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6월 22일
[이라크통신]6월 22일
  • 박기범
  • 승인 2003.07.2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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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아침

팀의 오전 일정은 오늘도 알 마시뗄 헬스 쎈터 안에 짓고 있는 도서관 페인트 칠작업이다. 나는 사람들이 일어날 무렵에 잠이 들었고 사람들이 일을 나가려 준비할 때쯤 일어났다. 그래봐야 두 시간 남짓. 이게 무언가, 내일 아침은 이렇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홉 시쯤 팀원들이 일을 하러 떠나고, 아홉 시 삼십 분 쯤 최혁 팀장과 한상진 선생님, 그리고 나 셋이서 숙소를 나섰다. 한상진 선생님은 짐을 모두 싸 나왔다.
앞으로는 다른 숙소를 찾아 전쟁 범죄 관련 보고서를 쓰는 일이나 평화 캠프를 준비하는 일들을 할 것이다. 사실 한 선생님이 숙소마저 따로 찾아 나간 까닭은 일의 구실을 따로 한 까닭이라기보다는 팀 안에서 팀원들과의 불화, 그래서 아주 자격도 버리고 아주 팀에서 떠난 것이다. 어느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마음이 많이 착잡했다. 비록 이번 한 선생님의 일은 나와 직접 부딪힌 문제가 있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 나도 어떤 이와 그런 식으로 불화를 겪은 일이 있다. 누군가가 팀에서 떠나주기를 바란 일이 있다. 상황이나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식으로 어느 개인을 미워하고, 참지 못해 하던 일이 있다. 끝내 몇 사람이 떠났다. 모르겠다. 누구 다른 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내가 평화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아낄

나는 어제 팀 회의 시간에 한국에 통신을 보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 부탁했고, 그래서 오늘 오전 11시에 ‘국경 없는 통신’에서 마련해주는 인터넷 방에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 일정은 팀원 모두가 함께 먼 곳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 있으니 따로 뺄 수가 없었고, 오전에는 그 인터넷 방이 11시부터 문을 열기 때문이다.)
팀장과 나는 알 마시뗄 헬쓰 센터에 내렸다. 먼저 와 일을 하고 있는 팀원들 곁으로 갔다. 팀원들은 벌써 땀을 뻘뻘 흘리며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자고 있던 아침, 우리 숙소로 와 함께 지내게 된 수사님 한 분과 정토회의 이상환 씨의 모습도 보였다. 몇 사람은 붓과 밀대를 가지고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고, 몇 사람은 아직 칠하지 않은 방에 있는 물건을 바깥으로 옮겨내고 있었다. 나도 그 방으로 들어가 물건을 내는 일을 도왔다. 큰 짐부터 내고 난 뒤 자잘한 종이 쓰레기를 내다 놓으려 보니 봉지나 상자 같은 것이 필요했다. 어디에 가서 구할까 하면서 혹시 약을 나누어 주는 진료소 쪽으로 가면 버리는 약상자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리 나가 보았다.
아낄, 얼굴이 온통 화상으로 벗겨지거나 물러 있는 아이. 아마 곁에 있는 여인은 어머니인 듯했고, 아낄과 어머니는 그늘 쪽에서 약타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나는 그런 것을 살필 것도 없이 그저 아낄 쪽으로 다가섰고, 절로 아무 말이고 나왔다. 아아아아, 어떻게 해? 아파, 아프지? 괜찮아? 얼마나 아플까? 전쟁 때 그런 거야? 아이이이 어떻게 하나, 하비비…….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울긋불긋 덴 자국이 있고, 살갗이 벗겨졌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고, 얼굴을 바로 펴지 못했다. 그래도 아낄은 상처를 입은지 오래 되어 이제 아무는 중인지 편안한 눈빛이었고 살폿 웃기도 했다. 아파서 당장 못견디도록 아픈 때는 넘긴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아 아낄이라 알았고, 나이가 열 살이라 들었다. 곁에 선 어머니가 짧은 영어로 일러주기를 폭격이 있어 그렇게 되었다 한다.
아낄 앞에서 무얼 어쩔 줄은 모르고 그저 어떡하니, 어떡하니 하다가 팀원들이 일하는 곳으로 돌아와 혜란이를 찾았다. 혜란아, 혜란아 혹시 너 촬영할 것 가지고 왔으면 저 아이 한 번 만나 봐라. 혜란이와 상미가 그 아이를 만나러 갔다. 나는 팀원들이 일하는 자리에 남아 페인트칠을 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붓을 건네어 받아 붓질을 조금 하는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어제 오후에는 다시 결합하는 처지여서 뉴 바그다드의 다섯 개 마을을 다니느라 칠 작업을 함께 못했고, 오늘 아침은 다른 이들보다 늦게 나온 데다 조금 있으면 다시 통신을 하러 가야 하니 말이다. 그 일만을 놓고 볼 때에는 나만 자꾸 일도 않고 어쩌다 한 번 기웃대는 꼴일 것 같았다. 그러니 주어진 11시까지라도 일을 함께 하겠다 생각을 하여도 왠지 스스로 마음에 눈치가 생기는 거였다.


통신

열한 시가 조금 넘어 아부알리가 운전하는 아마르의 봉고차를 타고 국경 없는 통신에서 마련한 인터넷 방으로 갔다. 점심에는 살람이 우리 팀원 모두를 집으로 초대했기 때문에 열두 시에 만나 움직이기로 약속한 터라 열한 시 오십 분까지는 알 마시뗄로 돌아가야 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마음이 쫓겼다.
자동차에서 내려 목지영 누나를 따라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은 생각보다 무척 작았다. 나는 인터넷을 쓸 수 있는 방이 있다길래 예전에 바그다드에서 인터넷을 쓰던 팔레스타인 호텔 2층의 피씨방 정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그만 사무실에 노트북 여섯 대. 사무실에는 젊은 프랑스인 하나가 있었다.
‘국경 없는 통신’에 대해서는 그 전에 잘 알지 못했고, 지금도 거기가 어떤 곳인지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그저 모임의 이름이 귀에 익은 ‘국경 없는 의사회’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전쟁 지역이나 재해 지역, 통신이 끊어진 곳을 찾아다니며 봉사하는 단체이겠거니 짐작할 따름이다. 그리고 아마 그 모임은 주로 이끄는 이들이 프랑스인이거나 프랑스의 엔지오 단체인 모양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홈페이지를 부르는 데만도 아주 한참이 걸렸다. 아이디를 적고 비밀번호를 넣어 로그인을 하는데도 또 한참. 아참, 그곳에 있는 컴퓨터는 글자판이 모두 프랑스 것이어서 영문이나 기호가 배열된 순서가 아주 달랐다.
게다가 나는 비밀 번호를 영문 자판 위에 한글로 된 낱말을 써넣고 있었으니 내 비밀번호를 찾느라도 한참을 헤매었다. 익숙한 대로 쳐서는 그 비밀번호에 맞는 영문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내 편지함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받은 것을 읽어볼 틈도 없이 디스켓에 담아간 편지와 사진 압축 파일을 한국으로 보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사진을 여러 장 담아서 그런지, 혹시 실행 입력을 잘못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송이 느렸다. 큰일이다. 동화가 부탁한 이메일도 대신 넣어주기로 했고, 혜란이도 부탁한 것이 하나 있는데. 옆에 앉은 지영 누나 메일 검색이 조금 일찍 끝나 보여 그것들은 지영 누나에게 대신 해 달라 부탁했다. 열한 시 오십 분까지 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나? 마음만 달렸다. 혹시 한국에서 그림책 슬라이드 아랍어 번역본이 왔는지도 확인해야 하는데, 그게 왔으면 파일을 담아가야 하는데.
우습기도 하지, 피씨방에 앉아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그것도 다 욕심이겠지.
비우지 못해 그런 걸 거다. 팀원들이 기다린다고, 그만 일어나서 가자고 하는 지영 누나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러면 나는 마저 보내놓고 가겠다고, 오후에 알 후리아 지역에 가는 일정에는 빠지겠다고. 에이, 참. 창피하다. 상황이 이런 것을,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을.
파일을 보내놓은 뒤 ‘받은 편지’는 읽는 둥 마는 둥, 물론 바끼통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서둘러 나왔다. 그랬어도 열두 시 십 분. 알 마시뗄로 돌아가니 열두 시 반이 다 되었다. 이래저래 속이 상했다. 안 그래도 다들 페인트칠을 하는 동안 통신을 하고 온다는 것부터가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시간마저 늦고 보니 더 미안한 마음이었다. 반면 한국으로 제대로 소식을 보내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또 그것이 마음에 많이 걸렸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믿고 성금을 모아준 많은 이들에게는 이곳 소식을 띄우고 알리는 게 최소한의 예의일 텐데.
오늘 ‘국경 없는 통신’의 사무실에 다녀오고 나니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더욱 걱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인터넷을 쓰는 데에는 한 번에 같은 엔지오 사람 둘 이상은 쓰지 못하고, 한 사람이 삼십 분 이상 작업을 할 수 없다는 둥 까다로운 규칙이 있기도 했다. 지금이야 바그다드에 들어온 많은 외국인이나 엔지오 단체가 거의 돌아가서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눈치 없이 컴퓨터를 오래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래라고 해 봤자 용량이 큰 파일이 든 편지 두어 번이면 훌쩍 한 시간)


살람 아저씨네 집

살람 아저씨는 앞서 보낸 편지에서도 몇 차례 나왔듯이 우리 팀의 이라크 활동을 함께 하는 현지인 파트너이다. 사실 나는 이번에 들어와서야 처음 만난 데다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일도 없어 아직 잘 알지는 못했다. 내가 가진 느낌이라면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졌고, 우리를 잘 이해하며 도와주려는 사람 같다는 정도였다.
우리 팀은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뉴 바그다드 지역의 다섯 개 마을(알 까마리아, 알 마시뗄, 알 라하세, 알 슈하다, 알 우바이티)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살람이 자기의 누이가 살고 있는 알 후리아의 시골 마을을 소개하면서 거기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오백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다니는 시골의 작은 학교, 그곳 또한 뉴 바그다드의 가난한 마을 못지않게 무척 열악한 환경이라며 말이다. 그래서 우리 팀에서는 우리의 여력이 가능한 대로 그 마을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해보자고 준비해 오고 있었다. 이를 테면 그 마을에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 그리고 모든 아이에게 하나 씩 돌아갈 수 있는 학용품 세트(책가방 하나에 공책과 연필, 지우개, 자 따위를 담아 꾸린 것)을 하기로 말이다.
한 시간 가량 자동차를 타고 가 살람의 집에 다다랐다. 식구들은 아주 우리를 반겼다. 한 눈에 보아도 손님이 온다 하여 준비를 많이 해 놓은 거 같았다. 방 하나에는 물을 뿌려 열을 식히고 물기를 닦아내었는지 바닥이 아주 시원했다.
선풍기에 에어컨을 틀어도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 우리 숙소를 걸 생각하면 찬 바닥에 앉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건 살람의 집이 무어 특별히 지어 놓은 큰 부잣집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만큼 우리를 맞으려고 마음을 써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사는 형편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숙소가 너무 호화로울 정도로 살람의 집은 작은 서민의 집이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 앉고 아이들 몇이 들어왔는데 다른 팀원들은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알았다. 내가 바그다드로 들어오기 며칠 전에도 한 번 다녀간 모양이었다.
여느 아이들이나 다 그랬지만 살람네 집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무척 예뻤다.
살람이 사는 집에는 모두 세 가정이 함께 산다고 했다. 서로 친척인 것 같은데 또렷이 어떤 관계인지는 듣지 못했다.


무스타파의 책가방

우리가 도착한 뒤에도 부엌에서는 그 집에 사는 여인들이 음식 준비를 계속했다.
무얼 만드는지 한참을 더 기다려야했다. 우리를 맞는 모습, 음식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는 살람에게만 초대받은 게 아니라 그 집에 사는 모든 식구들에게 초대를 받은 거였다. 음식 준비를 하는데 그 집 여인들 뿐 아니라 아이들도 아주 부지런을 떨며 어른들을 도왔다. 아이들도 무척 신이 나 무어라도 일을 돕고 싶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얼음을 띄운 물주전자를 들고 나르고, 부엌에서 마루로 이리 저리 왔다갔다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이들의 방이 궁금해졌다. 아니, 특별히 방이 궁금했다기 보다 이곳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책상은 어떻게 해 놓았을지, 벽에는 어떤 걸 걸어놓거나 붙였을지 하는 그런 궁금함이었다. 물론 방은 어떻게 꾸며놓았는지 하는 것도 보고 싶었다.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내 녀석 무스타파의 손을 잡고 나가 살람에게 아이들의 방을 보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물었다. 살람은 물론이라며 이층으로 올라가자고 손을 잡았다. 계단을 올라 이층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살람의 아내인 듯한 여인이 웃으면서 들어오지 말라는 얼굴이다. 아마 방을 어지럽게 해 놓아 부끄러우니 보여줄 수 없다는 말인 것 같았다. 살람 또한 웃으며 괜찮다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이들만 쓰는 방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컸다.
“여기가 아이들 방이에요?”
“아니, 여기가 우리 식구들이 함께 쓰는 방이에요.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다 이 방에서 살아요.”
그 때까지 나는 그 집에 세 가정이 함께 산다는 것도, 살람네 식구는 2층의 그 방에서 모여 산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1층이 따로 있고 2층이 있으니 살람네는 그래도 꽤 살만한 집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방에서 네 식구가 모여 산다니 조금 놀랐다. 여태 내가 다니며 본 이라크 사람들의 집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방이 몇 개는 되고 부엌과 거실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람은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 그래. 내가 살람에게 정을 가까이 느낀 건 바로 그 때부터였나 보다. 여기가 우리 식구들의 방이라고, 이 방에서 모두 함께 산다고 웃으면서 얘기해주던 그 때. 물론 아이들의 책상이나 책꽂이 따위도 없었다. 그래도 방안을 이리 저리 살펴보다 무스타파의 책가방을 있는 선반을 보았다. 봐도 되냐고, 보고 싶다했다.
책가방은 아주 낡았다. 무스타파가 가방에서 책을 하나 하나 꺼내는데 아랍말로 읽을 수는 없어도 대충 무얼 배우는 교과서인지는 알 것 같았다. 수학을 배우는 책이 있었고, 과학 책이 있었고, 아랍어 교본, 숙제장 따위들이 있었다.
무스타파도 공부 시간에 낙서같은 그림을 많이 했고, 이 나라 선생님들도 숙제를 검사하면서 ‘참 잘했어요’ 같은 말을 써 넣어주곤 했다. 어느 교과서에서 본 그림이더라, 이라크에도 우리와 거의 비슷한 연을 날리고 노는가 보았다. 연의 모양이나 연을 날리는 모습이 아주 닮았다. 반가웠다.
무스타파의 책가방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다른 팀원 몇과 무스타파의 여동생인 도하도 2층에 올라와 있었다. 지영 누나가 막 좋아하는 소리를 질러 그 쪽을 보니 도하가 지영 누나에게 팔찌 같은 것을 선물했다. 살람의 말로는 그것을 선물하려고 이틀 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이다. 하운이에게도 팔찌를 선물했다.
팀원들이 모두 기뻐했다. 도하는 선물을 주면서도 아주 수줍어했다. 무스타파와 도하를 보면서도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 나오는 알리와 자라가 떠올랐다. 이 아이들도 숙제를 할 때면 그렇게 꼭 붙어 앉아 방바닥에 공책을 펴고 숙제를 할까?


맛있는 점심, 과일

드디어 준비한 음식이 나왔다. 커다란 접시(우리나라에서는 쟁반 가운데에서도 아주 큰 쟁반이라 할만한) 하나에는 이 나라 식 볶음밥 같은 것이 가득 담겨 있고, 다른 접시 하나에는 닭을 튀겨 요리한 음식이 한 가득 있었다. 그리고 토마토와 오이를 썰어놓은 접시.
그 밥은 내가 전쟁 중 알파나 호텔에 있을 때 거의 날마다 먹던 그 밥이었다. 그 때 알파나 호텔에서 그 밥이 가장 싸기도 했지만, 양고기나 닭고기로만 된 음식은 도무지 먹기가 힘들어 거의 날마다 그것만 먹고 지내었다.
밥이 참 맛있었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무스타파가 그 보다 더 큰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수박, 포도, 자두, 사과가 얼음덩어리와 함께 놓여 있는 접시였다. 그간 과일을 먹지 못하고 지내어 그랬을까,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게 놓인 과일을 보면서 아주 좋아했다. 물론 아주 맛있고 시원했다.
정말 훌륭한 점심 초대였다. 보통 잘해주고 싶지 않으면 그처럼 차리고 준비하지 못할 것 같다. 살람과 그 집에 같이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참 고마웠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사람들은 쉬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그 집에 사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안아주기도 하고 놀 때 나는 한 쪽 마루에 누워 잠이 들었다. 목구멍이 쓸리는 것 같은 이 감기 몸살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아이들하고 같이 재미있게 놀았을 텐데. 주머니에 넣고 간 제기와 요요, 그리고 가면들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맥이 하나도 없었다.)

박기범의 이라크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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