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은 어디에?
위험한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은 어디에?
  • 정초원
  • 승인 2014.10.2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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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상근 연구원)

요새 유행하고 있는 인터넷 댓글 중 ‘2014년 목표는 살아남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10명의 사망자를 낸 2월 17일의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 사망자 294명을 기록한 4월 16일의 세월호 침몰사고, 2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5월 2일 상왕십리 2호선 지하철 추돌사고, 5월 26일 고양종합터미널 화재사고, 장성 노인요양원 화재 사고, 그리고 그저께 발생한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사고 등 유난히 올 한 해 동안 대형 사고들이 잇따라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서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조심하자는 자조 섞인 표현인 것이다.

국가가 실종된 사회

이 표현이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음을 의미한다. 즉, 국민들이 더 이상 국가를 믿지 못한다는 것으로서 국가가 국민들의 안전 보장이라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 역할은 구성원의 생명 및 안전 보장이다. 국가의 역할을 고민한 대표적인 사상가 홉스는 국가란 개인이 자연 상태에서의 죽음과 무질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들의 권리를 위탁한 존재로 보았다. 즉, ‘안전’이란 개인의 생명과 신체의 보호라는 자유권의 핵심적 사항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근본적인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국가의 이러한 역할이 취약하다. 그러다보니, 경주리조트 붕괴사고는 건축물 설계 및 시공 과정에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축회사를 탓하고,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서는 탑승자들을 방관하고 떠난 선장과 무리하게 오래된 선박을 증축하고 과적한 해운 회사를 비난한다. 또한 테크노밸리 환풍구 사고에서는 유명 가수를 보겠다고 환풍구에 올라섰던 희생자들의 안전불감증을 탓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국가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왜 국가에게 모든 것을 다 해달라고 하냐며 면박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 ‘안전’이란 해운회사나 건설회사 같은 민간 기업들이, 혹은 국민 개개인이 살기 위해 스스로 확보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국민의 안전을 지키려는 본질적 임무를 다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국가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늘 사후약방문이다.

물론 저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안전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고 값싼 원자재를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사고를 초래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공연을 보려는 욕심 때문에 사회자의 내려오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환풍구에 올라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안전에 대한 제도적 틀을 만들어 ‘처벌 및 보상’을 통해 철저한 안전 보장을 달성하는 것은 오직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자 동시에 국가의 본질적 책임이다.

왜 국가가 실종되었나?

그렇다면, 대체 한국에서 국가는 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있지 않을까?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장이라는 기본적인 국가의 책임조차 방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동안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누적된 적폐 등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1990년대 이후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공동체의 이익보다 개개인의 사적 이익을 중시하는 시장만능의 사회로 전환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담론은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자율적 기능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국가가 특정한 가치 또는 공동선을 내세워 자의적으로 경제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그 사회를 망가뜨리는 길이며, 개개인의 이익이 최대한 달성될 수 있을 때 사회가 조화롭게 작동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국가가 국민의 안전이라는 공익을 위해 만들어놓은 각종 규제 장치들은 시장의 기능을 저해하여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기에 축소 또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대한민국의 안전을 담보하고 있던 각종 제도적 장치들의 나사가 하나 둘씩 풀려나갔다. 정부는 안전 관련 규제들을 완화했고, 기업들은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당장 이윤이 나지 않는 안전에 대한 비용을 줄여나갔다. 예컨대, 건조된 지 20년이나 지난 노후 선박인 세월호가 아무런 규제 없이 운행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박연령 제한이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되었기 때문이었고,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은 정비인력의 감축으로 이어져 크고 작은 지하철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1990년대 이후 근 2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담론으로 인해 국민의 생명 및 안전의 보장이라는 국가의 역할이 점차적으로 약화된 결과, 오늘날의 크고 작은 사고들로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국가의 역할을 되찾아오기 위한 방법: 복지국가

이제 국민의 생명 및 안전의 보장이라는 국가의 역할을 되찾아 올 시점이다. 어느 때 보다 더 절박한 시점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그렇게 여기고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줄을 잇는 대형 사고들로 너무나 많은 소중한 생명들이 희생되었고 남은 국민들도 불안에 떨고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다음의 통계는 우리 사회에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국가별 안전사고 지표>

 

 

 

 

한국

미국

독일

스웨덴

산업재해사고 10만인율(2008년)

18.0

4.0

2.04

1.5

자살률(10만명 당)

29.1

12.5

10.5

11.6

교통사고 사망률

2.4

1.3

0.8

0.6

아동안전사고 사망률

6.0

9.2

3.7

2.7

 


위의 표는 각종 안전사고에 대한 국가별 수치이다. 눈에 띄는 점은 한국이나 미국과 같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한 국가들에 비해, 소위 복지국가로 알려진 독일이나 스웨덴 국민들이 훨씬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인구 10만 명 당 산업 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사망 10만인율의 경우, 한국은 무려 18.0, 미국도 4를 나타내는 데 비해 독일이나 스웨덴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자살률 역시 한국은 29.1 명으로 9년째 OECD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데 비해 독일이나 스웨덴은 그 절반이다. 교통사고 사망률, 아동사고 사망률 또한 독일이나 스웨덴이 현저히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한국이나 미국에 비해 정부의 역할 범위가 넓은 독일이나 스웨덴이 훨씬 더 안전한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는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는 데 있어 시장만능보다 복지국가가 훨씬 더 효율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단지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맡겨서는 결코 안전한 사회를 달성하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복지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이유

복지국가의 ‘큰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데 우월한 이유는 재화 생산방식과 가치의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안전’과 같은 국민 전체에게 적용되는 재화는 공동체적 원리, 즉 연대에 기초하여 생산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연대란 공동의 목표를 위해 공동으로 책임지는 사회적 행위로서 안전과 같이 비용은 일부에서 부담하더라도 혜택이 국민 전체에 미치는 재화일 경우, 공동의 책임이 전제되어야 제대로 공급될 수 있다. 이에 정부가 ‘세금’이라는 공동의 책임을 바탕으로 안전을 담보하는 각종 규제정책과 제도들을 시행함으로써 국민의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

반면, 신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방식인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할 수 있는 완전한 시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학적으로 시장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가정을 필요로 한다. 모든 정보가 완전히 공개되어 있어야 하고, 가격이 자유롭게 조정이 가능해야 하며, 모든 행위자들은 객관적인 정보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보는 일부 지배 계층들에게만 접근 기회가 주어져 비대칭적으로 분포하는 경우가 많고, 물리적으로 재화의 가격이 매일 매일 변화하기란 힘들다. 또한 개인들의 행동 양식이 항상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은 손’ 이 작동할 수 있는 시장 자체가 현실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동 방식은 공유하는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연대에 기초하여 재화가 생산될 경우,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는 구성원 사이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생기고 신뢰가 싹트게 된다. 아래의 표는 국가별 공직자 부패정도에 대해 국민들의 인식을 조사한 부패지수이다. 이 역시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1위~10위권 내에 포진해있고, 한국과 미국은 매우 낮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직자의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나타내는 이 수치는 한편으로 국민들이 정부에 갖는 신뢰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순위가 높을수록 우리 정부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통의 목표와 책임이 작동하고 있는 복지국가에서는 이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작용하고 이러한 의식은 또다시 국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아 정부가 추진력 있게 민간 기업을 규제할 수 있는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어 국민들의 안전이 더욱더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국가별 부패지수>

 

국가명

순위

점수

덴마크

1

91

뉴질랜드

1

91

핀란드

3

89

스웨덴

3

89

노르웨이

5

86

네덜란드

8

83

오스트레일리아

9

81

캐나다

9

81

룩셈부르크

11

80

독일

12

78

아이슬란드

12

78

영국

14

76

일본

18

74

미국

19

73

한국

46

55

 

 

그러나 한국과 미국에서는 다르다. 정부는 부패했다고 여겨지기에 내가 내는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의심스럽고, 정부의 정책들은 국민 대다수의 이익보다는 현 정권의 지지 세력을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국민의 안전을 위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신뢰받지 못하고,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온다. 뿐만 아니라 이미 사회에 팽배해있는 자기중심주의는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사회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어 국민의 안전을 위협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보장되는 대한민국 만들기

올 한 해 동안 안타까운 생명들이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고가 인재였다. 제대로 된 안전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더라면, 그리고 철저히 실천되고, 감독되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들이었다. 희생자들 앞에서 우리는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 규정을 강화하고 철저한 감시감독기구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가 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공동체적 연대로 사회의 작동원리를 재편해야 한다.

뉴스만 틀면 나오는 끔찍한 사고들로 2014년은 국민들 모두에게 안타까운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방법, 또 다른 2014년이 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신자유주의라는 시장만능국가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공동의 가치와 책임 하에 작동하는 보편주의 원리의 ‘역동적 복지국가’로 바꾸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제도 속에서 국가가 국민의 생명 및 안전의 보장이라는 제 역할을 충실하게 잘 수행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개개인의 ‘살아남기’라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정초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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