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편하게 폐 끼치는 사회를 희망한다.
서로 편하게 폐 끼치는 사회를 희망한다.
  • 양영희(교사)
  • 승인 2014.06.11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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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하류지향(우치다 타츠루/민들레)
‘제발 공부 좀 해줘.
그것만이 살길이야. 다른 선택은 없어‘
아이들이 태어나 말을 제대로 배우기 전부터 부모는 온갖 교구와 책을 시리즈로 준비하며 아이에게 가르칠 목록을 완비한다. 그리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시작하면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이 출발은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할 때까지 계속된다. 다른 아이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 오르기 위한 레이스인 것이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아이들이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대학진학률도 높아졌다. 그런데 갈수록 진짜 자기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하루 한 시간도 자신을 위한 공부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일본의 통계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아이들은 눈뜨면서부터 다시 침대에 누울 때까지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종일 학교에서 학원으로 끌려 다니고 수업과 문제집을 손에서 놓지 않는데 아이들은 더 무지해 지고 있다고 한다.
갈수록 기본 개념이 형성 안 된 아이들이 늘고 있고 심지어 맞춤법이나 기본 수리가 안 되는 아이들의 퍼센트가 높아지고 있다. 전문대학의 경우는 고등학교보다 낮은 수준의 학생들이 많은 경우도 있어 교수들의 수업을 태반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현장에서 보면 아이들 행동특성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교사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생각하는 수업시간의 태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자기가 버린 쓰레기를 주우라고 해도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고 우기는 행동도 다반사다. 친구에게 함부로 하거나 학습을 방해하는 것도 일상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개념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벽이 놓인 지 오래다. 아이들은 이런 현상에 천연덕스럽지만 교사들은 난감한 무력감이 든다. 우치다의 책을 읽으며 교사들이 이런 현상을 읽는 법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을 우치다는 정확하게 논거를 제시하며 정리해 준다.

과거에는 태어나서 처음 하는 사회적 활동이 노동이 아니고 소비였던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 첫 경험의 차이는 대단히 결정적이다. 한 사람의 몫으로 사회관계의 장에 등장하는 경우, 만일 그가 네 살짜리 아이라면 그를 교섭 상대로 대등하게 대우해 줄 어른은 없다. 하지만 돈을 쓰는 사람으로 등장한다면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이것이 돈의 투명성이라는 특권이다. 어린아이가 용돈을 가지고 소비주체로 시장에 등장할 때 처음 느끼는 소감은 법을 뛰어넘는 전능함이다. 어린아이라도 돈만 있으면 어른과 대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전능성을 과거와는 매우 다른 이질성이다. 소비하는 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한다.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선점하는 쾌감을 알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교육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중에 선점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경매에 참가한 부호들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교사를 거만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말한다.‘자 당신은 뭘 팔건데? 마음에 들면 사주지.’ 이 말을 교실 용어로 바꾸면 ‘글자를 배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가 된다.


과거 우리가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일을 도와 가사에 도움이 되는 과정을 통해 노동의 주체로 자라난 반면 요즘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소비주체로 길러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돈’의 위력이 모든 삶을 관통하는 법칙을 몸에 익혀 학교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실수업에서도 ‘등가교환’을 요구하며 그것이 성립되지 않을 때 그 불쾌감을 견디는 방식으로 ‘해태’행위를 통한 교환을 성립시킨다고 말한다. 수업시간에 돌아다니거나 잠을 자거나 교사의 지시에 불응하는 모든 행동과 타인의 학습을 방해하는 행위까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교환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만큼의 시간동안 계속 한다는 것이다. 우치다의 글을 읽으며 현장교사들이 울분을 참을 수 없었던, ‘이해되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정리가 되었다.

또 소비는 즉시적인 교환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교육은 시간의 문제여서 생기는 마찰과 갈등도 설명한다. 소비주체는 소비가 성립될 때 스스로가 변하지 않는데, 교육은 주체가 변하니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물건을 살 때 생기는 즉시성이 교육에서는 장시간이 소요되는 변화가 상품이기에 교환조건으로 환산할 때 정확하지고 않고 자본의 성격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모습이 가진 모순이 어디에 있는지 그는 보여준다.

아이들이 생에 처음으로 화폐로 인지하는 것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불쾌함을 견디는 것이며 이는 가정에서 부모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래 방법을 통해 배운다. 즉 아버지가 땀 흘리며 노동하는 현장을 보지 못한 아이들은 가계를 꾸리는 어머니를 통해 짐작하는 것이다. 사냥꾼인 아버지가 짐승을 들고 집에 오듯 농부가 곡식과 채소를 지고 집에 오듯, 현대의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자기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부당하고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과시한다. 어머니도 불쾌함을 견디고 있으며 따라서 집에 보탬이 되고 있음을 과시한다. 가족 중에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를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규칙이다. 우리 집에서 누가 가장 많이 불쾌하고 가장 많이 불이익을 받는 사람인가를 둘러싸고 패권 경쟁에 열중하게 된 결과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이것이 불쾌해’라고 끊임없이 표현하는 사람이 더 많은 화폐를 모으게 된다.

불쾌감을 견디는 일,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 일상화된 부모로부터 일찌감치 화폐의 거래방법을 배운 아이들은 더 많은 화폐를 모으는 것은 바로 불쾌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란 산경험을 실천한다. 현대인들의 모든 입에는 ‘힘들어, 바빠, 짜증나’가 붙어있고 아이들도 다르지 않다. 이로써 교실용어는 급격히 ‘불쾌한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

우치다의 말대로 요즘아이들은 어른들의 요구에 그들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래서 개념없는 아이들의 대량출현과 교육붕괴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선 어쩌면 필연이다. 마치 편의점 물건 고르듯 수업을 선택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나 모든 기준이 자신의 필요나 유용성에 근거해 버리거나 도전하지 않는 방식은 현 자본주의에 적응한 아이들의 선택인 것이다. 그는 학교가 공상 과학에나 나올 만한 곳으로 변해버렸다고 했다.

게다가 단기간에 수익을 올려야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는 100년이 걸릴 수도 있는 교육에 대해 아래와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능력있고, 임금이 낮고, 체력이 있고, 권리의식이 희박하고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상사의 말에 순종하고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회사의 전근 명령 하나로 곧바로 해외 지점이나 공장에 부임할 수 있는 그런 청년을 대량으로 공급해 줄 것을 학교에 요구한다. 그래서 학교교육을 비롯해 오늘날 세계의 모든 부분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원리와 국민국가 원리가 다투고 있다. 그것은 수명이 다른 존재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이라고 봐도 좋다.

공부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아이들이 출현했다.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받는 것과 인간으 가치는 관계없다고 대답할 뿐 아니라, 학교에서 나쁜 성적을 받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높인다고 하는 반 학교적인 사고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 지금 즐기고 싶다고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자신감마저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전환은 계층이데올로기 농축의 효과다. 계층간 이데올로기의 차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정착하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이들의 장점을 평가하고 개성을 중시하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결과적으로 계층화를 더 진행시키고 계층간 격차를 고착화시킬지도 모른다.

흔히 지금 시대를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그걸 일찍 감지하고 그들에게 적당한 만큼만 기획하여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봤자 소용없는 공부와 일에 과거 어른들처럼 소진하지 않겠다는 의지이고 실천인 것이다. 우치다가 말한 희망격차는 줄어들 파이프 출구가 그걸 통과해도 취업도 되지 않는 결과를 인지한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한다는 말이나 칭찬이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아이들은 답이 보이는 것에만 반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공부결과가 결과의 효용성으로 기대할 수 있을 때 가담하게 될 확률은 부자집 아이이고 그런 아이들은 등가교환의 우수성 때문에 노력하게 된다는 우치다의 말은 정확한 분석으로 보인다.

그는 또 ‘ 글로벌 자본주의는 개별화와 개성에 주력했다. 모두가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구매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각각의 구성원이 소비주체로 우뚝 서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수십년 거치면서 가족공동체는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라고 말한다.
학교에서도 개별화와 개성은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런데 개별화를 통한 자기결정권의 강화는 자기책임론으로 논리를 완성한다. 바로 이 점이 현대 사회의 가장 근본적 어두움의 시작이라고 본다. 우치다는 이런 리스크를 헤지하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누구나 어린아이였고 병도 들며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자립할 수 없는 구성원도 가족에 포함해야 한다. 가족에게 많은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약자들을 어떻게 잘 돌볼 것인가는 ‘친밀권’으로 말할 수 있다. 60여년 동안 친밀감을 만드는 방법을 우리 사회는 서서히 버리고 말았다. 이것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병에 걸려도 불의의 사고가나도 즉, 약한 인간을 정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지원해 주는 친밀한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지역공동체든 혈연공동체든 상호부조 네트워크를 갖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출신이 어떻든 노력하고자 하는 동기가 평등하게 부여되어야 한다. 그것이 리스크 헤지다. 능력주의는 자기결정.자기책임의 원칙을 성원에게 들이댄다. 그래서 리스크의 개인화는 자기결정과 자기책임의 원칙도 함께 투여된다. 이런 리스크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처신은 가급적 교묘하게 리스크를 헤지하는 것이다,사회가 죽음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는 이때 리스크 헤지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한다. 바꿔 말하면 정책을 결정할 때 눈치를 살펴야 할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하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다. 살아남기를 목표로 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 즉 죽음의 방식이다. 이 방식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밖에 없다. 과거 서로 신세를 지고 도와주는 일이 자연스러웠던 관계를 회복시켜 함께 살아가야 한다.상부상조의 네트워크에 속에 잇어야 리스크헤지가 가능하다. 일본의 교육과 대중매체는 도움을 주고 받을 상대를 가질 수 없는 방대한 수의 구조적 약자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자기결정. 자기책임은 벌거벗은 개인으로 고립무원인 사회에 맞서는 것이다.

그의 명쾌한 논리와 해법에 마음을 뺏길 정도이다.
우리 사회에도 우치다와 같은 시선을 가진 학자 몇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생체시계가 고장 난 아이들, 계절을 잊은 어른들, 중요한 것은 마치 가동이 중단된 은행에 저금이라도 한 듯 한 번도 꺼내보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이다.
가능하면 서로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며 각자의 방에 들어가 오래 외로웠던 우리는 언제 그 문을 열고 나오게 될까? 어린 시절 마을에서 기꺼이 서로에게 ‘폐’가 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공동의 것이었던 시절, 형제자매와 먼 친척의 어려움도 기쁨도 공유되고 함께 극복해 가던 어른들의 생활이 바로 답이라는 생각을 너무 늦게 깨닫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가급적 어렵고 힘든 것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좋은 것만 나누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나눠야 할 것은 어려움이고 고통이며 부족함이다. 30만원의 수학 여행비를 내지 못하는 자신의 가정형편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학교가 아니어야 한다.
서로 편하게 폐 끼치는 사회, 그래도 되는 세상이 바로 답이었던 것이다. 교실에서 ‘공동체’ 란 어려운 말 쓰지 말고 서로 ‘폐’끼쳐도 되는, 야단맞고 층층의 어른으로 불편해도 그 속에서 모든 해답을 찾아내는 ‘정답 있는 세상’을 안내해야겠다. ‘어렵고 힘들고 가난하고 쓸쓸한 것들’을 나누는 방법이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서로 더 가까이 가야 하는 것도 가르쳐야겠다. 서로에게 숨소리 들릴만큼 다가갈 때 우리는 모두 고독한 자기 방에서 나와 함께 거닐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말해줘야겠다. 그것이 바로 우치다가 말한 리스크 헤지이며 우리에게 요청한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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