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에서] 5.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암만에서] 5.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 박기범
  • 승인 2003.07.11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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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이곳 시간으로 내일 밤, 열두 시에 지엠씨라는 국경 택시를 타고 바그다드로 갑니다. 언젠가 썼듯이, (아 바끼통에는 쓰지 않았구나. 반전평화팀 화보집을 내는데 후기를 쓰라 해서 거기에 썼지요.) 지난 4월 2일 폭격이 쏟아지는 그 길을 넘어 들어갈 때는 겁나는 것 없었는데, 이제 다시 들어가려 하니 겁이 많이 났거든요. 정말로. 이제부터는 온전히 혼자서 견뎌야 할 일, 전쟁의 뒷자리를 두 눈으로 확인하며 쓰러진 마을과 망가진 땅, 죽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이니 말이지요. 이 전쟁을 보는 일은 정녕 이제부터일 거라는 생각이었어요. 전쟁이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고 있는지, 삶의 자리를 어떻게 망가뜨려놓고 있는지, 누가 죽고, 누가 다치고, 누가 거리를 헤매이게 되었는지.....

그 후기를 쓴 게 여기 요르단에 온 첫 날이었으니 사흘 전인가요? 그런데 지금은 겁이 나는 것도 없어요. 어서 가야한다는 생각 뿐. 저희가 요르단에 오고 거의 날마다 한 번식 바그다드의 위성 전화를 받았어요. 힘들대요. 아니 힘들다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어요. 혁이 형 목소리가 좋지 않아요. 어서 왔으면 좋겠대요. 어서 오래요. 그 가방은 언제 찾을 건지, 찾아야 올 수 있냐면서 어서 왔으면 좋겠대요. 목지영 누나에게 들으니 혁이 형이 그 사이 아팠대요. 목지영 누나도 힘이 없어요. 어제는 하운이에게 전화가 왔어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언제와, 언제와, 언제와, 언제와, 언제와 응?" 울음이라도 쏟아놓을 듯, 숨이라도 넘어갈 듯, 언제와 언제와만 했어요.

그래, 얼른 갈게 / 언제와?
많이 힘들지? 얼른 갈게. / 언제와?
혁이 형도 목소리 안 좋던데. / 언제와?
너는 아픈 데 없어? / 없어, 언제와?
혁이 형은 아팠다며? / 응, 그 아저씨 또 우울증이야.
어휴, 내가 가서 구해준다고 해. / 빨리와.
아, 하운아, 나 떠나올 때 어머니께서 편지 전해주셨어. / 응 빨리와.
그래 곧 갈게. / 응 빨리와.
.
.
.
그래, 얼른 갈게. 얼른 가서 내가 구해줄게.

구해준다는 말, 혹 오해 마셔요.
우리 평화팀 팀원들에게 하는 말이에요.
내가 가서 좀 찡찡대 주어야 그 넘들 힘 날 거거든요.
나 구박하느라 힘날 거고, 나랑 같이 찡찡대느라 힘날 거고. 해해.
행여나 이라크 사람들, 그 땅을 두고 하는 말 아니고요.

오늘 낮에 혁이 형 전화를 한 번 더 받았어요.
"형, 우울증이라매?"
아니래요. 누가 그랬냐고.
예전 혁이 형이 한 열흘 심한 우울증에 걸린 일이 있었지요.
바그다드 2차 입국 나흘 째부터.
그랬는데 그게, 혁이 형이 나으면서 나에게 옮았어요.
사실 옮은 건 아니고, 그 사람 기운 차릴 때 마침 내가 바닥으로 깊숙히 가라앉던 때와 맞았던 거겠지만.
언젠고 하니, 2차 입국에서 돌아나와 전쟁이 일어난 직후.
내가 아주 엉망으로 눈을 감고 다니던 때.
"해해, 그 우울증 또 나한테 옮기려고 그러는구나?
걱정 마, 내가 가서 구출해줄게."

저도 까페에 있는 현지 활동 모음에서 일지를 보아 알았는데,
지금 현지 팀은 연못을 만들 계획으로 그 일을 시작했고,
계속 현지인들을 만나고 다니고 있대요.
몇 군데 중요하게 들러볼 일정은 혜란과 나를 기다리며
조금 미루어 두고 있대요. 어서 오라고, 같이 다니자고.

(아참, 한상진 선생님은 팀과 다른 곳에 머물며 다른 활동을 할 거거든요. 민간인 피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할 거고, 지금은 당분간 7월에 있을 '평화 캠프'를 준비할 거래요.
아직 자세한 기획안을 보지는 못했는데 대충 가해자의 나라 청년들과 피해자의 나라 청년들이 만나는 자리,
그리고 여러 나라 평화팀이 함께 하는 캠프, 그런 건가 봐요.
계획은 4박 5일 정도를 생각하는데, 일단 우리 한국 평화팀은 그 때가 민중지원활동을 마무리하는 시점이고 해서, 활동의 마무리를 그 캠프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려보고 있어요.)

하운이 녀석, 어제 전화할 때는 어린애 마냥
울듯, 숨이 넘어갈 듯
언제와, 언제와, 언제와, 빨리와 만 하더니
오늘 까페에 들어가 본, 녀석이 쓴 다르 알 하난 보고서를 보니
일 하나는 야무지게 잘 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해해해. 기다려, 내일 간다.
내가 가서 구해줄게!

(너나 잘하라구요?)

<박기범의 이라크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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