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의 부재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살 시도
복지국가의 부재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살 시도
  • 광명시민신문
  • 승인 2014.11.10 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칼럼]장지연(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사회학 박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가 또 자살을 시도했다. 지난 9월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승소하여 현대자동차 정규직 지위까지 인정받았다는데, 왜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데, 이 슬픈 사건의 배후에도 어김없이 불법파견-불법파업-손해배상과 가압류로 이어지는 구조적인 억압의 현실이 놓여있다. 한 노동자의 자살기도 소식은 우리에게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일깨운다.

복지국가와 탈상품화의 올바른 의미

당초에 복지국가는 임금노동자의 소득단절과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인간의 노동이 상품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탈상품화 수준’은 복지국가 발전의 척도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노동은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이며, 복지국가는 구성원이 모두 노동하지 않는 상태를 지향한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복지국가는 노동하는 사람들 덕분에 굴러간다. 결국, 복지국가는 가장 노동친화적인 국가모델이다. 그래서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완전고용’의 시대가 끝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며, 이는 기실 복지국가의 발전에는 중요한 도전이다.

노동이 가능한 한 좋은 것이길 바란다면, 때로는 노동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퇴로를 막아놓고 아무 일이라도 하라고 밀어 넣지 않는 것, 이것이 ‘탈상품화’의 올바른 의미일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시간(여가)을 얻기 위해서 노동한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는 삶이 승자의 삶이라는 파렴치한 주장을 감히 펼칠 수 없다면, 대답은 하나뿐이다. ‘잠정적 유토피아’라고도 불리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좋은 노동’이다.

‘좋은 노동’이란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노동자에 대한 ‘인정(recognition)’이 주어지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반대로 정당한 분배와 인정이 침해되는 상태는 착취와 모욕이 일상화된 노동이고, 이를 ‘나쁜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상태에 있는 경우를 너무나 흔히 보게 된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힘들어서 못살겠고, 부당한 차별과 모욕이 억울해서 못살겠다는 노동자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삶도 딱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나쁜 노동이 만연한 우리나라에서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노동을 추구한다. 여기서 특히 노동운동은 ‘좋은 노동’을 만들기 위한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노동자가 혼자의 힘으로 자본에 맞서 권리를 지켜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대응하는 길 밖에 없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착취, 배제의 문제는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그리고 파업권만 실질적으로 보장된다면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

복지국가를 공약했던 박근혜 정부의 기만적 행태

노동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기업들이 노동3권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지만, 국가가 여기에 동조한다면 이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복지국가는커녕 중립적인 관리자의 역할마저도 포기해버린 국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지금 그런 지경에 놓여있다.

박근혜 정부가 복지국가를 지향한다고 공약하고 선전하는 것을 볼 때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이유는, 복지국가란 단순히 복지를 조금 더 추가하는 나라나 복지제도가 발달한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복지국가를 공약하고는 실제로는 복지국가에 정면으로 반하는 국정운영 방식을 취하고 있다.

복지국가란 자본주의적 ‘시장(Market)’이 낳는 폐해를 정치권력으로 제어하는 국가모델이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사회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관철되는 정글이 되어버릴 것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선거를 통해 대다수 국민들의 뜻을 위임 받은 국가가 적절한 규제와 개입을 통해서 이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려는 것이고, 그 일부가 다양한 복지제도이다. 그러므로 복지제도 시행보다 더 근본적인 복지국가의 역할은 노동자의 삶이 ‘바닥을 향한 질주’가 되지 않도록 ‘노사관계의 공정한 규칙’을 세우고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개입은 보편적 복지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국가는 어떤가?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가 짬짜미로 노조활동을 탄압하고 있다. 노조활동을 ‘귀족노조’, ‘밥그릇싸움’,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며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직접적인 폭력을 동원한 노조파괴마저도 방조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법부를 통해 ‘불법파업’ 딱지를 붙이고 ‘손해배상’을 물린다.

이번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자살 기도 사건은 노동자에게 일을 시켜서 그 이익은 전유하면서도 보호의 책임을 거부하는 양식인 ‘사내하청’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근로자를 현대자동차 정규직으로 보아야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손해배상 폭탄’을 투하하는 국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불법파업’과 ‘손해배상’ 판결, 이 두 단계를 거치고 나면 노동조합이 남아나기는 쉽지 않다. 다른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파업으로 인해서 이렇게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을 하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이 두 단계의 국가 개입은 대한민국 국가의 성격을 드러내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국가가 나서서 노조 파괴를 돕는 대한민국

‘그러게 왜 애당초 불법으로 파업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우리나라는 합법 파업의 범위를 파업의 목적이나 수단, 절차 등에 있어서 매우 좁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파업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의 쟁의행위가 불법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반대로 합법 파업이 거의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리니, 관련자 모두가 형법상의 업무방해죄로 처벌될 위험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또, 손해배상 금액은 왜 이렇게 크게 부과되는 것인가? 이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파업으로 인해서 기업이 보게 된 손해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불합리한 데 기인한다. 원래 파업은 노무의 제공을 집단적으로 거절함으로써 회사를 압박하는 수단이므로 기업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파업을 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므로, ‘불법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을 물린다고 하더라도 그 금액은 ‘적법한 파업이었다면 기업이 입었을 손해’에 대해서는 배상책임을 물릴 수 없고, 이것이 불법이어서 추가로 가해진 손해에 대해서만 그 책임을 물릴 수 있다는 것이 외국의 법적용 사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원은 파업으로 인해 정지된 영업상의 이익을 모두 배상해야 할 손해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손해배상 금액이 터무니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 자료에 따르면,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이 손해배상을 청구당한 금액만도 17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2012년 12월, 한진중공업 노조간부 최강서씨는 ‘158억 원 손해배상 철회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국가가 나서서 노조 파괴를 돕고 있는 형편에 복지제도를 잘 정비해서 ‘모두가 잘사는 사회로 가자’는 외침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이 부분은 박근혜 정부가 복지국가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며 오히려 시장국가의 첨병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우리 국민의 상당수는 지금 복지국가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더 절박하게 품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