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6월 29일
[이라크통신]6월 29일
  • 박기범
  • 승인 2003.08.05 1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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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에서] 6월 29일


0. 잘들 지내셨지요? 기범이에요. 하하하.


1. 오늘도 아침에 병원에 다녀왔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직도 아파. 다른 팀원들은 오늘도 페인트 칠을 하러 나가는데, 몸을 일으키는 게 힘들어. 에이 젠장.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마음에 걸렸어요. 그것 말고도 부엌에 나가 밥차리는 일, 먹은 것 치우는 일 그런 것 하나 하나가 다 일인데 에이 몰라 하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어.


2. 어떻게 하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마음만 조급해지고 불안하다.
몸이 아파서 생활도 제대로 못하지, 바그다드에 들어와 하고자 했던 일은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지, 앞으로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들지 않지. 제대로 정리해서 보내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곳에서 팀의 계획은 다음 주까지 알마시뗄에 있는 헬스센터 내에 도서관/놀이방을 완공짓는 일이고, 거기에서 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 거야. 그런데 그 도서관/놀이방이라는 게 내가 생각했듯 마을 가운데에 있는 어느 곳이 아니라 큰길가에 있는 거거든. 골목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그러는 게 아니야. 아 모르겠어. 팀에서는 사실 도서관/놀이방을 완공하는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가 되고 그 뒷일, 실제 아이들을 만나는 일에 대해서는 다 내가 알아서 하려니 하고 있거든.


3. ‘투어’. 답사라고 할까? 하여튼 팀에서는 7월 15일 경부터 이라크 전역 답사를 계획하고 있어. 그건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세워진 계획이야. 남부의 도시, 마을 몇 곳과 북부 몇 곳을 둘러보는 거거든. 2월부터 해온 반전평화팀의 활동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라크 전역을 둘러보면서 이라크 전체의 모습과 전쟁의 참상을 살핀다는 의미를 두고 있어. 물론 그 일도 꼭 필요한 일이고, 그것 또한 이 전쟁과 이라크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창이 될 거야. 그런데 나는 그 답사를 같이 가지 않으려고 해. 도서관 완공이라야 다음 주 토요일, 그러니까 7월 4일 쯤이 될 텐데 그러면 날마다 아이들을 만나는 건 고작해야 열흘뿐. 나는 그냥 이곳에 남아 계속 아이들과 지낼래. 그리고 그렇게 팀이 답사를 떠나게 되면 다른 일정에 매일 것 없을 테니 편안하게 이곳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려고 해. 바그다드에 들어온지 열흘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정말, 정말로 이 도시에 다시 오고 싶었지만 내가 그린 것은 이게 아니었거든. 응, 물론 그건 내가 뭘 잘 몰라서였겠지만 말야.


4. 내 생각은 그래. 알 마시뗄에 짓는 도서관은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만 하는 거야. 날마다 만나서 노래도 같이 부르고, 그림책 슬라이드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노는 거야. 아이들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어때, 그냥 노는 거지 뭐. 꼭 내가 준비한 걸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해. 애들이 하고 싶어하는 게 있으면 그걸 하면 되는 거지. 그냥 그렇게, 아이들하고 지낼 거야. 그리고 오후에는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 갈 거야. 로라 수녀님을 다시 만나야지. 그리고 거기에 가서 노라, 낸씨, 꾸아꾸아, 오마르, 알리를 다시 만나려고 해. 그냥 그 애들을 다시 만나면 좋을 것 같아. 내가 그 애들을 위해 해주는 거? 그런 건 없지 뭐. 그간 바끼통을 비롯 어도연이나 겨레를 통해 모은 기금이야 팀 활동을 통해 가장 쓸모 있는 곳에 쓰고 있는 거니까. 지금으로서는 어차피 현지인을 통해 전달하는 것 밖에는 없어, 단지 우리의 몫은 그걸 누구를 통해, 어디에 쓰이도록 제대로 전달하는가가 문제일 거야. 그것도 우리가 직접 전달하는 게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나 헬쓰 센터를 통해서 말이야. 물론 돈이 쓰이는 곳에서 내 몸이 함께 쓰이면 좋겠지만 이곳의 사정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네. 굳이 그걸 하자면 지난 며칠을 그랬듯이 이곳 저곳을 따라다니면서 잠깐의 방문을 하고, 잠깐의 인터뷰를 하면서 그이들과 사진을 찍는 일 정도가 되겠지. 그런 건 이제 더 하고 싶지 않아.


5. 어찌했건 몸이나 어서 나았으면 좋겠다. 몸이 나아야지 마음도 의욕을 내어 뭘 해도 할 텐데. 지금은 그리 되지가 않는 것 같아. 자꾸만, 길게 쓸모없는 생각이나 하곤 해.
한국에서 좀 더 쉬었어야 했나봐. 내가 비실비실 많이 아파봐서 아는데 이건 딱 중학교 2학년 때 그것하고 닮았어. 이게 될까 모르겠는데 담배를 좀 줄여야지.


6. 아참. 그거 그림책 원고 번역하는 거, 비비마마 님이 도와주시는 게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으면 할 수 없이 번역사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아. 여기 현지에서 직접 하기에는 어렵거든.


7. 더워, 더워. 더워 죽겠다. 언제 아스팔트에 나가 달걀을 깨 놓고 후라이가 되는지 그것 좀 시험해 봐야겠는데, 해해.


8. 이라크 사람들이 전쟁 뒤 변했다고? 돈 중심으로 바뀌면서 사람들 사이가 각박하고 삭막해졌다고? 물론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이 사람들이 바뀌어서가 아니야. 지금 아무 미래도, 희망도 없는데 어떻게든 돈을 쫒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다들 아이들이 있고 식구가 있는데. 믿을 건 그것밖에 없을 텐데. 한국이라면 더했겠지. 다투고, 빼앗고, 사기치고, 어떻게든 이익이 있을 만한 것을 쫓아다니고. 어쩌면 이 사람들이 지금 보이는 모습대로 영영 굳어질지 몰라. 이 모습으로 천성이, 문화가, 질서가 바뀌어갈지 몰라. 그럴 위험이 너무 크겠지. 미국의 이라크 재편 전략, 그것은 단지 한 나라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 이들 내부의 가치를 바꾸어 놓으려는 거겠지. 그래서 그게 안타깝고 걱정스럽지만 아직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 이를 거야. 아니, 아직은 이 사람들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 아직 갈림길에 서 있는 거겠지.


9.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나는 내가 왜 이 나라에 와 있는지를 까먹고 있지는 않나 몰라. 나는 지금, 왜 이곳에 와 있는 거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10. 내가 약한 소리만 늘어 놨지? 으응, 이것보고 딱하다고만 생각 마. 기운 차리려고, 쓰잘데기 없는 생각 떨쳐내려고 뱉어 내는 거니까. 왜 알잖아? 나는 이렇게 한 번씩 궁상을 떨고 풀어내야 가볍게 다시 일어선다는 거. 그래서 그러고 있나 봐. 씻어 내려고. 고마워요, 안녕.

박기범의 이라크통신(6월 29일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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