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7월 17일 가출 엿새째
[이라크통신]7월 17일 가출 엿새째
  • 박기범
  • 승인 2003.08.19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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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가출 엿새째


가출 엿새 째. 여기에 와서 가출이라는 걸 했어. 뛰쳐나오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 팀에서 안 좋은 일이 있다거나 무슨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야. 그냥, 그대로는 숨이 막힐 것 같았어.... 팀 일정하고 상관없이, 걸어보고 싶었다. 그 길. 전쟁 전, 그리고 폭격이 쏟아지던 그 때 내가 머물던 곳. 걸어보고 싶었어. 그렇게 집에 쪽지 한 장 남기고 나온지 지금 엿새. 팀원들, 특히 팀장 속이 새까매졌을 거야. 저녁 귀가 시간만 좀 늦어도 얼굴을 불그락푸르락 하는데 이렇게 사라져서 연락도 없으니. 아마 더 걱정인 건 내 영어가 중학교 1학년 수준도 안 된다는 거지. 사실 나도 그것 때문에 곤혹인 걸. 지금처럼 완벽하게 혼자인 적은 처음이거든. 누가 내게 말을 건넬 때, 음식을 사 먹어야 할 때, 차를 타야할 때마다 아주 진땀을 흘려. 그래도 어물어물 잘해왔으니까 걱정은 마. 여기 바그다드 사정이 어떻다는 거야 다른 팀원들 일지나 소식을 보면 대충 알잖아? 아직 만만치 않거든. 실은 나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 다니고 있어.

가출 사흘째던가, 타흐리 광장(거 왜 전쟁 전에 걸개도 그리고, 페이스 페인팅도 하고 그러던 데 있잖아)에 공산당 집회가 있다고 해서 갔다가 취재차 나온 수연 누나와 인화, 혜란이을 만났어. 하하, 반갑더라. 아, 그러고 보니 엿새 동안 그 때를 빼면 나는 거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낸 셈이야. 아주 꼭 필요한 말만, 땡큐나 하우 머치 그 정도를 빼면 말이야. 그런데 사실 심심한 건 별로 느끼지 못했어. 말을 하지 않고 지냈구나 하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로.
그 때 인화와 혜란이에게 한국에는 나 가출한 거 이르지 말라고 부탁했거든. 괜히 걱정이나 할 텐데 뭐. 기억하기에 아마 투어 팀은 모레부터 떠날 거라 했거든. 내일 쯤은 집에 들어가려고. 투어 팀 떠나기 전에 걱정이나 덜어주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 나는 별 일 없이 가출을 잘 마치는 셈이지.

돌아다녔어, 그냥. 택시를 타고 다니는 거, 돈도 돈이지만 말하고 설명하는 게 어려워 그냥 걸어 다녔어. 그래도 내가 길눈은 있는가 봐. 아무렇게나 걸어가도 내가 온 자리로 다시 돌아올 수는 있으니 말이야. 밥 먹는 게 좀 어려웠지. 배가 살 고프다 싶어도 웬만하면 그냥 굶고 말았어. 말도 잘 안 되는데 아무 거나 시켰다가는 먹지도 못하는 양고기가 나오거든. 대충 빵 같은 걸로 버티다가 그나마 입맛에 맞는 걸 찾았지. 무슨 볶음밥 같은 거. 것도 기름이 너무 많아서 튜브 고추장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발라 먹어.

다니다가 우연히 모하메드 아저씨를 만났어. 혹시 기억할까? 폭격이 쏟아지던 그 때 알파나 호텔에서 함께 머물며 아이피티 사람들을 태워주던 택시 기사 아저씨. 거 왜 나중에는 아저씨하고 친해져서 둘이 술도 마시고 그랬다고 했잖아. 술이 얼큰해지면서 서로 노래 한 곡씩 하자고 하고는 나는 ‘고향의 봄’을, 아저씨는 무슨 이라크 가요 같은 걸 불렀다고. 그리고 나중에 한 얘기이지만 그 날 호텔 안에서 술 먹은 게 들켜서 호텔에서 쫓겨날 뻔 했다고 말이야. 그 아저씨를 만났어.

그리고 오늘 만난 사람이 있는데 그이도 전쟁 중에 택시를 몰던 이야. 함멧이라고. 되도 않는 영어로 그이에게 떠오르는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는데, 제이드 소식을 들려주었어. 아, 제이드! 전쟁 중 아이피티 활동을 하는 외국인을 관리하던 그 제이드 말이야. 그 때만 해도 제이드는 이라크에서 꽤 높은 정부의 관료였지. 제이드의 말 한 마디면 추방을 당할 수도 있고, 비자가 연장될 수도 있었으니까. 바그다드로 미군이 진입하기 몇 시간 전, 어떻게 그 소식을 알았는지 제이드는 어디론가 떠났어. 모르긴 몰라도 참 좋은 사람이었거든. 당시 그이의 위치에서는 아이피티 사람들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간섭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어. 아이피티가 모여 회의를 할 때에도 괜히 들어와서 내용을 듣거나 하지 않았지. 자기가 전달할 얘기가 있으면 꼭 필요한 만큼만 하고 나가면서. 아주 반듯한 사람, 신사였어. 보고 싶다, 제이드.

- 혹시 제이드 소식은 알아요? / 하무라비 호텔, 제이드는 하무라비 호텔에 있어. 거하기는 저널리스트만 머무는 아주 고급 호텔이야. / 뭐라고요, 호텔에서 일한다고요? 하무라비, 거기가 어딘데요? / 저 쪽이야. 바빌론 호텔하고 나란히 있어. 아주 최고급 호텔이지.

다행이야. 걱정을 많이 했거든. 후세인 정권 아래에서 고급 관료였으니 잡히기라도 하면 얼마나 시달림을 받을까. 그런데 그런 같은 건 없었나 보다. 집으로 돌아가면 언제 하루 승로나 하운이에게 통역을 부탁해 하무라비 호텔을 찾아가봐야겠어. 듣고 싶은 게 많아. 그 때 제이드는 어디로 사라진 거였는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떻게 지내었는지. 폭격이 쏟아지던 그 때 제이드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리고 제이드라면 지금 이라크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겠지, 제대로 보고 있을 거야. 지금의 이라크 사정은 과연 어떤 건지, 그리고 제이드 스스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아까는 길을 다니다가 인터넷 까페가 보여서 들어갔어. 바끼통에 들어갔지. 에그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동안 뭘 좀 써두었다가 보내는 건데. 오랜만에 보니까 재미있더라. 인터넷 보고 있으면 여기도 그리 멀지 않은 곳 같아.

♡ 길영 - 승연이하고 같이 지낸다고 했지요? 둘이 맛있는 거 많이 해 먹어요. 아니면 사 먹고. 나 아닌 누군가하고 있을 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게 맛있는 거 같이 먹는 거 같아. 나도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정말로 뭐가 생각나면 침이 꿀꺽 꿀꺽 넘어가곤 했어요. 돼지고기 숭숭 들어간 김치찌개, 뼈 해장국, 선지 해장국......

♡ 프랭스 - 정말 바쁘겠네. 세 시간씩 복사하랴, 까페에 마음 쓰랴, 그리고 식 준비하는 것도 이제 얼마 멀지 않았네. 집 계약했다더니 그리 들어가 살고 있는지. 내가 요즘 형 말대로 그 ‘감정의 낭비’를 좀 하고 있었거든. 크크, 얼마나 못마땅할까. 그래도 우린 서로 ‘지지하는’ 사이잖아. 같은 삐형에다가. 푸하하.

♡ 사과꽃 - 게시판에 있는 쪽글 몇 개 따라 보면서도 밝고 행복한 기운이 느껴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운 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 거겠어? 새로 들어간 직장, 바쁘다지만 책 만드는 일이 재미있다니 참 좋다. 축하, 축하.

♡ 날자 - 웹 소식지인가 그거, 그거 보면서 여태 모르고 있던 날자의 모습을 본다, 야. 하긴 아직도 나는 자꾸만 너희 동기들을 코 찔찔 흘리며 신입생으로 들어오던 그 때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냥, 아까 웹 거시기 하는 거 그거 보고 나도 정신이 좀 들었네. 여기에도 소나기라는 게 있었으면…

♡ 오늘 날씨, 갬 - 내가 실은 삼계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언젠가 한 번 된통으로 체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도 그것만 먹으면 자꾸 체하는 거라. 그래서 어쩌다 먹게 되어도 겁이 나거든. 삼계탕 말고 닭죽이나 그런 거면 더 좋겠네. 현승이 아빠는 어디 갔나, 왜 엄한 손가락을 찔러대고 있는 거지?

♡ 공기족, 난지도 - 웃어라, 안녕!

아이, 배고파. 자꾸 먹을 거 얘기네. 그 동안 따로 쓴 글이나 그런 건 뭐 없어요. 처음 한 동안은 이곳 소식이나 상황, 내 상태 같은 걸 최대한 보내야 한다고 스스로 강박처럼 지니고 있었는데, 그걸 벗어 버리니 별로 쓸 것도 할 얘기도 없는 거야. 굳이 내가 써 보내지 않아도 인화나 혜란이가 보내곤 하는데 뭐. 지금은 자꾸 무얼 밖으로 얘기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얘기가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견디지를 못하겠는 걸.

아참, 지난 전체 회의 때 남은 일정을 이야기하다가 나는 여기에 좀 더 남아 있겠다고 얘기했어요. 적어도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을 이렇게 버려 놓고는 못 가겠어서.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옳은지. 아무튼 우리 팀 일정은 29일로 모두 마치기로 했어요. 그리고, 요 며칠 땡땡이치며 돌아다닌 것도 다 때워야지. ^^ 지금쯤 놀이방에서는 동화하고 승로 둘이서 애쓰고 있을 텐데. 무어 또 그때 가봐야 알겠죠, 뭐. 내가 워낙 계획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음에 바람이 부는 대로 지 멋대로잖아.

그리고, 프랭스. 오늘 메일에 실탄이나 탄피 거두는 거에 대한 조언은 따로 없네? 어디 물어볼 데가 따로 없는 건가? 이야, 프랭스가 이렇게 대답 없을 때도 다 있다니. 나는 형에게 메일 보낸 날, 팀에 들어가서 내일이면 대답이 올 거라고 큰소리를 쳐놨는데 말야.
오늘 받은 메일에 그림책 원고 번역에 대한 건 있잖아, 내가 다시 메일을 쓸게. (2003.7.17)


* 집에 들어왔어요. 7월 18일. 유엔에 들러 메일을 보내려 했는데 문이 닫아서 못했어요.
우리 집 전화 번호 적어드릴게요. 여기에서 국제전화 거는 건 안 되고, 한국에서 걸 수는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거는 건 위성전화로만 가능했지요.) 오늘 집에 와 보니 전화 번호 알려 놓은 게 있어요. 한국에서 저녁 시간이나 새벽 시간에 걸어야 아마 집에서 받을 수 있을 거야.

001-964-1-7722172

<박기범의 이라크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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