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습 시작했대요, 한국 시간 열한 시 삼십 일 분"
"공습 시작했대요, 한국 시간 열한 시 삼십 일 분"
  • 박기범
  • 승인 2003.04.10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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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 시작했대요, 한국 시간 열한 시 삼십 일 분"

새벽 네 시 오십 분. 인터넷을 늦게까지 쓰고 숙소로 올라오는 길, 한국에서 유정이에게 전화가 왔다. "공습 시작했대요, 한국 시간 열한 시 삼십 일 분……." 그래도 한 가닥, 부디, 설마 했는데 바그다드로 미사일dl 떨어졌다. 일어나요, 일어나! 공습이 시작했습니다!! 팀원들이 지쳐 쓰러져 자고 있는 방마다 문을 두드렸다. 쌓인 피로에 쓰러져 자던 팀원들 나무 토막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깜짝 놀라며 혹은 신음처럼 "시작했어?"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그 동안 우리가 만나온 이라키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2차 입국시 국경 정류장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며 장미꽃을 선물해준 열두 살 모함마드,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올드 바그다드의 마을 골목에서 우리를 집에 초대한 메자르라는 여인, 내가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오겠다고 할 때 제발, 제발 다시 오지 말라고 애원하던 하이달과 카심. 그리고 장애 어린이집에서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던 노라, 낸씨, 오마르, 꾸아꾸아……. 안돼, 죽지 마. 괜찮은 거지? 제발, 부디 그이들이 잠든 곳 가까이는 아니었으면…….
팀원들은 머리를 매만질 새도 없이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숨가쁘게 공습의 소식과 전쟁 상황을 알리는 cnn으로 모든 눈 귀가 모아졌다.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았고,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눈을 부릅떠 뚫어지게 화면을 보았다.

바로 그 때와 동시에 숙소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이곳의 상황을 묻는 전화, 바그다드 안의 소식을 묻는 전화.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건 바그다드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의 평화팀원의 안전에 대한 것.
이곳 암만 캠프에 발이 묶인 우리 또한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건 인간 방패로 폭격 예상 시설을 지키겠다고 들어간 상현이의 안부. 한상진 선생님과 은하 씨가 머무는 IPT 숙소로는 어렵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새벽에 굉음이 들렸다, 땅이 흔들릴 만큼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다치지 않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간혹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은 최고 속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일단 지금은 폭격이 멈춘 듯 하다'
오전 오후를 통해 우리 팀원들은 어떤 일보다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도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곳 상황이 생생하게 한국으로 알려지기를 바랐다. 우리가 아는한 가능한 만큼 이곳의 분위기를 전했고, 우리가 우려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과 전화 취재 속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우리가 이곳에서 갖는 반전의 의지와 평화에 대한 바람이 왜곡되어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위험마저.

'…… 현재 바그다드에는 팀원 세 사람이 남아 있고, 우리도 최대한 팀원들의 상황을 살피며 그이들의 안전을 돕기 위해 연락을 취하고 있다. 허나 우리는 한국의 언론들이 그이들의 처한 상황에 모든 초점을 두어 시시각각 중계하듯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일을 무척 걱정한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그곳에 끝까지 남은 까닭은 전쟁 아래에 놓인 이라크 인들의 목숨이 바로 우리의 목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안에서 죄 없는 목숨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그것을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자국민에 대한 도의적 차원의 걱정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을 통해 이 전쟁으로 죽어갈 이라크 민중을 보아달라는 것이다. 이 땅에도 갓 태어난 아기들이 엄마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고, 이 땅에도 연인들이 사랑을 나눈다. 이 땅에도 주름 깊이 패인 노인들이 평온한 아침을 맞으며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이 땅의 사람들은 여느 곳에 사는 이들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의 일상을 나눈다.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 이들의 삶과 목숨이 과연 어떤 까닭에 전쟁의 잿더미로 묻혀야만 하는가…….
한국 정부는 우리를 안전하게 구하고 싶다면서 동시에 파병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총을 겨누면서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이야기하는가?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 지옥구덩이로 뛰어든 까닭은 어느 누구도 무고한 목숨을 죽일 수 없다는 것, 어떠한 명분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 어떻게든 전쟁을 막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부디 국내의 관심이 우리 몇 사람에게만 집중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를 통해 이 전쟁 아래에 놓인 작고 약한 인간의 목숨들을 보아달라, 죽어 가는 이라크 인들을 보아달라, 이 곳의 상황은 곧 멀지 않은 내일 한반도에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어제 첫 공습이 시작한 뒤 하루가 지났다. 내가 인천 공항을 떠나 이곳으로 온지는 이제 꼭 한 달이 되었다. 지금 머무는 이곳 요르단 암만은 지옥이다. 바로 지척에서 폭격이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곳에 발이 묶인 채 몸도 마음도 함께 무너지고 있다. 아니, 지금 어디든 지옥 아닌 곳이 있을까? 바그다드야 말할 것도 없고 광화문이나 만석동, 조탑리 할 것없이 눈을 뜬 자가 있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지옥일 테지. 그게 어디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까?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눈이 떠 죽어 가는 이들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눈을 뜨기 전, 이 죽음이 준비되고 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지금이라도 똑똑히 보아야 한다. 괴
롭더라도 똑똑히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한 시라도 빨리이 미친 짓거리를 멈추게 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이 눈물과 촛불뿐일지라도, 작은 목소리를 모아 함께 외치고 기도하는 것 만으로라도…….

지금 시각 공습은 계속되고 있다. 모함메드, 하이달, 카심, 노라, 핫산, 카라르, 그리고 상진, 은하, 상현아 부디 죽지 말고 살아다오. 부디, 제발.

박기범 2003. 3. 21 이곳 시간 08:58
(한국이 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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