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 바그다드 이야기1
[이라크통신] 바그다드 이야기1
  • 박기범
  • 승인 2003.07.16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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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이야기1


(저는 잘 왔어요. 바그다드에 온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가능한 한 날마다 이메일을 보내려고 해요.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국경 없는 통신회가 우리 숙소 가까이로 이사와 있다 합니다. 이용 가능한 시간은 오전 11시에서 저녁 6시까지. 보통 오전 시간은 공동 작업을 하느라 바쁠 테고, 오후 시간 짬이 나는 대로 들르려 합니다. 공짜로 인터넷을 쓰는 만큼 이메일 확인 말고 다른 넷 서핑은 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6월 20일 밤 0시.

드디어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오는 국경 택시를 탔다. 네 번째 올라탄 길. 요르단에 발이 묶여 있다 처음 바그다드 행 국경 택시를 타던 날이 떠올랐다. 반전평화팀의 성명서를 읽은 뒤 하나 둘 차에 오르던 그 흥분, 설렘, 그리고 나름대로의 비장함.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올라탄 두 번째 이라크행. 마지막, 폭격이 쏟아지던 국경을 홀로 넘던 길.
이번은 달랐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한참 전쟁 중이지도 않았다. 해야 할 활동에 대한 부담 혹은 긴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때에 대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열 두 시간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떠들썩 웃기도 하고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에 보았던 건물이나 길이 나오면 그게 반갑고 신기해 할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다들 어찌 즐겁기만 했으랴. 그 엄청난 전쟁을 겪은 땅, 우리는 저마다 그곳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쟁이 지나간 그곳은 왠지 아주 낯선 곳일 것 같기도 했다.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떤 곳을 가는 것처럼.


국경 택시 정류장.

자다 깨다, 요르단 국경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 비자를 받고, 이라크 어느 길가에 내려 아침을 먹기도 하고, 그렇게 열두 시간을 달려 마침내 국경 택시 정류장에 닿았다. 우리 목적지는 국경 택시 정류장이 아니었다. 벌써 이라크에 머물며 활동을 하고 있는 다른 팀원들과 만나기로 한 곳은 알파나 호텔 앞, 아마 운전기사가 길을 물으러 그곳에 잠시 차를 세운 모양이었다.
아, 모함메드. 국경 택시 정류장 바로 맞은편에 있는 집 아이. 운전 기사가 내린 틈을 타 나도 뛰어 나갔다. 모함메드의 집 대문 앞으로 가 대문을 두드리며 “모함메드! 모함멧!”. 큰 소리로 몇 차례 부르니 방안에서 무어라 대답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반가워 모함메드를 크게 불렀다. 문이 열렸다. 먼저 여인(모함메드의 어머니)가 나왔고, 그 뒤를 따라 모함메드가 나왔다. 미스터 박! 아, 모함메드. 모함메드는 그 때에도 내 이름을 기억해 주어 나를 놀라더니 한 달도 넘게 지나 만난 오늘도 이름을 기억해주었다. 그래, 모함메드. 나야 나, 미스터 박. 아직 모함메드가 나온 것을 보지 못한 혜란이를 불러 여기 모함메드가 있다고 알렸다. 혜란이도 달려와 반가워했다. 사진기를 들고 나갔지만 사진을 찍을 틈은 없 었다. 어느덧 차에 올라탄 운전기사 아저씨가 “얄라얄라(빨리빨리)!”를 소리치며 어서 올라타라고 손짓했기 때문이다. 어쩌지? 차를 타러 돌아오면서 모함메드에게 급하게 말했다. 돌아올게, 만나러올 거야! 운전기사 아저씨가 야속했다. 가방에는 모함메드에게 줄 선물도 있는데, 그리고 어쩌면 팀 활동을 하느라 모함메드를 만나러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자동차가 모함메드의 집 앞을 지나치는데, 모함메드가 창 밖에서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유 윌 컴, 컴?” 응, 그래! 올 거야. 올게! 어떻게든 시간을 빼어 다시 와야지, 꼭 모함메드를 다시 만나야지. 아, 나는 왜 힘껏 그 애를 안아주지 못했나. 내가 이라크에 들어와 처음 만난 아이,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만났을 때 내 이름을 기억해주던 아이, 내게 장미꽃을 선물로 주던 아이. 한 달만에 다시 들어온 지금, 또다시 처음으로 만난 아이. 모함메드는 그 때 그 모습이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이라크는 전쟁 뒤, 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그이들의 삶과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고 하지만 모함메드는 그대로였다.


알파나 호텔

국경 택시 정류장에서 알파나 호텔로 가려면 ‘만소우’라는 지역을 지난다. 전쟁 중 가장 폭격이 심했던 곳. 사담 후세인의 집무실과 은신처가 있어 말그대로 쑥대밭이 된 곳. 저기에 과연 건물이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았나 싶을 정도로 그 땅은 폐허가 되었다. 미군이 벌써 잔해를 치웠는지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티그리스 강을 가로짓는 다리를 건넜다. 공습 시작 이틀 전, 온갖 나라의 외국인 평화활동가들이 모두 모여 촛불 시위를 벌인 그곳을 지났다. 반대편으로는 우리가 이라크에 들어와 처음 묵던 만소우 호텔이 보였다. 시커멓게 타 버린 건물.
몇 미터 앞으로 알파나 호텔이 보였다. 그리고 혁이 형이 보였다. 지쳐 보이는 혁이 형, 그리고 위성전화에 대고 언제와, 언제와, 빨리와만 되뇌이던 하운이, 지영이. 우리는 차에 내려 서로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잘 있었어? 응! 힘들었지? 아니 괜찮아…….
바꾸어 탈 자동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알파나에 들어갔다. 알파나의 원숭이 코피는 잘 있을까? 그 때 그 앵무새는 잘 있을까? 알파나에 들어가 그곳의 매니저나 종업원들을 만나도 무척 반가울 것 같았다. 아무렴 반갑고, 반갑고말고. 하루 수천 발씩 폭격이 쏟아지던 그 때 나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한 이들인데, 내가 벌벌 떨며 머물던 집이었는데.
바깥에서 본 알파나는 그대로였다. 황토흙빛 건물도 그대로였고, 문을 열고 들어간 로비의 모습, 화분과 의자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폭발음이 있을 때마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바깥을 살피던 그곳, 밤중의 거센 폭격에는 도무지 겁을 참지 못하고 지하 방공호로 내려가던 그곳. 그런데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없었다. 그 때 그 매니저도 없고, 온갖 궂은 일을 다하던 종업원들도 없었다. 그 가운데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 방공호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파디도 만날 수 없었다. 혹시 파디를 아느냐고, 매니저의 친척인 아이인데 파디를 모르냐고.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 전 매니저의 식구들은 전쟁이 끝난 뒤 모두 떠났다고만 했다. 더 이상 호텔을 운영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평화팀이 머무는 집.

봉고차를 타고 집에 왔다. 전쟁이 끝난 뒤 평화팀은 호텔에 지내지 않고 우리가 만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는 커다란 집. 부엌에 해 먹던 거리들이 놓여 있고, 방마다 사람들이 살던 살림이 놓여 있으니 사람 사는 냄새가 있어 좋았다.
짐을 정리하고, 씻고, 사람들과 회포를 풀 듯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동안 활동한 모습을 담은 거라며 보여준 노트북 안의 사진도 보았다. 하지만 지금 활동하는 지역은 그 전에 우리가 머물던 지역이 아닌데다, 지금 만나 손잡고 일하는 현지인들 또한 그 전에 내가 알던 이들이 아니어서 사진만 보면서는 실감이 잘 나지는 않았다. 혁이 형 말처럼 내가 두 달 전 있던 바그다드가 아니었다. 물론 전쟁이 바꾸어 놓은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망가뜨린 것만이 아니겠지. 그런 만큼 우리 팀이 이곳에서 해야 할 구실, 할 수 있는 것 또한 예상 속에 계획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날은 생각만큼 덥지 않았다. 먼저 있던 팀원들은 오늘은 시원한 편인데다 바람이 많아 그런 거라며 겁을 준다. 이 정도만 되어도 무리 없을 텐데. 하여간 그건 지내보고 알 일이다. 50도면 시원한 편이라니.


몸살

대충 씻고, 짐을 풀고 오후 네 시가 되어 팀원들은 모두 도서관 준비 작업을 하는 알 마시뗄로 떠났다. 우리 팀이 바그다드에서 하려는 계획 가운데 하나가 마을마다 도서관 혹은 놀이방 형태의 아이들을 위한 자치 공간을 마련해놓는 것인데 그것을 알 마시뗄에 있는 헬스 센터 안에서 처음 준비하고 있다. 오늘은 그 공간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남아 있는 외벽의 페인트를 벗기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 두 시간.
팀원들이 일을 하러 그곳으로 갈 때 나는 숙소에 남기로 했다. 암만에 머물면서 오른 몸살이 바그다드에 들어와서까지 낫지 않았다. 한국에서 좀 퍼지며 쉬다 왔으면 좋았을 걸, 아니 한 번은 앓고 나야할 몸살이었으면 한국에서 그리했어야 실컷 땀을 흘렸을 텐데. 아무튼 오늘 저녁 일하러 나가는 길에는 빠져 있겠다 했다. 고생하는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기운을 차려야지.
약을 먹고 누웠다. 그런데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더라? 무슨 걱정, 어떤 불안함. 팀원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잤다. 더워서였을까, 옷이 폭하도록 땀이 났다.


마을.

팀원들은 나보다 더 땀에 절어 돌아왔다. 오는 대로 씻고 저녁을 준비해 먹었다. 숙소에 남아 있으면서도 밥 준비도 안 해놓고, 에이 미안해라.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하운이와 혜란이를 따라 마을 구경을 하겠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바그다드의 치안은 좋지 않기 때문에 여섯 시가 지나면 바깥 활동은 더 할 수 없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주의를 듣고 집을 나섰다.
사실 나는 우리 평화팀이 머무는 집이 생각보다 좋아 조금 놀랐다. 주인네 식구가 집을 비우고 있어 달세를 내며 그것을 빌린 것인데 집이 무척 크고 좋다. 워낙 우리 팀이 하려는 일은 바그다드의 가난한 마을 사람들 곁으로 가고자 하는 거였고, 실제로도 그러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빌려 사는 집은 부자 동네의 커다란 집이니 처음에는 그것이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그 까닭을 물어 들으니 모를 일도 아니었다. 우리 팀이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야말로 가난한 마을의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그 계약이 끝날 무렵부터 팀원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런데다가 평화팀원 말고도 한국에서 다른 단체의 사람들 몇 사람도 함께 지내려니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왕이면 호텔이나 숙박 시설이 아닌 민가를 빌려 지내는 것을 원했던 거고, 그런 조건이면서 우리가 일할 마을과 가까워야 했다. 그러던 차에 우리와 손잡고 일하는 현지인 아미르가 마침 빈 집이 있다며 이 집을 소개해주어 이리 들어오게 된 거라고 했다.
대문을 나와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정말 여기에 있는 집들은 무척 컸다. 한 눈에도 부자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에 나서자 마자 한 아이가 따라왔다. 사내 녀석인데 외국인을 보아 그런지 신기한 듯 호기심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반갑다며 앗싸람 알라이꿈 인사를 건네면 저도 손을 흔들었지만 손을 잡자고 곁에 오라고 하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잘 가라 인사를 하고 계속 걷다보면 어느 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예전에도 거리를 걸을 때면 늘 아이들이 하나 둘 따라오곤 했기에 그다지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골목 하나를 꺾으니 아이들이 골목 양편에 골대를 두고 축구를 하고 있었다. 먼저 어느 꼬마 녀석이 달려오더니 아는 척을 했고, 조금 뒤에는 축구를 하던 아이들 모두가 몰려 들었다. 누구는 이름이 알리라고 했고, 누구는 하이달, 누구는 파디, 누구는 조세프, 누구는 무스파타……. 얼굴과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그 가운데 하이달, 알리, 파디, 조세프는 내가 아는 다른 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그 이름은 철수나 순이처럼 아주 흔하게 붙여 부르는 이름인 모양이다.
아이들은 처음 보았는데도 무척 정이 갔다. 나중에야 아, 여기는 부자 동네의 아이들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 모습에서는 아까 만난 아이들이 가난한 올드 바그다드의 아이들인지 부잣집 아이들인지 달라 보이는 게 거의 없었다. 순박한, 그저 좋아서 쫓아다니며 눈이라도 한 번 더 맞추어 보고 싶어 하는 그 아이들을 만나니 이제야 비로소 내가 바그다드의 마을 어딘가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가운데 ‘오씨’라는 아이. 대문을 나서며 처음 만났다던,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던 그 사내 녀석이다. 마을 한 바퀴를 돌도록 뒤에서만 졸졸 쫓아오던 녀석이 한 번 손을 잡으니 부끄러워하면서도 다른 아이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가지 않고 손을 잡고 같이 다녔다. 내가 그만 집에 가봐야 한다며 너도 집에 가라 하니 씨유 투모로우 하고 아주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내가 대문을 들어서 마루로 아주 들어설 때까지 대문 밖에서 가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좋은 느낌.


옆집 할머니네

어제 암만에서 한 번 더 짐을 쌀 준비를 할 때, 바그다드에서 안약을 사다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해서 그 말을 들을 때는 햇볕이 얼마나 뜨거워서 안약까지 필요할까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안약은 옆집 할머니에게 드리려고 산 거였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옆집 할머니네로 놀러갔다. 벌써 지영이와 상미가 가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둘만 사는 집. 대궐 같은 집에 두 분만 살았다. 자식들이 모두 외국에 나가 살거나 출가해서 무척 적적하게 사는 것 같았다. 우리가 놀러가니 무척 반가워했다.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금세 나왔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모두 이라크 식으로 뺨 양쪽을 번갈아 가며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팀 회의

오늘 현재 이 집에는 모두 아홉 사람이 있다. 먼저 와 있던 최혁, 김하운, 목지영, 이상래, 이동화 팀원과 오늘 나와 함께 온 한상진, 성혜란, 그리고 정토회에서 온 이상환 씨. 그 가운데 앞으로 전쟁 범죄 보고서 작성을 위해 독자로 움직일 한상진 씨와 팀원이 아닌 이상환 씨를 뺀 나머지 팀원들이 한 방에 모여 회의를 했다.
밤 아홉 시쯤 되었을까? 막 회의를 시작하려할 때 쯤 전기가 나갔다. 늘 그 시간쯤부터 밤 열 두 시 사이에 전기가 나간다 했다. 전기가 나가면 천장에 매달려서 도는 선풍기조차 꺼지니 앉아서도 땀이 줄줄 난다. 게다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작은 램프로 불을 밝힌다. 날마다 이렇게 일정한 시간에 전기가 나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 시간에도 잠깐 따로 이야기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미군이 하고 있는 일종의 통제 방식이 아닌가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번 전쟁을 91년 전쟁과 견주어 볼 때 전력을 비롯한 기간 시설의 피해 정도는 그 때와 거의 비슷한데, 그 때는 이라크 정부에 의해 6주가 지나 전기를 비롯한 필수 시설의 복구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달이 넘도록 그것이 되지 않고 있으니 무언가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이라크 사회를 재편해 가기 위해 무언가를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이기도 한다며 말이다. 많은 이라크 시민들은 그러한 의심을 놓지 않고 있으며, 특히 전기가 자주 나가는 문제에 대해 불만이 크다고 했다.
회의 시간 전반에는 전쟁이 지나간 뒤부터 우리 팀의 활동과 우리 팀의 활동 과정에서 보아온 이라크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보고였다. 우리가 해온 활동은 아주 구체적인 마을에서, 아주 구체적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탕이었기에 이번에 들은 이라크의 상황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이 사회의 기층 마을 단위, 사람들의 관계, 그 안에서 들여다보게 되는 중첩된 이 사회의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해오면서 차츰 다듬어지고 만들어온 우리 팀의 계획 전반에 대해 들었다.
회의 시간에 나온 그간의 상황, 앞으로의 계획과 관련해서는 따로 정리하려한다. 지금 시각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아침 아홉 시부터 일정이 시작될 텐데 더 무리를 하기에는 내일 부담이 너무 크다.

혁이 형의 고민

회의가 끝나고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최혁 팀장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 바깥에 있을 때 혁이 형이 우울증이라느니 가라앉았다느니 하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최혁 팀장은 그간 안으로 힘들어하던 문제들을 털어 놓았다. ‘내가 달라진 걸까, 아니면 이라크 사람들이 달라진 걸까’ 짧은 말로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중요하게는 이러한 고민이었다. 이것 또한 내게 다시 질문해보며 다음에 정리해야겠다. 그만 잔다. 십 분 전까지 캄캄하게 전기가 나갔는데 조금 전에 막 불이 들어왔다. 땀이 줄줄줄 흐른다. 덥다.

(2003.6.21 05:35 박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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