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7>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
이라크통신7>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
  • 박기범
  • 승인 2003.03.28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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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


비자와의 싸움

바그다드에서 암만으로 들어온 뒤 며칠은 비자와의 싸움이었다. 아니, 이전에도 한국을 떠나 암만을 머무르는 시간은 늘 그랬다. 길게는 보름 이상을, 짧게는 일주일. 우리는 비자를 받는 문제로 대사관을 쫓아다니고, IPT 관계자나 외국의 평화활동가, 현지 소식통, 여행사들을 찾아다니며 비자 얻을 방법을 찾았다. 비자 얻는 것이 그리 어려운 줄을 알지 못했다.
서류를 만들어 내면 기다려라, 내일 와 봐라, 이라크 당국에서 심사를 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허락했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IPT에서 팩스를 넣어주지 않았다, 기다려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뿐 아니라 외국의 평화활동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해서 이곳 암만에 있는 평화활동가들은 날마다 대사관에 줄을 서 비자가 나왔는지 물어보는 일이 거의 모든 일과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암만 캠프로 돌아와

바그다드를 떠나오던 날, 바그다드에는 군인이 깔리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7일 개전설이 맞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원래 5일 귀국 팀과 연장하는 팀으로 그룹을 나누어 비자를 얻었지만, 팀원 모두의 안전을 고려하여 모두 출국하기로 했다. (이때 우리가 얻은 비자는 관광 비자로 그것은 5인씩 묶어 내주는 것이기 때문에 출국 시에도 그 사람들이 한 날 돌아가야 한다. 5명이 모두 비자 연기를 하거나 모두 출국을 하거나, 개인 행동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귀국을 할 때까지 팀 내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더 이상 바그다드에 남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 판단하며, 우리 팀이 할 수 있는 활동이란 없다고 보았다. 물론 그곳에 더욱 남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동의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상황, 판단이었다. 게다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꼈다. 특히 연배가 높은 이들일수록 20대 초반인 팀원의 안전에 대해 무척 마음을 썼다. 몇 사람의 팀원이 수시로 마음이 흔들리고, 쉽게 감정에 따라 판단할 수 있으니 모두 함께 출국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는 분위기. (물론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20대 팀원들은 그런 우려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까지 왔을 때는, 그리고 자신들도 분명히 스스로를 책임지는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가운데 나는 팀원들 앞에서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내비췄다. 혹여나 나 때문에 20 대 팀원들이 '나도 들어가겠다'는 동요를 일으키게 되는 게 아닌가 했기 때문에 공식 회의
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몇 차례 그런 뜻을 밝혔다. 뜻을 알게 된 팀원들은 모두 크게 걱정을 하며 자신의 문제로 여겼다. 설득하고자 했다. 팀의 처지에서는 내가 가진 뜻이나 판단이 무척 불안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팀을 생각해서건 개인적으로 걱정을 해주어서건 내가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런 속에서 나는 몇가지 준비를 했다. 카심 씨와 하이달 씨의 연락처, 그리고 내가 돌아가면 당신이 나를 도와주기를 바란다는 부탁, 각각 IPT와 휴먼쉴드로 현지에 계속 남아 있는 한상진 씨, 유학생과 닿을 수 있는 선…….
다시 돌아가겠다는 뜻을 뚜렷이 보인 사람은 나 말고도 한겨레 임 기자님이었다. 그런데 한겨레 임 기자님의 경우는 기자라는 처지 때문에 팀내에서 재입국이 암묵적으로 동의, 존중되는 분위기였다. 그 방식은 암만에 돌아가면 팀원으로서가 아니라 취재기자로서 재입국을 준비할 수도 있다는 것. 그 분이야 현지에 있는 강경란 기자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도 했고, 신문사 차원의 계획을 마련할 수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기자라는 신분이 있기에 구제 방법이 조금은 더 보장되어 있다는 까닭이었다.


휴먼쉴드 비자 조차도 받을 수 없게 된 상황

내가 출국하고 나와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 기대고자 한 것은 휴먼쉴드 비자였다.
암만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겪었듯 IPT 비자나 그 밖의 어떤 비자도 그 때까지는 불확실한 거였다. 그리고 이제는 5인 이상으로 그룹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룹 비자 형식만 있는 관광 비자로 다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출국 전에 만난 러시아 유학생이 전해준 말. '지금은 휴먼쉴드로 왔다고 하면 하루만에 비자를 내 준다. 그 뿐 아니라 이라크 내의 숙박이나 식사에 드는 경비마저 당국에서 대주는 형편이다. (물론 폭격 예상 시설로 들어가야 하지만).'
나는 휴먼쉴드 비자에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암만으로 돌아온 이틀 째 팀원 몇에게 이야기하여 나는 휴먼쉴드 비자를 받고 싶다고, 휴먼쉴드 비자 받는 것까지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그 때까지도 걱정을 많이 하며 말리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한 두 사람은 나와 같이 일단 휴먼쉴드 비자 신청을 같이 하겠다고 했다. 비자라는 것은 받아 놓은 뒤에 입국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기범 씨를 말리고 싶지만 꼭 비자를 받겠다면 나도 같이 받겠다, 내 판단은 현재 이라크 재입국은 무모한 일이라고 여겨지지만 기범 씨가 정 들어가겠다면 나도 같이 가겠다……는 뜻이었다.
암만의 휴먼쉴드 본부. 어제까지만 해도 이라크 당국의 가장 큰 환대를 받으며 입국이 가능했던 휴먼쉴드였는데, 이라크 당국의 태도는 180 달라졌다. 오늘부터는 휴먼쉴드에게 단 하나의 비자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히는구나 싶었다. 휴먼쉴드 비자가 아니
라면 방법이 없는데.
이라크 당국이 휴먼쉴드에 대한 태도를 왜 그렇게 바꾸었는지는 저녁이 되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어제 이라크 당국이 휴먼쉴드의 대표급 다섯 사람을 강제 추방했다는 것. 이전부터 이라크 당국이 휴먼쉴드를 그들의 순수한 뜻이 아니라 자신의 정권 방패막으로 이용하려는 조짐이 있어서 휴먼쉴드의 반발이 있었는데, 급기야는 휴먼쉴드로 온 사람들을 당국의 요구에 맞게 60군데 정도의 시설로 배치하려 했다는 것이다. 휴먼쉴드로 온 사람들은 일단 당국의 그러한 태도에 반발하였고, 인간 방패가 되어 시설로 들어가는 것마저 이라크 당국이 정해주는 대로 들어가는 일에 항의 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라크 당국은 그 다섯 사람을 강제 추방한 것이고 휴먼쉴드로 모인 사람들의 반발은 더욱 컸다. 어쨌건 이라크 당국은 더 이상 휴먼쉴드를 자신의 계획대로 이용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휴먼쉴드에게 강한 제재를 시작했다. 휴먼쉴드가 들어가 있는 시설은 바깥에서 문을 걸 수 있게 해 놓았고, 그
시설 바깥은 총을 든 군인이 지키게 했다. 그 밖에도 이런 저런 소식통의 말에 따르면 몇몇 시설에는 창문 바깥에 창살까지 해 두면서 가둔다고 하였고, 휴먼쉴드 회원에 대해서는 스파이나 CIA 혐의를 둔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것이 어느 선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루머인지는 모르나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걸까? 이제는 이라크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더는 없을까?
막막했다. 내 안에 있는 약한 마음은 어쩌면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핑계로 위험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 나는 들어가고 싶었는데 비자를 구할 수 없어 못 들어갔다는 핑계…….


반전평화팀 4진의 합류

이라크의 상황, 암만에서의 비자 상황, 그리고 팀의 상황으로 보아 반전평화팀이 지금 들어오기에는 여러 가지 걱정이 많았다. 일단 이곳에 있는 팀원 대부분의 생각은 지금 이라크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옳지 않다고 판단했고, 암만에 온다고 해도 거의 비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암만과 바그다드를 오가며 팀은 많이 지쳤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쫓기다 보니 팀으로서 놓치고 온 것들이 적지 않았다. 팀을 재정비할 시간, 그리고 팀의 원칙 안에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일정을 마련하는 시간, 이라크 현지의 정황 분석 따위처럼 미리 다져놓아야 할 것이 많았다. 해서 팀으로서는 한국의 지원연대에 4진 입국을 보류했으면 하는 의견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가 암만으로 돌아온 이튿 날 밤 평화팀 4진 여섯 사람이 이곳에 합류하였다.
다른 나라에도 설치미술가 최병수 선생님, 한국에서 NGO 운동을 오래 해 온 임영신 선생님, 뉴스앤조이의 주재일 기자, CPT(IPT와 관련이 있는) 한국 원인 유은하 씨, 그리고 경남평화 연대에서 오신 이해종 선생님과 배상현 씨. 4진으로 들어온 분들은 모두 이라크 입국을 희망하고 있었다. 1, 2, 3진으로 이라크에서 막 나온 사람들은 그 부분에 대해 상황 설명을 해 주며 지금 시기 입국에 대해 꼼꼼히 살펴야 할 문제를 이야기했지만 4진의 의지는 분명했다.


한 가지 길 - 이라크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

휴먼쉴드로 비자 받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우리 가운데 한 분이 특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어 비자를 마련할 수 있겠다는 얘기를 했다. 이 글에서 그 비자 경로를 다 드러내어 밝힐 수는 없는데, 그 비자는 당국의 제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특별한 비자였다. 그런데 이것 또한 다섯 명 이상이 될 때에만 팀을 짤 수 있는 일종의 관광비자였다. 그러나 지난 번과 같은 일반 관광비자가 아니라 그 일정을 특별히 짤 수 있었다. 지난 번 관광비자가 바그다드 시내에서 이라크 관광청의 요구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이라면 이것은 이라크 전역 - 북부 쿠르드 반군이 있는 곳부터 남쪽 걸프 전 당시 폭격이 있던 (지금도 폭격이 있는) 바스라 지역까지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뿐 아니라 이라크의 상류 계층부터 아주 하층민까지 두루 만나며 살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우리가 계획하는 반전캠페인이 있다면 상징적인 지역에서 한 두 차례 그것까지 할 수 있도록 일정을 만들 수도 있다고.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팀을 짜느냐는 것. 이 비자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최대 일곱명. 현재 1진부터 4진까지 모든 팀원을 보았을 때 이라크 입국을 희망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다.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팀원을 구성하는가, 어떤 활동 계획을 가지고 입국자를 결정할 것인가.


또 다른 방식 - 국제 시민 감시단을 통한 비자

이라크 내의 상황은 시시각각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혹시 휴먼쉴드를 통한 비자가 다시 가능해졌을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다음날 휴먼쉴드 본부에서는 회의가 열린다고 했고, 팀의 몇 사람은 그곳을 다녀왔다. 또다른 가능성! 휴먼쉴드를 통한 비자는 여전히 불가능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한 일본인이 자신들은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국제 시민감시단인가 하는 자격을 통한 비자. 우리 팀에서는 짚풀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그 일본인에게 부탁했다. 그 비자를 받을 때 우리의 이야기도 해 주어 함께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우리의 한국인 친구들인데 함께 평화 운동을 하러 왔다, 비자를 함께 내 달라…….'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일단 그 일본인이 소개해주는 이를 통해 비자 서류를 내기로 했다.
이 비자 또한 4진 전체를 포함해 2~3진에 있던 혁, 승로, 혜란과 내가 넣었다. 그 사이 신부님과 ITV 김피디님, 혜경과 은국은 귀국했거나 귀국 일자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두 가지 방식의 비자 동시 추진

다음 날 모여 전체가 이야기를 했다. 우선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확실한 데다 어느 만큼의 활동이 보장된 비자의 팀원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최대 일곱 명까지 신청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6, 7번 신청자는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우선 지원자와 추천자를 가렸다. 우선 한겨레신문의 기자님 두 분이 확정되었다. 그 다음 최혁 선배가 지원하며 이 팀에서 여러 가지 부분을 책임지겠다는 뜻을 밝혔다. 마산에서 올라온 배상현 씨는 이 팀에 끼지 않고 대사관을 통해 추지하는 비자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유은하 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두 분의 입장은 비슷한데, 지금 팀 꾸리는 이 비자로는 반드시 팀으로 행동
해야 하고, 사흘이 되었건 일주일이 되었건 팀의 판단에 따라 위급하다 싶으면 함께 돌아 나온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배상현 씨의 의지는 단호했다. 자신은 처음부터 휴먼쉴드 - 인간방패로서 그곳에 끝까지 남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이라크 당국에 이용당한다 할
지라도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남겠다고 했다. 때문에 위급한 상황이 되면 팀원과의 약속 때문에 함께 나와야 하는 그룹 비자로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은하 씨도 비슷했다. 유은하 씨는 개인적으로 IPT와 같이 행동하려는 계획이었다. 스스로가 CPT 회원이기도 했고, 이라크에 들어가는 마음 또한 IPT의 입장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휴먼쉴드와 IPT를 간단히 비교하면 휴먼쉴드는 폭격이 예상에서 시설에서 그야말로 인간방패로 남겠다는 것이고, IPT는 마을이나 고아원, 학교, 병원 같은 곳에 그대로 남아 그곳 민중들과 함께 전쟁을 겪겠다는 것이다.) 그 밖에 이 비자에 대해 추천을 받거나 지원을 한 사람 가운데 팀으로 짠 사람은 최병수 선생님과 임영선 선생님, 혜란이와 나였다. 나 또한 그룹 비자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 부담되었지만 내가 볼 때에는 개별 비자는 아무래도 안 나올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럴 거라면 팀의 약속에 따라 행동하고, 다시 나오더라도 일단은 비자가 확실한 이 팀에서 재입국을 하고 싶었다. 끝내 확정된 사람은 한겨레 기자를 두 분을 포함하여 최혁, 최병수, 임영선, 성혜란, 박기범 이렇게 다섯이었다.

전날 일본인 친구의 소개로 추진하는 개별 비자와 관련하여 여권과 사진을 가지고 이라크 대사관으로 오라고 했다. 앞에서 말한 확실히 나올 수 있는 그 비자에서는 6, 7번이 제외될지도 모른다는 단서가 있었기 때문에 순번이 늦은 나와 혜란이는 이쪽 비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러시아 유학생 OOO 씨의 합류

셋째 날이 새벽이던가 휴먼쉴드 비자로 이라크에 들어갔던 OOO씨가 우리 숙소로 찾아왔다. 더 이상 휴먼쉴드로 폭격예상 시설에 있을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이가 들려준 이라크 현지의 사정은 우리가 이래저래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라크 당국의 휴먼쉴드 지도부 추방, 반전이 아니라 친후세인으로 이용되는 휴먼쉴드 활동에 대한 갈등, 이라크 당국의 휴먼쉴드에 대한 압박……. 이러한 까닭으로 OOO씨는 돌아왔다.
우리 팀이 두 가지의 방식으로 다시 이라크로 들어가려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 OOO씨 또한 팀에 합류하여 다시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물론 인원이 모두 차 있는 그룹비자 쪽이 아니라 일본인의 소개로 물꼬가 트인 그 비자이다.


비자 확정, 출발

먼저 확실한 것이라던 그룹 비자 10일 오후 우리 손에 들어왔다. 이제 그 팀은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서로 짐을 꾸리고, 마음을 다시 다지느라 바빴다. 그런데 문제, 최병수 선생님이 지난밤 갑자기 위경련을 일으켜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져 몇 시간 쓰러지셨다. 그대로 몸이 고꾸라졌는지 이마에 큰 상처가 있고, 이도 부러졌다 한다. 우리가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기다리는 서너 시간 동안에도 선생님은 억지로 참았다. 배가 많이 아프다 했다. 비자를 받자 마자 선생님은 먼저 병원으로 모셔 보냈는데, 의사는 위출혈이라 했다. 누워 있어야 한다고, 움직일 수 없다고. 일단 선생님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링겔을 꽂았다.
몇 시간 뒷면 바로 출발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팀원들 모두의 판단은 이렇게 아픈 상태인데 어떻게 이라크에 함께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최병수 선생님의 의지가 무척 세어서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대해 크게 걱정을 했다. 시간은 출발하기로 한 여덟 시가 다 되었다. 일단 출발을 조금 늦추고 몇 사람이 병원으로 찾아가 최 선생님을 설득하기로 했다.
하지만 몇 사람이 병원에 다녀온 뒤 최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겠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보고 온 사람들도 아까보다는 몸이 많이 나아진 것 같다면서 고집을 꺾을 수 없겠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링겔을 뽑고 달려올 태세라고. 사람들은 모두 분주했다. 개인 짐과 공동 짐을 꾸렸고, 가는데 필요한 사항들을 체크했다.


바그다드에서 온 한 통의 전화

떠날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는 사이, 바그다드에 있는 한상진 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급작스럽게 상황이 변한다는 것. 지금까지는 15일 유엔 사찰단이 모두 빠지면 개전 시점을 17일로 예상하고, 그렇다면 우리팀은 유엔이 빠지는 15일에 함께 빠진다는 것. 그런데 한상진 팀장의 말에 따르면 15일로 계획한 유엔이 13일부터 모두 철수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은 뒤 긴장이 감돌았다. 어떻게 할 것인지, 한 시라도 출발 일정을 앞당겼다가 13일날 같이 돌아올 것인지. 차를 타고 오가는 시간만 30시간 가깝다. 그러면 들어가는 것을 포기할 것인지.

잠시 뒤 전체가 모여 심각한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상황이 매우 위급해 진 것 같으니 기동성의 문제도 그렇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동차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인원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막 떠나려는 준비를 마친 당시, 이라크로 들어가고픈 마음은 누구나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순번이 뒤에 있던 나와 혜란이가 팀에서 빠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그리고 새벽, 최혁, 최병수, 임영신, 한겨레 기자 두 분이 바그다드로 떠났다. 가방을 다 꾸려놓고, 마음의 준비를 다 해 놓고 그들을 마중해야 하는 마음은 더 없이 아팠다. 힘이 들었다.
지난 번 바그다드에서 나올 때부터 나는 혼자라도 재입국을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결국 다른 입국 희망자들은 대부분 들어가거나 들어가게 되는 상황에서 나는 아무런 비자도, 비자의 가능성도 없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다른 이들이야 대사를 통해 추진하는 개별 비자를 기다려보는 희망이야 있었지만, 나는 그조차 없었다. 이미 그룹 비자가 확실히 나온 상태에서 개별 비자 명단 목록에는 다시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한국에서 보내온 수많은 아이들의 사진과 엽서, 손수 그려 보내온 걸개 들을 담은 상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도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아침에 들어온 소식은 어젯밤 우리의 계획을 뒤흔든 그 전화는 잘못된 정보였음이 확인되었다. 그저 루머로 떠돌던 이야기. 오히려 미국측이 계속 압박을 받고 있는 분위기. 잘못된 정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 일로 속상해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일단 다시 비자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찾고자 했다. 아직 이곳에 남아 개별 비자를 얻고자 하던 다섯 명도 비자를 못 받고 있었다. 아직 안 나왔다면 그 명단에 나와 혜란이를 추가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건 안 될 듯 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우리가 지난 번 들어간 방식인 관광 비자 생각이 났다. 혹시, 혹시 지금 남은 사람들이 추진 하는 개별 비자가 계속 안나온다면 이들과 함께 5인 이상을 꾸려 관광비자를 얻어 들어갈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팀장님께 제안했다. 혹시, 혹시 지금 추진하는 이 비자가 계
속 안 나온다면 관광비자를 통해 들어가는 것은 어떻느냐고......
일단 어제 오전 대사관에 다녀와봐야 했다. 그 비자가 나오는지. 오전에 갔더니 저녁에 다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다시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에 여행사로 문의하여 관광 비자는 지금도 나올 수 있는지 확인했다. 가능하다고 했다. 단 다섯 명이 넘어야 했다. 만일 개별 비자 추진이 성공되면 남는 사람은 혜란이와 나뿐. 그렇게 되면 관광비자 가능성도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입국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저녁에 다시 대사관에 다녀온 결과 내일 오전에 다시 와 보라는 거였다. 그 비자 추진은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가? 어느 정도 시점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예전에도 그런 식으로 보름 이상을 맨날 대사관만 왔다갔다하지 않았던가? 개전 시기는 다가오고 있는데, 예상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우리는 3/11 20:00 또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간다.

어제 저녁 회의를 가져 관광비자 계획을 확정지었다. 이해종 선생님, 러시아 유학생 OOO씨, 성혜란, 박기범, 그리고 우리 팀에 합류하고 싶다는 한국일보 기자 1인.
베이스 캠프는 팀장님과 전승로, 주재일 기자가 지키며 난민구호활동을 위한 준비를 한다.
어제 오늘도 유엔 쪽 회의에 계속 결합하며 그것을 준비하고 있다.
배상현 씨는 그룹 비자로는 결코 들어가지 않겠다는 입장. 어떻게든 들어가 그곳에서 휴먼쉴드 - 인간방패로 끝까지 남겠다는 계획이니 지금 추진하던 개별비자를 계속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유은하 씨 또한 마찬가지. 계속해서 개별 비자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개별 비자를 얻어 현지의 IPT 와 함께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 그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이곳에서 구호활동을 꾸준히 준비하겠다는 것.
주재일 기자는 아예 현지 입국 계획을 지우고, 계속 이곳에 남아 난민구호 활동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떠나기 전

엊그제 한 번 짐을 꾸려 준비를 하다 떠나지 못한 충격에 힘이 빠진 까닭일까? 사실 지금은 그 때만큼 긴장이 크지는 않다. 그 때 꾸린 짐을 풀지 않았으니 다시 쌀 것도 없다. 재입국을 앞두고 식구를 비롯한 지인들과 나눌 인사도 엊그제 다 했으니 지금은 그렇게 마음이 바쁘지 않다. 오늘 전해들은 뉴스를 보았기 때문일까? 영국이 미국과 트러블이 생겼다는 뉴스, 부시의 아버지 전 부시 대통령이 유엔 결의안 없이는 전쟁을 하지 말라고 했다던 말 때문일까? 엊그제처럼 급박한 위기감도 덜하다.

아무래도 여윳돈, 안전 자금을 챙겨야 할 것 같아 은행에 다녀왔다. 요르단 대학 안에 가면 돈을 찾을 수 있다 하여 들어갔는데, 아! 개나리. 노란 개나리가 피었다. 우리 것보다는 송이가 굵지만 그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돈을 찾고, 달러화로 바꾸고, 부식을 좀 더 사 놓고.... 지금 요르단에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이 온다.


2003.3.11
박기범(반전평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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