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5.18망월동 순례를 다녀와서
(순례) 5.18망월동 순례를 다녀와서
  • 최석희
  • 승인 2003.05.22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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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5.18망월동 순례를 다녀와서

다리하나 건너서 구로, 금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울민주노동자회 최석희 입니다. 동명이인이 있어서 목사님께 광주순례 문자를 보낸것이 계기가 되어 몇자 글을 남깁니다. 다녀온후 시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라는 압력이 있었습니다. 여하튼 저 개인적으로는 5.18이 성역화 된 이후 처음으로 다녀왔습니다. 설레임과 기대를 안고 지역의 노동조합 , 단체, 민주노동당 당원들과함께 출발을 했습니다. 어디가나 그 한명이 있어서 처음 모인 시간보다 한시간이 넘어서 출발했습니다. 프로그램을 알차게 준비하기 위해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방영한 SOFA 비디오와 주한미군 문제를 다룬 영상을 준비했습니다만, 대절한 버스에 비디오기기가 장착되지 않아서 오며 가며, 술잔을 나누며 다녀왔습니다. 광주에 있는 한 어린이집을 빌려서 광주분들과 함께 뒤풀이를 하면서 하루밤을 보냈습니다.

5.18당일 아침은 준비팀의 무리한 일정에 맞추어서 6시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학살지 순례를 떠났습니다. 미니버스를 대상으로한 게엄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민 20여명이 죽고 힘들게 살아남은 3명중 부상한 두명의 남성은 산으로 끌고가 사살하고, 살아남은 여고생은 89년 광주청문회때 자신감을 회복해서(학살사실을 밝히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린다는 협박을 이기고) 진실을 밝히신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남마을 인근의 계곡에서는 80년 오월 광주가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지고 난 이후 6월 2일 계곡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소도 피해갈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동네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자갈밭에 아주 낮게 묻어버린 시민군 시신을 발굴한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에 떨었습니다. 오월은 오월정신에 있는것이라는 말씀을 들으며, 80년 오월을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주남마을을 떠나서 망월동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한 30여분을 갔을까요. 묘역앞에서 버스가 더이상 진입할 수 없어서 걸어서 묘역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를 짖밝는 어이없는 경찰폭력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신묘역 입구에서 출입을 제지하는 전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허울좋은 참여정부가 이럴 수 있는 것인가, 노무현이 미국가서 잘못을 한줄을 알고 있나보다. 그러니 이렇게 제지하지...

구로, 금천의 열성적인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1차로 경찰의 제지를 뚫고 신묘역 정문에 도착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문에서 또다시 경찰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수차례의 몸싸움으로 함께간 아이들은 넋이 나가 울고 있고, 아빠가 행여 다치거나 다시 구속될 두려움에 몹시도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요즘 한총련의 기습시위로 노무현, 강금실 법무장관의 엄정처벌로 말들이 많습니다만, 아마도 한총련의 기습시위는 무리를 지어서 참배를 가려고 하는것을 경찰이 막으면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문앞에서 경찰의 저지망을 뜷을려고 시도한 것은 제가 보기에 적어도 한총련은 아니었습니다. 한총련 학생들은 경찰이 막아서자 몸싸움을 하고, 그래도 뚫을 수 없어서 노무현이 행사장을 빠져나가기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찰과 실갱이를 벌이던 당과 사회단체 일꾼들이 오히려 한총련을 비판할 정도였습니다. 너희는 왜 앉아만 있느냐, 동지가 싸우고 맞으면 함께 싸워야 하는거 아니냐, 지금 경찰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게 정의지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오월혁명정신이냐...
아마 앉아있던 한총련 학생들도 주변의 비판의 소리를 듣고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한총련에대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려던 노무현 정부도 주변의 극우세력의 시선이 두려운지 한총련에대한 마녀 사냥에 나서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한총련에대한 마녀 사냥을 중단하고 한총련에대한 이적단체 규정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땡볕에서, 물도 없어서 목이 타들어 감에도 경찰과의 대치는 한시간 넘게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아 보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전남대 강의가 학생들의 방해로 무산될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학생들을 망월동에 묶어 둘려고 한시간 넘게 묘역에대해서 봉쇄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세상이 변하는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 시민의 자유를 아주 쉽게 억누를 수 있는 것인지 분통이 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한참이 흘러 경찰이 병력을 철 수해 아주 웅장하게 바뀐 신묘역에 도달했습니다. 아주 비싼 대리석 그림으로 수도 없이 조각작품이 이어지고,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고등학교 학생들의 경쾌한 노래를 들으며, 신묘역을 지나 구묘역에 도달했습니다. 지난 23년동안 쓸쓸히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통일을 외치다 먼져가신 열사님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뒤로한채 영면하고 계신곳입니다.

구로금천에서 함께 참여한 분들과 함께 분향을 하고, 무명열사 묘에 잠시 묵상을 하다가, 뒤에 새로 오신 노동열사님들을 참배하고, 힘겹게 금남로를 향했습니다. 오월의 금남로는 세월의 변화를 실감할 정도로 몰라보게 바뀌었습니다. 사방에 차도에 연이어 이어지는 걸게 그림들이 당시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으며, 골목으로 잠시 들어가면 서울의 명동처럼 휘항한 옷차림의 젊은이들이 모습이 당시를 비웃기라도 하는듯 하고 있습니다.

금남로에서는 아주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영호남 택견 겨루기가 와 문화단체의 마당극, 장애인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기획된 휠체어 면허시험장, 버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를 지지하는 버마인들의 선전전 등이 진행되었습니다. 무대에서는 전문 춤꾼들의 극과 율동패들의 율동, 민주인사들의 연설, 효순이 미선이 1주기를 준비하는 분들의 호소로 집회가 진행되었습니다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고 서울을 향했습니다. 수년만에 다시 찾는 오월의 망월동을 다녀오면서, 세월이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할, 채워지고 넘쳐나야할 오월정신에 대해 새삼 자문하며 다녀왔습니다.

<최석희/ 서울민주노동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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