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홀로 94일간 4,285킬로미터를 걷는다는 것.
여성 홀로 94일간 4,285킬로미터를 걷는다는 것.
  • 양영희(하중초 교사)
  • 승인 2015.01.26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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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 서서 / 영화 <와일드>를 보고
▲ 영화 '와일드'는 실존 인물을 그린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상실은 또 다른 상실을 낳기도 한다.
‘내 인생의 센터, 중심이 되는 사람’
셰릴 스트레이드는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를 갑자기 잃고 자신의 일상을 놓아버린다. 결혼한 상태였지만 방탕한 생활을 했고 마약까지 한다. 그런 그녀 곁을 남편도 떠난다. 걷잡을 수 없는 나락에서 그녀 스스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배낭을 멘다. 그녀가 걷기로 작정한 곳은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을 잇는 4,285km의 도보여행 코스인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였다. 영화는 그녀가 자신의 몸보다 몇 배나 되는 커다란 배낭을 겹겹이 둘러매고 마치 배낭에 끌려가듯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은 죽을 힘을 다해 암벽을 오르다 발톱에 피가 나 양말이 흥건히 젖는다. 신발을 벗고 너덜거리는 엄지발톱을 뽑아낼 때 그 고통의 신음소리가 온 산을 울린다. 그런데 급기야 암벽위의 신발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되는 일이 없다. 그녀의 인생처럼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녀는 다른 한쪽의 신발을 마저 던져 버리며 분노한다. 가끔 인생은 달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해야 할 때가 있다. 셰릴은 신발도 없이 그녀의 고통이 안내하는 대로 길을 갔다. 안락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있었다면, 그녀와 사랑을 나눌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 고통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가끔은 철저히 혼자일 때 슬픔과 괴로움이 도를 넘을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상의 용기와 힘을 내기도 한다.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배낭을 짊어지고 길 떠나는 셰릴 스트레이드의 불안한 눈길과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준비되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듯 했다. 길도 잘 찾을 수 없고 텐트도 혼자 쳐 본적 없으며 더군다나 혼자 야생에서 잠을 자 본 적도 없다. 어둠도 무섭고 산짐승도 무섭고 뱀도 무섭고 남자는 더 무섭다. 셰릴이 그랬던 것처럼 연료를 사용할 줄도 모르고 무거운 배낭을 종일 메고 다녀본 적도 없다. 우린 무게를 느끼며 살지 등에 매고 다니진 않으니까. 게다가 뜨거운 햇살로 땀이 나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한다. 어느 코스는 눈과 얼음이 덮여있다. 그리고 곁에서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을 고생을 해서 쓰러지기 직전에 닿으면 나타나는 대피소 같은 보급소가 있을 뿐이다. 그 길을 94일을 걸었다. 누군가 ‘힘들지 않냐고, 포기 할 마음 없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2분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100% 공감했다. 우리도 모두 아침, 저녁으로 생각이 달라지는 고민거리를 떠안고 헤매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 이 모든 이야기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그녀는 PCT를 완주한 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와 함께 길을 걸으며 두려움에 떨고 낯선 것들에 익숙해지며 경이로운 자연과 하나 되는 감동을 모두 느꼈다. 날마다 조금씩 능숙해지는 짐 싸기, 걷기, 야생생활, 그리고 당당해진 발걸음이 모두 내 것 같았다. 이렇게 온몸으로 자연의 품에 안겨 걷는 일을 한번만 해내면 인생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실은 또 다른 상실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셰릴에겐 그것이 다시 태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배낭 속 불필요한 것들을 빼내고 다시 채운 새로운 것들로 말이다. (201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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