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범 동화작가가 들려주는 이라크 이야기
박기범 동화작가가 들려주는 이라크 이야기
  • 강찬호기자
  • 승인 2003.05.26 19:0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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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범 동화작가가 들려주는 이라크 이야기
“Mr, Mr, GOOD!!"

“우리 시골장터에서 만난 할머니 같았다.”
-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라크 사람들을 만나면서

2003. 5. 26.  강찬호 기자      

          

 

@ 맑고 맑은 눈과 표정을 담고 있는 이라크 어린이들<사진/ 박기범통신 제공>

 

@ 3월 22일 암만 대사관 앞에서 진행했던 집회 모습<사진/ 박기범통신 제공>

 

“여기 정말 폭탄이 떨어질까?”
- 평화로운 이라크 하늘을 보면서

 

이라크 인간방패로 활동을 하고 잠시 한국으로 돌아온 동화작가 박기범씨(31)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라크에서의 활동을 이라크 통신을 통해 국내에 전했다. 본지에서도 그 통신을 광명시민들에게 전한 바 있다.

5월 23일. 오후3시. 광명시평생학습원 2층 강당. 광명동화읽는어른연합(이하 동화연합), 광명시평생학습원, 광명시민신문, 구름산자연학교, 여중생살인사건광명지역대책위원회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행사장 주변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과 글들이 전시되었다. 강연에 앞서, 동화연합에서 동화 두 편을 슬라이드 구연동화로 소개를 하였다. <곰 인형 토토>와 <달보다 멀리>. 전쟁을 배경으로 한 동화들이다.

기자가 행사장을 찾았을 때, 박기범씨는 언론을 꺼린다는 본인의 의사를 전했다. 가능한 보도를 하지 않기를 바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홍보를 하려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너무 달라, 처음에는 당황을 했다. 그러나 강연을 다 듣고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 할 수 있었다. 박기범씨는 본인이 왜 보도를 원하지 않는 지에 대해 그 이유를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한편의 동화처럼 이어져간 강의

 

박기범씨의 강연은 약 2시간 정도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강연은 보통의 강연과는 사뭇 달랐다. 화려한 언변도 아니었고, 논리적인 수사도 아니었다. 동화로만 접하고서, 잔득 기대를 안고 참여했던 이들은 당황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박기범씨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부터, 그 당황스러움은 사라져 갔을 것이다.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여행하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 강연전 두편의 동화가  슬라이드와 함께 구연되었다.

 

 


형식은 파격적이다. 내용은 감동적이다. 시간을 따라가면서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어느 덧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보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듯 박기범씨의 강연은 뉴스를 통해 전쟁의 한 장면으로 전해지거나, 기자들이 보도하는 기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이라크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다른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박기범씨가 동화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연은 중간 중간 이라크에서 활동을 할 당시 찍은 슬리이드와 함께 진행이 되었다. 슬라이드 시작 부분에서, 먼저 맑고 맑은 눈과 표정을 담고 있는 이라크 어린이들이 청중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여운은 강연 끝까지 이어진다. 느리게, 느리게 시간을 더듬어 평화활동가로 참여하게 된 동기와 그 과정을 설명하는 박기범씨의 긴 호흡이 느껴질 때면 그 여운은 더욱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야 할 길 나선, 이라크 인간방패

 

박기범씨는 반전평화활동가로 이라크를 찾게 된 동기를 그저 평범한 이유에서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다른 세상 보듯 보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안 났으면 했고, 몇 명이 몸으로 이라크에 가서, 전쟁 안 된다며, 간다고 하기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이틀 뒤에 갔다,” 이것이 동기의 전부란다.

오히려 걱정은 평화활동팀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을 팀에 합류시켜 줄지,그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라크 요르단으로 가서, 비자를 받기위해 대기를 해야 했던 과정, 평화활동팀에 합류해서 개전 상황을 앞두고서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를 조정하는 과정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통제된 사회이기에 개별적으로 비자를 받기 어려워 5명씩 팀을 짜야 했고, 그마저도 정부요원들의 통제 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들이 한국 반전평화팀의 활동과 순수성을 이해하고 나서는 오히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이야기도 함께 했다.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 모타르 씨 사진. 우리 바그다드 2차 입국 때 우리 곁에 있던 정부 요원.하지만 모타르, 아주 착한 사람이었어요.이 사진은 혜란이와 내가 밤새 아이들 사진과 그림으로 전시물을 만든 거에, 다음 날 아침 모타르가 와서 영어로만 써 놓은 것을 그 아래에 아랍 글자로 써주고 있는 거예요. 이쯤이면 정부 요원이라기 보다는 반전평화팀 현지인이라 할 만 하지요.<사진/ 박기범통신 제공>

 

평화로움으로 만난 이라크 사람들

 

이렇듯 박기범씨가 이라크에 가서 먼저 보고 접한 것은 전쟁의 위험과 살벌함 보다는 ‘평화로운 이라크’ 사람들이었다. 그런 자신의 감회를 “우리 시골마을이나 장터에서 흔히들 만나는 정 많은 시골 할머니를 만나는 듯한 느낌”이라고 그 평화로움을 전했다.
그리고 그런 평화로움을 안고서 이라크 하늘을 바라보면서 드는 느낌은 “정말 이곳에 포탄이 떨어질까?”하는 의문이었다. 박기범씨는 이라크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많았고, 그들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기도 하였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이라크를 드나들게 하고, 이라크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나눔을 가지게 하는 것도, 이들에 대한 각별한 우정과 연대, 그리고 사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라크 현지에 가서 박기범 작가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찾아 했다. 낮에는 낮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밤에는 밤에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각 나라에서 온 평화활동가들과 열심히 반전시위를 하기도 했다. 시위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왔다. 누군가가 건물 앞에, 거리 어느 곳에서 하자는제안을 하면, 그곳에 모여 들었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노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군사독재시절을 경험하면서 시위문화에 익숙한, 한국 반전평화팀의 시위는 현지에서도 당연히 돋보였고, 현장 주도력을 가지기도 하였다며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3월7일 개전설, 3월 17일 개전설을 앞두고, 현지에는 많은 유언비어들이 돌았고, 평화활동팀 내에서도 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참가자들에게 많은 인간적 고뇌를 안겨 주기도 하였다. 이라크 현지인들은 오히려 전쟁의 위험에 대해, 담담했다고 전한다.
대답은 ‘인샬라’, 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하기보다는 평화활동팀의 안전을 먼저 걱정하면서, 안전지대로 피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자신들은 전쟁에 이미 익숙해 있다고. 그들을 뒤로 하고 돌아온 박기범 작가는 당시에 상황을 말하면서, 긴 호흡을 유지하였다.

@ “미스터(Mr.), 미스터(Mr.), 굳(good)!”
<사진/ 박기범통신 제공>

“인간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중에 하나였다." "그들을 친구라고 말해 놓고서...”
떠나는 평화활동팀을 두고서 이라크 사람들은 외쳤다고 한다. “미스터(Mr.), 미스터(Mr.), 굳(good)!”

 

전쟁 나고 다시 이라크로

 

그리고 이틀 지난 후 전쟁이 났다. 개전이 되고 난 후 박기범씨는 다시 이라크로 돌아가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이미 전쟁이 난 상황에서 비자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요르단 이라크 대사관을 매일 찾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요청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라크에는 인간방패 유은하씨와 조성수 기자만 있었다고 한다. 이런 온갖 노력 끝에 다행히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이라크로 들어갔다. 이미 주변에서 폭격의 현장이 목격되었다. 박기범씨를 태우고, 이라크로 향하던 운전수가 사막으로 도망가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이 종료되고, 이라크 시내로 들어 온 미군의 탱크를 보면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는 이중 감정이 들었다고 한다.
21살, 22살 미군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이미 이들은 교육을 받고 참전을 한 듯 하다고 한다. 자신들은 이라크 민중들을 해방하러 온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도 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박기범씨는 탱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텔레비전에서 약탈과 방화로 보도되는 장면들도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후세인에 대해 말하지 않던 이라크 사람들은 후세인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했고, 공관에서 물건들을 가져오는 것은 빼앗겼던 것을 되찾아 오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고 했다. 도덕적인 차원의 약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즐거운 표정들이었고, 오히려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히려 물건을 훔치는 것은 현지 취재기자들이라고 그는 일침을 놓았다. 그리고 오히려 폭동으로 조장하는 듯한 ‘쇼’가 많았다고 서방언론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 구호물자나 구호금이 정말 필요한 곳으로 전해지지 않고

 

현지 구호활동의 표정

 

한편 얼마 전에 국내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듯이, 국내 현지 구호단체들 중에서 자기 단체 ‘생색내기식’으로 참여하는 행태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 구호물자나 구호금이 정말 필요한 곳으로 전해지지 않고, 한 곳으로 몰리는 현상을 보면서, 또한 안타까웠다고 현지 구호 현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반면 한국 평화활동팀의 활동은 현지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참여해서, 진쟁이 진행이 되고 그리고 전쟁이 종료된 후의 난민 구호활동까지 전 과정을 꾸준히 참여하면서 활동을 하고 있는 팀은 한국이 유일하다며 이들의 노력을 전하기도 했다.
또 현재 평화활동팀들은 현지 가가호호 방문작업, 장애아 보호 활동, 청소작업 등을 하고 있다고 최근 통화를 통해 전해들은 소식을 알리기도 하였다.

 

전쟁증언은 이제부터

 

오는6월초에 박기범씨는 다시 이라크로 들어간다. 네 번째다. 오히려 지금이 두렵다고 한다. 진짜 전쟁을 보는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빗어 낸 온갖 참상을 지켜보아야 하는 심정을 미리 헤아리는 것이다.
그동안 만났던 이라크 사람들, 머물던 숙소, 병원 등 무사한 사람이나 장소는 얼마나 될까. 전쟁이 망쳐놓은 것, 전쟁 전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전쟁을 증언하는 것은 이제부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연을 마무리 한다.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 고양초등학교 어린이의 전쟁반대 글

 

 

 

 

<광명시민신문 강찬호 기자 tellme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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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2003-05-26 19:02:03
전쟁을 증언하는 것....그 심정이 참 견디기 쉬운 건 아닐진데...용기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가봅니다..

조명선 2003-05-26 19:02:03
기자님 말처럼 긴 호흡으로 동화책을 힘겹게 한 권 읽고 난 느낌이었지요.전쟁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기 보단 전쟁을 간접으로나마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박기범 선생님이 함께 해 주셨던 시간 참 인상적이고 마음에 긴 여운이 남을 듯 합니다.특히 많이 애쓰신 동화읽는 어른모임에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