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정말 학교가 필요할까?’
‘우리에게 정말 학교가 필요할까?’
  • 양영희
  • 승인 2015.11.10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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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학교 서평(존 테일러 개토, 민들레) / 양영희 (교사)

“거대한 세뇌도구이자 분류기계로 작동해 사람들에게서 아이들을 강탈하는 학교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냈다니...이것이 내 인생이었나? 하늘이시여!”

개토의 통탄이 학교에서 28년이 되어가는 나의 온몸에 전율처럼 전달된다. 송두리째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내게는 온갖 사명감과 철학으로 무장한 채 지낸 곳에서의 일들이 시스템의 부품역할이었다니 믿어지지도 긍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의 몸과 마음, 인생을 통째로 무력화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니 말이다.

개토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가 분석한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공교육은 더 이상 뭘 어째야 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공교육 존재 자체가 몹시 불순한 의도로 조직적으로 만들어져 온 역사라는 것 아닌가? 그는 여러 사례와 자료, 문헌들을 연구해 이런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개토가 30년간을 학교에서 보낸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우리가 몰랐거나 속았던 공교육의 속살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는 글의 곳곳에서 슬픔과 분노를 토로한다. 그런 그의 고통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고 결국 나는 그의 이야길 읽으면서 몹시 아팠다. 몇 번을 덮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오래 개토와 만나고 있으니 마치 책을 내가 쓴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나의 글 읽기는 그와 동료교사로서의 고통을 공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수상한 학교>는 작은 사례들까지 우리의 학교와 다르지 않았고 아이들의 상황, 교실의 풍경, 교사들의 정서까지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건 우리와 다르네요. 진실이 아니 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무기력한 아이들, 늘 심심하다고 사는 게 재미없다고 하면서도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모르는 아이들, 자신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모든 것들과 단절되어 내면이 텅 비어있는 아이들, 학교에서 하는 어떤 것도 흥미가 없으며 흠뻑 빠져들어 즐겁게 배우는 모습을 찾기 힘든 교실, 게다가 서로를 방해하고 공격하고 상처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부끄러움도 용서도 없으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기 힘든 교실......’

지금 우리학교는 끝을 모르고 상막해져 가고 모두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경쟁으로 유지되는 교실, 격차 스트레스, 찾을 수 없는 존재감으로 모두가 투명인간처럼, 모래알처럼 지내는 공장형 학교에서의 시간은 언젠가부터 아이들에게도 교사들에게도 고통의 공간이 돼 버렸다. 학급 아이들이 싸움을 해서 ‘친구끼리 왜 그러니?’라고 말을 하면 ‘갠 제 친구 아닌데요? 난 게 싫어해요’라는 말을 눈 똑바로 뜨고 말하는 아이, 수업시간엔 최선을 다해 수업을 방해하고 농담이나 비웃음으로 수업의 과정을 흐려버리는 아이들, 교사의 지도에 늘 조건을 붙이며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하려는 아이들......

요즘 교사들은 학교 교육이 가능한지 묻고 있다. 소진되고 좌절하며 힘들게 견디는 교사들이 많다. 과거에는 공동체에 피해를 입히거나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규칙을 어겼을 때처럼 잘못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아이들이 많았다. 우린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욕설을 하고 폭력적 비속어를 일상적으로 쓰면서 매일 다른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며 그런 아이를 대하는 친구들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같이 웃고 논다.

‘우리에게 정말 학교가 필요할까?’

11개나 되는 과목, 높은 난이도로 학습을 포기하게 만드는 교과서와 시험, 그리고 하루 6시간의 강제학습노동. 그러나 학교를 다닐수록 점점 행동이 나빠지고 교육으로부터 멀어지는 아이들의 현상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긴 시간을 학교에 갇혀 지내놓고 아이들은 ‘빈손’으로 학교를 나온다. 살아갈 힘도 내용도 자신도 없고 써 먹을 만한 경험도 없이 말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작은 결정도 혼자 하지 못하며 불안에 떠는 모습이 오늘날 학교를 나서는 아이들 모습이다. 이런 현상은 교육자로서 무력감을 넘어 자괴감이 들 정도다. 학교 무용론을 펴고 싶은 심정이다.

개토는 학교의 속성 자체가 현재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과잉생산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 학교는 이 신념을 구현하는 중요한 공장이다. 학교는 소비를 증진해야 하는데 소비를 자극하는 최고의 조건은 지루함이다. 상상력과 고유한 삶의 방식이 끝없는 기억훈련에 마비되고 지속적인 시험, 보상과 처벌을 통한 조건화, 승자와 패자의 게임이 합체하면 지루함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이렇게 해서 ‘삶의 세계와 동떨어진 학교, 껍데기뿐인 학교 개혁들, 여러 제약들, 부끄러운 통계수치들’로 학교는 진짜 교육으로부터 멀어지고 게다가 현실보다 환상을 좋아하는 중독을 유발하여 유지된다고 개토는 분석한다.

또 개토가 ‘쥐가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학교’라고 분석한 것처럼 학교는 늘 정신이 없다. 교사들과 예민한 감성을 가진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면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한다. 강제로 가둬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싶어 하기에 닫힌 공간에서 괴성을 지르고 뛰어다니며 알 수 없는 행동과 주변 친구들을 괴롭히는 행위들을 쉴 새 없이 한다. 코끼리 같은 동물들을 좁은 우리에 가두었을 때 보이는 ‘이상행동’과 다를 것이 없다. 교실마다 움직이며 떠드는 소리와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들은 서로서로 집중하는 환경을 방해하며 건강까지 해칠 정도의 혼잡함이 학교를 장악하고 있다.

자크 루세랑이 말했다는 ‘도덕의 냄새’ 같은 ‘학교의 냄새’를 소개하는 부분도 우리 교실에서 날마다 보는 모습이다. 아이들은 보여지는 것들에만 살짝 신경을 쓰면 그만이라는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것에 익숙하다. 아이들이 배운 것은 공부시간 교사 앞에서만 보여주거나 시험지에 체크하고 토론시간에 발표만 하면 그만이라는 듯 행동한다. 공부를 자신의 삶과는 절대 연결하지 않는다. 또 ‘시간계획이 조밀하게 짜이면 집중하는 모습에만 주의를 쏟으며 실제 집중의 정도에는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된다.’ 는 개토의 지적대로 이런 날들이 많아질수록, 즉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나쁜 습성을 더 많이 몸에 축척하여 나중엔 수정불가의 상태에 이른다. 그런 아이들이 사회를 구성했을 때 나타날 문제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세월호나 방사능문제처럼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감추는 학교’는 아이들에게 ‘비웃음만 사는 학교’ ‘ 학생의 경멸을 불러오는 학교’가 되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어디에도 써먹을 곳이 없는 현실이 된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위해 학교는 ‘가족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약화’시켰다.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를 대하는 태도는 갈수록 불손해지고 존경은 사라졌다. 아이들은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학교는 소득도 없이 버린 것이 너무 많다. 개토의 설명처럼 과거보다 더 많은 예산과 에너지를 수많은 교사 연수와 교육개혁을 하면서도 말이다. 더 많은 것을 잃기 전에 우리는 학교가 더 조직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하기 전에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이들과 이 사회를 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개토의 수많은 사례들이 슬프게도 모두 나의 교실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처음엔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하는 동지로서의 반가움이 컸지만 글을 읽을수록 두터운 어둠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불안을 느낀다. 한번 뿐인 삶을 망칠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늘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웃기웃 댄다. 아예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길 찾기를 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학교는 공부만 잘하면, 어른말만 잘 들으면 모든 게 보장된다고 말해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길은 닫힌 것처럼 단단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만 배웠지 손잡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지도 않았으니 의논할 사람도 없다. 이 책을 읽게 될 수많은 교사들도 잠시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만 가르치면 잘하는 것인 줄 알았고 그것이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어왔으니까 말이다. 개토가 전한 진실은 우릴 놀랍고 혼란스러우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것 같다.

개토는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정의 내린다.

“교육받은 사람은 고독을 즐기고 혼자임을 축복으로 여긴다. 시간이 이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법이 없으며 어디에 있든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 생명이 유한하므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고된 경험을 통해 각자에게 소중한 인생 초안을 마련한다. 새로운 것, 새로운 사상, 새로운 경험을 창조할 능력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욕구를 감지하고 그런 욕구에 이바지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한다.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며 자신의 즐거움과 깨우침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성을 현명하게 다룰 줄도 안다. 관계의 복잡성을 마주하고 씨름할 줄 안다.”

그런 교육을 위해 오픈소스 학습법, 게릴라 학습법 등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진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교육을 바란다면 건물을 벽으로 둘러 유지하던 안전을 포기하고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열린 시스템을 복구해야 한다. 공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며 시간도 탄력적으로 활용한다. 공부의 폭도 유연해야 하고 수업의 배치도 그렇다. 상상력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표준화를 버리고 높은 수준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학교교육과 지역사회의 삶을 하나로 통합하여 탈 전문화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변화는 위로부터 나올 수 없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

개토의 이야기는 학교에서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과 상황들을 모두 정리해 놓은 듯하다. 그러나 이 무거운 현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미미하고 주변을 둘러봐도 기진맥진한 동료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28년간을 교직에서 보낸 시간들이 길을 잃은 듯 휘청거린다.

‘아!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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