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투명한 부품이 된 우리들
시스템의 투명한 부품이 된 우리들
  • 양영희
  • 승인 2014.06.03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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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한병철/문학과 지성사) / 서평

미래를 다룬 영화들을 보면 인간의 뇌까지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설정이 등장할 때가 있다. 우리의 미래는 영화에서도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고 언제나 선과 악이 존재하며 편 가르기와 싸움이 묘사된다. 주인공은 인간성에 천착하지만 늘 쫓기고 무너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스토리가 많다. 관계는 사라지고 엄청난 시스템이 작동되며 인간은 작은 기계나 도구처럼 조작 가능하기도 하다. 또 언제라도 폐기되는 무생물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이름대신 번호나 군대처럼 그룹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개개인의 캐릭터는 중요하지 않으며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사람을 복제하기도 한다. 지배자의 필요에 의해 ‘하찮은 존재가 된 미래인간들’은 쉽게 제거되기도 하고 사라진 그들의 역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되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어디서 희망을 찾아 살아야 할지 답은 없다. 이게 영화 속만의 이야기일까?

IT강국이라고 자랑하며 온 국민의 손에 자본의 산물인 핸드폰을 쥐어준 대한민국은 어디까지 ‘개인사가 있는 개인’이 존재하는 걸까? 하루에도 수십번 찍힌 다는 cctv, 핸드폰의 위치추적, 피시와 인터넷 사용추적가능, 카드사용과 자가용을 이용할 때 확인되는 사생활의 노출 등, 우리는 과연 내가 하루라도 안전하고 은밀하게 지낼 시공간이 존재하는 걸까?

처음 학교에 나이스(업무포털)가 들어올 때 전교조에서는 긴 싸움을 했었다. 아이들의 개인 정보가 학교 담을 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고 이는 막아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런 정보들이 어떻게 쓰이고 악용될지 우린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나이스가 도입될 때 그로 인해 교사의 잡무가 대폭 줄어들고 업무가 수월해 질 거라고 선전했었는데, 이는 더 빨리 더 많은 일을 시키고 통제하기에 알맞은 구조일 뿐이란 걸 경험으로 알게 됐다. 나이스 이후 더 많은 분량의 일들이 얹어지고 더 촘촘하게 우리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음을 누가 부정할 까? 교사들의 일은 갈수록 그 양이 많아지고 퇴근 전까지 동동거려도 일이 마무리 되지 않는 것이 다반사다. 이러니 퇴근 후에도 머릿속은 학교일로 괴로울 때가 많다. 개운하고 상쾌하게 퇴근하는 일은 어려워지고 있다. 작은 예로, 교과서가 없는 교과목인 창체시간의 운영내용을 매 시간 기록하라는 것까지처럼, 이런 세밀한 내용을 만들어 감독하는 상황을 우리는 나이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학교의 모든 공문을 누구라도 들어와 볼 수 있는 정보공개 시스템이 전면 시행된다고 한다. 개인정보나 기밀문서는 반드시 비공개처리를 하라고, 문제가 되면 담당자가 문책 받을 거라는 말을 한다. 이미 학생들의 성적과 학교생활을 부모가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대국민 공개를 하겠다니 누가 왜 하는지도 모르고 우린 그저 결과만 전해들은 상태다. 학교를 그야말로 완전 열어 보이겠다는 것인데, 무엇을 위해 하는지, 어떤 설명도 절차도 없다. 다만 결과통보다. 마치 대국민 공개정보가 최선의 서비스이고 ‘정도’인 것처럼 주체들의 의사는 전혀 상관없이 정부는 진행하고 있다. 교사는 그냥 시스템의 부품인 것처럼 느껴진다.

대한민국 교사들은 학교에 출근하면 모두 업무를 위한 통로인 메신저를 주고받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한다. 그걸 통해 어떤 관리자는 교사들의 동태를 파악한다고 한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근무 중인지를 실시간으로 체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공문을 처리하고 접속한 시간들도 기록되어 있어 교사의 모든 업무상황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태다.

더구나 언제부턴가 모든 교실에 컴퓨터가 놓이고 인터넷이 접속된 이후로 교사들은 더 모이지 않게 되었다. 모두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기면 되기에 바로 옆 교실의 교사와도 인터폰이나 메신저를 이용한다. 편리함을 얻은 대신 사람을 잃었다. 이로 인해 관계를 통한 사회와 성장은 요원해지고 있다. 교육청에서 학교에 요구되는 모든 것도 정보와 수치이며 정확한 시간까지 엄수해야 하는 시스템을 ‘완비’하고 있다.

이렇듯 학교 구조가 교사가 동료와의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경험은 만들어지기 힘들다. 이런 환경에서 자기 경험이 없는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모둠이나 협력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도 많다. 모든 교실문은 굳게 닫혀있고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런데도 균질한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은 동일한 내용과 정보들을 각각의 방에서 접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볼 때 참으로 무서운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세월호 참사처럼 이렇게 길러낸 아이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방에 갇혀 견디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명사회는 읽는 내내 섬뜩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학교장면만 떠올려도 그대로 대비되는 ‘확인 가능함’이 존재한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강력한 경고이자 정확한 저자의 통찰력이 자꾸만 나를 위축시키는 걸 느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소름이 돋았다.

투명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정보와 수치로 전환되며 비밀스러운 것, 낯선 것, 다른 것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데,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훤히 비추고 노출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는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빨아먹고 산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은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명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소진상태에 빠지고 말 것 이다. 그런데 투명성은 인간마저 평준화한다. 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 (본문 요약)

어딜 가나 다를 것 없는 생각들, 심지어 ‘자본이 일정한 속도로 배출한 물건들, 유행들로 인해 외양까지 거기서 거기인 불특정 다수’가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게다가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조차, 들여다보면 인터넷과 sns에서 듣고 본 것들의 나열이 아닌가? 나는 어디 있는가? 나의 생각은 내가 주인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투명사회는 전시사회로, 모든 주체가 스스로 광고의 대상으로 삼고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벗겨지고 노출되며 과도한 전 명백사회,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이다. 쾌락의 놀이공간을 파괴한다. 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성과의 원리는 놀이에서 모든 유희적 요소를 제거하고 일로 만들어버린다, 노는 자, 플레이어는 약물을 투여해가면 몸을 망칠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디지털 시대는 한가로움의 시대가 아니라 성과의 시대다. 신자유주의 명령은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변질시킨다. 휴식도 일의 시간 에 있는 하나의 국면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에겐 일의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없다. 우리는 휴가 때뿐만 아니라 잠 속에까지 일의 시간을 들고 들어간다. 긴장이완 또한 노동력의 재충전을 위한 것이기에 노동의 한 양태일 뿐이다. 휴양은 노동의 타자가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다. 우리는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 모두가 일터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이동식 노동수용소로 인해 더 이상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본문 요약)

교장들이 교사들을 칭찬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열심히 한다’이다. 교사들도 학부모들에게 그런 표현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열심히 하는 그 무언가’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과도 얼굴 볼 시간이 없고, 교사들끼리도 회의시간 조차 잡지 못하는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소진되어 가고 있거나 그 다음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파헤쳐 보려 해도 그 무언가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고, 그 정체모를 무언가 때문에 우리들은 지쳐가고 아이들은 팽개쳐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냥 쓰나미처럼 밀려서 떠밀려가는 원자들이 돼버릴 것 같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세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도 손가락질한는 인간이다.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하지만 우정은 이야기이다. 역사도 이야기이다. 그러나 서사적인 것은 급격히 의미를 상실하고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셀 수 있게 가공해야만 성과와 효율성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전자 시민은 개인적 정체성이 지워버려 아무도 아닌 상태가 된다. 공동체는 단독자에 밀려나고 다중이 아니라 고독의 상황이 된다. (본문 요약)

정답은 ‘이야기’ 일까? 쉽게 집적되고 통계 낼 수 없는 사람들마다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교실 안에서 아무리 공동체를 강조하고 함께 사는 연습을 해도 학교 밖 세상이 이중적인데 아이들은 어떡해야 하나? 세월호 참사를 통해 확인된 것 처럼 신뢰할 수 있는 사회기반이 아무것도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데, 교육이 가진 힘은 뭘까? 이 참담함과 무력감을 넘어설 수 있는 미래는 무엇으로 만들 수 있을까?

201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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