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범) 정생이 할아버지
(박기범) 정생이 할아버지
  • 박기범
  • 승인 2003.06.17 14: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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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생이 할아버지


까페에 아무 글도 쓰지 못하고 지낸지 꽤 되었어요. 멀리 멀리로 다니며 이야기를 했던 날들 뒤로 그리했나 봅니다. 마음으로야 어디 먼 곳, 또 다른 먼 곳 거기 이야기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들기 전마다 조금씩이라도 일기를 써야지 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야기 한 번 하면 땅 속 깊이 파묻히는 것 같았고, 아니 그러기도 전에 시간에 대어 움직여 가야 했거든요. 그래도 맨날 늦곤 했어요. 허덕허덕. 졸려서 눈이 감기고, 지쳐 눈이 감기고, 땅 속 어딘가를 찾느라 눈이 감기고, 아무리 말을 아끼려 해도 내 하는 말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아 눈이 감기곤 했습니다.

29일. 그 날은 이야기 일정 가운데 하루가 쏙 비는 날이었어요.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님께 찾아뵙고 싶었지만 실은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도 가까이에서는 권 선생님께 꼭 인사를 드리고 가라고 일러주셨지만 용기가 없는 걸요. 아시는 분이야 다 아시겠지만 전화를 받는 것도 힘이 많이 부치는, 누가 찾아와 십 분 정도만 이야기를 나누어도 온 하루를 앓는다 하시는 선생님이기에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서울에서 안동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가 그냥 되돌아오기도 했거든요.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기운이 더 없다 했고, 녹색평론에는 앞으로 누구든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신다는 글까지 썼다 했으니까요.

조마조마, 결국 낮은산 아저씨가 대신 전화를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다녀가라고 허락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강화의 큰이모 부부와 서울의 낮은산 식구 둘, 그리고 가평 주점뱅이 아저씨까지 모두 여섯이 함께 갔습니다. 저는 진주 강연을 마치고 그리 올라갔어요.


아, 할아버지.

그렇게 해서 가면서도 실은 문간에 서서 인사만 드리고 와야지, 선생님 힘드시지 않게 얼굴만 뵙고 와야지 했거든요. 그런데 와아,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거 어디더라? 아유 까먹었다. 먼 데 밥집에 같이 가 주었어요. 윗쪽에서는 다슬기, 올갱이라고 하는데 거서는 뭐라 했더라, 하이튼 그 국을 함께 먹었어요. 그리고는 또 할아버지가 고운사라는 절에도 데려가 주었어요.

아주 좋았습니다. 아주 행복했습니다. 아주 아주 고마웠고, 그리고 마음이 아팠어요. 할아버지에게 꼭 붙어 엉기고 애교도 부리며 곁에 있는 건 어디에 댈 수 없이 행복했지만, 이렇게 다니고 나면 또 얼마나 아프실까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 걱정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는데,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도 아플 일 없이 정답게 지내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할아버지 발이 이백육십오래요. 와, 나하고 똑같다. 까만 운동화를 신었는데 아주 새 거예요. 아이엠에프 터지고 길에 쌓아두고 파는 거 오천원 주고 샀대. 할아버지 몸에 지니던 것 뭐 하나 가지고 싶어서 내가 계속 운동화 바꿔 신어야지 했어요. "선생님 나랑 신발 바꿔요, 내가 바꿔 신고 갈 거야." 근데요, 에이 내 운동화. 낡았거든요. 깨끗이 빨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마음만 그랬지 바꿔 신지는 못했어요.

할아버지랑 아주 재미있었어요. 할아버지에게 "선생님, 그런데요... 선생님도요, 아직도 이오덕 선생님 무섭고 어렵고 그래요?" 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 살짝 웃으시며 하시는 말씀, "아 지금은 힘도 없는 사람인데 뭐가 무서워요?" 하시는 거예요. 하하하. 선생님이 재미있게 하는 말씀에 한바탕 같이 웃었지만, 두 분 할아버지 건강이 새삼 떠올라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도 연속극을 본대요. 요즘에는 케이비에스 일에서 저녁에 날마다 하는 연속극. 왜 보는 고 하니, 이웃 할머니들이 맨날 그 연속극 얘기라서 안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어쩌다 어느 할머니 한 분, 그걸 못보면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은 어떻게 되었냐 물어본대. 그래서 그거 잘 보아놨다가 줄거리 얘기해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다가도 사이 사이 한 말씀씩 하는 얘기 가운데 오래 남는 게 있어요. 아마 아이들 공부 얘기를 하다 그랬나? 수학 어쩌고 하는 얘기에서 그랬나 보다. 할아버지가 그래요. 수학이라는 게 없었으면 원자폭탄도 없지 않겠느냐면서..... 세상에는 훌륭한 일,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이 꼭 세상에 좋은 일만 한 것 같지 않다고....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또 절에 올라서는 그런 말씀 했어요. 들어가는 문에 사천왕상이 있으니 그걸 가만 보시면서 '나는 언제부턴가 부처님은 이제 가짜 같아요. 늘 웃고만 있는 부처님 얼굴보다는 이 사천왕이 진짜 같아요.'

절에서 내려오고, 할아버지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할아버지도 그만 쉬고 인천, 서울, 가평에서 온 분들도 올라가야지요. 그렇게 그만 헤어지려는데 나는 안 갈 거라고 막 그랬어요. 나는 할아버지랑 같이 자기로 했다고, 할아버지가 재워준댔다고. 실은 할아버지랑 그런 얘기 한 적은 없거든요. 나 혼자 그런 건데 다른 분들은 나랑 할아버지랑 따로 그런 얘기를 한 걸로 들은 거예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기다 아니다 하는 말은 않고 웃기만 하는 거예요. 헤헤, 둘이서 비밀처럼 뭔가 있는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그래서 저도 계속 진짜인 양 그랬지요. 진짜로 할아버지랑 같이 자고 싶었어. 혼자 누우면 달싹할 수도 없을만치 좁은 방, 정말로 거기에서 할아버지랑 꼭 끌어안고 자고 싶었어.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았지만 말로라도 계속 그랬지요, 뭐. 혹시 계속 그러다보면 장난으로 그러던 게 정말로 진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도 살짝 가져보며 말이에요.

할아버지하고 함께 자는 건 못하고, 그래도 가기 전에 한 번만 더 안고 싶은데, 안아달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진짜 돌아서야 하나보다 할 때 안아달라고 징징했어요. 두 팔을 벌리고 따라다니면서 안아줘요, 안아조 했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피하시다가 제 배를 툭툭 치면서 "아유, 빨리 이라크나 다시 가. 한국에 오니까 귀찮게만 하고....." 하시는 거예요. 해해. 사실 할아버지는 제가 지난 번 이라크에 간 것도 미리 알았으면 가지 말라고 말리려 했다고 그랬거든요. 하여튼 그렇게 하고는 꼬옥 안아주셨어요. 나는 안은 팔 안 놓으려 했지요. 헤헤. 그리고는 한 번 더, 나 여기서 잘래요, 그랬더니 혼잣 말씀처럼 "그렇게 맨날 어린애 같아서 어떻게.... 이 다음에 좀 더 씩씩해져서 오면 모를까. 씩씩해져서 다시 와요." 하시는 거예요. 정말 나, 이 다음에 씩씩해져서 다시 찾으면 재워주실까? 할아버지랑 안고 잘 수 있을까?

이그, 할아버지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했더니, 할아버지 말씀. 사랑한다는 말 하나도 안 믿는대, 사랑한다는 사람이 무슨 그렇게 애를 먹이면서 걱정을 시키냐고.... 히이잉.


할아버지 오래 오래 살아야 해요.
나,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싶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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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2003-06-17 14:31:36
정생이 할아버지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을 말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