울형 혁신학교의 좌초를 우리는 목격했다. 또 얼마 남지 않은 교육감선거로 인한 혁신학교들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혁신교육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오래전부터 혁신교육이 막을 내릴 것이란 얘길 공공연하게 하고 다니는 걸 봤다. 그들의 희망사항을 세뇌시키듯 말하는 사람들이 진보교육감 시절에도 늘 있는 게 현실이다.

혁신학교가 출발할 때 모델이 되었던 학교가 바로 경기도 성남에 있는 6학급의 작은 학교였다. 실제로 공교육이 공동체성을 유지하며 내용을 만들어가려면 학교의 크기는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경기도에서 혁신학교를 시작할 때 학급당 인원을 25명 이하로 할 것이고 학년의 사이즈도 크지 않을 것 등을 고려했다. 그러나 인기 있는 혁신학교의 경우는 40명을 넘는 학급당 인원수에다 학교 총 인원이 1500명이 넘는 경우도 생겨났다. 우리나라는 학구의 주소지에만 살면 누구나 학생으로 받아야 하는 규정이 있어 학교에서는 학생 선택권이 없다. 이러다보니 일반학교 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 돼버린 것이다. 또 기존의 특별실도 모두 교실로 전환하는 곳이 많아졌으며 주변 학교의 어려운 학생들이 혁신학교로 몰리는 현상도 벌어졌다. 공교육의 대안학교처럼 부적응학생과 학습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학생들의 쏠림 현상이 일부 혁신학교로 이어지면서 많은 문제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교사들은 지쳐가고 학교는 비좁아 졌으며 부동산 가격만 높아지기도 했다.

공교육을 바로 세우려 시도했던 ‘배움과 나눔이 즐거운 행복한 공동체 학교’의 꿈이 일부 학교를 특화시키는 현상이 생겨나면서 경기도 에서는 혁신학교의 일반화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즉 그동안의 성과를 도내 모든 학교들과 나누어 확산하려는 정책이다. 그러나 초기 혁신학교들의 자발성까지 확산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프로그램과 기법은 확산할 수 있지만 문화 만들기와 마음까지 전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마음 움직이는 일일 것이다. 철학에 동의하고 자신의 가치와 맞아야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몇 시간 연수와 결정권자의 지시만으론 흉내내기밖에 나올 게 없다. 지금 경기도를 비롯해 혁신학교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혁신학교라는 타이틀이 갖는 브랜드가치는 이미 그 역할을 다 했는지 모른다. 다만 얼마나 지속적으로 초기의 혁신가치와 내용들을 현재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역사로 쓰고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을 주도할 교장이나 교사들은 턱없이 부족하다. 리더 그룹이 쓰러지지 않고 생기 있게 근무할 상황과 더 많은 리더 그룹의 확대 그리고 교장임용제도의 문제도 혁신학교의 지속성과 맞물린 과제다. 또 학교 단위뿐만 아니라 제도와 행정적 환경의 어려움도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상황이다. 교육청도 담당자가 바뀌면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살면서 가장 재미없는 일이 똑같은 일을 처음부터 계속 반복하는 일일 것이다. 혁신학교의 구성원들이 자신과 아이들이 성장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게 아니라 매번 같은 자릴 맴돌고 있다고 느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혁신학교의 어려움은 학교 크기에도 있다는 얘길 다시 하고 싶다.
처음 혁신학교를 시작할 때 주변에서 작은 학교를 찾아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교는 안타깝게도 도시의 공장같은 학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보겠다고, ‘도시의 모든 교사가 시골로 갈 수 없으니 여기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시작해보겠다’고 했었다. 그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더 해 보겠다.’고 겁 없이 덤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4년이 흐른 지금, 행복한 학교 만들기의 가장 중요한 조건중 하나는 ‘학교의 규모가 작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사람이 많으면 교사들끼리도 정상적 관계 맺기가 너무나 힘들다. 그리고 귀한 아이들은 숫자화 되고 익명이 된다. 아무리 애를 써서 아이들 하나를 모두 보듬어 주려해도 늘 용량초과로 쓰러지고 만다. 실제로 1500명이 넘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서 동시에 살다보니 끝없이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머리는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렇게 살다보면 가장 먼저 몸이 반응한다. 쉴 수도 없고 마음만 바빠진다. 지난 4년 동안 나는 마음이 평온해 본적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혼미했었다. 이렇게 살면 교사도 아이들도 학부모도 모두 지칠 수밖에 없다. 학교는 무조건 작아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아파트마다 마을학교가 만들어져서 그 안에서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 모든 부모가 마을사람들로 서로 신뢰하고 모든 아이들을 공동으로 돌봐야한다. 그리고 그 관계와 문화가 학교로 이어져야 한다. 프로그램이나 수업이 바뀌는 것보다 이런 변화가 가장 먼저 진행되어야 한다. 지친 나는 오래전부터 ‘마당학교를 만들어 15명이 넘지 않은 아이들도 맘껏 놀며 미소 짓는 학교’를 상상해 보곤 했다.

혁신학교가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예산의 특혜라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는 공교육이 일부 학교만 예산을 더 주는 방식으로 개혁의 방법을 선택한 것 자체가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또 일부 혁신학교에서 예산 사용을 바르게 하지 못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혁신학교들이 그 예산을 많은 부분 문화예술 강사비로 쓰거나 교무행정보조인건비, 수업보조교사 인건비 등으로 지출한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마땅히 공교육 안에 포함되어야 할 예산이다. 특혜로 받은 예산을 이런 곳에 쓰는 까닭은 교사들의 본업인 ‘아이들 만나고 , 수업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을 수 있는 환경구축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교육의 가장 큰 허점 중 하나가 바로 문화예술, 체육 부문의 허술함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전문인력과 내용이 학교로 들어오는 일들도 당연히 국가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문제가 공교육에서 지원된다면 굳이 혁신학교라고 해서 많은 예산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혁신학교가 돈쓰는 학교로 오해 받는 부분은 바로 우리 공교육이 가진 빈 곳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예산이 확보되어 모든 아이들이 차별 없이 여유 있는 선생님을 만나 양질의 문화예술 교육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과 정책이 공교육 부실을 가져온 것이다.

혁신학교가 공교육의 신뢰를 높이는데 일조하고 학생과 학부모들의 만족도를 높여 놓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내용 있는 혁신학교들은 교사들의 자발성을 근거로 많은 희생과 헌신성을 담보하며 만들어졌다. 혁신학교의 확산이 숫자만큼 퍼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지치지 않을 만큼만 학교 구성원들의 상황에 맞게 조율하자는 이야기도 많고 실제로 갖가지 빛깔로 윤색되기도 한다. 그러니 각자가 생각한 혁신학교에 대한 그림이 다르다. 또 많은 부분 기능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어 실제 교육이 바뀌는 것과 무관하게 진행하는 곳도 생길 수밖에 없다.

또 교사 입장에서 보면 학교를 옮기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게다다 교사들이 오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지 못한다. 현재의 위치와 역할이 학교를 옮기는 순간 멈추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반교사들의 혁신학교를 기피현상도 존재한다. 같은 근무시간을 굳이 노동 강도가 높은 곳에서 힘들게 일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제한적 자발성으로 근근이 내고 있는 성과는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될지 혹은 과거 몇 번의 교육개혁처럼 그냥 옛이야기가 될지 알 수 없다.

공교육 교실에서는 대안학교처럼 아이들 삶 전체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진도 나가기와 빽빽한 일과 속에서 교사도 아이들도 틈이 없다. 하루 한번 이름 불러주기도 신경 써야 가능할 정도다. 학부모와의 관계가 표피적이고 제한적 인건 말할 필요도 없다. 기대는 있지만 신뢰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아이에 대한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공교육과 대안교육이 갖는 거리와 차이가 혁신학교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다만 혁신학교는 무너지고 상처 난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구성원들이 적극적 주체로 서는 민주적 관계회복을 꿈꾼다. 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지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학교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작은 실험들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앞으로 갈 길도 만만치 않다. 아무리 혁신학교에서 노력을 한다하더라도 대안학교가 갖는 애뜻한 공동체성과 교사들의 헌신성을 따를 수 없다고 본다. 학생 한명 한명을 우주로 대하며 그 삶을 통째로 인정해 주는 대안학교와 획일적 공간에 번호로 호칭하는 학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리라. 또 일반교사들이 ‘대안적 삶과 가치를 실천하고 사회구조를 읽으며 통찰하는 힘’을 얼마나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학교 안에, 교실 안에 머물며 갖는 노력만으론 대안학교를 대체할 수 없다’고 본다. 나를 비롯한 공교육 교사들에게 지금 월급의 반도 안 되는 급여를, 때로는 받지도 못하며 아이들과 24시간 생활하라 하면 몇이나 남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일부 혁신학교 교사들이 대안학교와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공교육 교사들은 대안학교의 존재와 상황을 거의 모르는 것 또한 현실이다.
대안학교에서 끝없이 하는 식구회의는 학생과 교사가 같은 크기의 목소리를 내며 학교와 교육의 문제를 성찰해가지만 공교육은 교사들끼리도 목소리의 크기가 다르게 존중된다. 일반 교사의 생각이 학교철학에 반영되기 힘들다. 주종의 관계나 변두리가 생기면 그 소외만큼 뒤떨어지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 관계에서는 하는 척만 하는 변형이 생존기법으로 만들어진다. 학교는 그런 변형이 참 많은 곳이다.

대안학교는 단 한명의 학생일지라도 그의 온전한 삶을 보듬어가지만 혁신학교는 거대다수의 공교육이 무너진 상태에서 극소수의 학교에서 작은 몸부림을 치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 몸부림의 과정이 애절하여 주는 감동은 많다. 그러나 전체 공교육을 흔들고 모두가 혁신교육을 받아들이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초등의 경우 블록 타임제나 중간놀이시간, 주제 통합 수업등 몇몇 외피들은 일반학교까지 보급되고 있지만 아직 거기까지이다. 절대 대안교육이 갖는 가치와 내용들을 혁신학교가 대체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학교교육의 절대 결함은 교육의 내용이 아이들의 삶과 미래와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 학교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경쟁모드를 피할 길이 없는 현실적 이중구도이다.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학교는 가치의 이중화로 인한 딜레마상황처럼 보일 것이다. 교육에서 강조 하는 내용과 현실적 선택과 처지의 완전한 대조가 오히려 교육을 가장 비교육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학교는 솔직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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