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노래하라!
인생을 노래하라!
  • 김경미
  • 승인 2003.04.25 12:47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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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노래하라!

언젠가 KBS에서 인턴작가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연말에 연기대상을 준비하는데, 연기대상이란 프로자체는 분명히 '쇼프로'의 요소가 강하지만 드라마국의 잔치이다 보니 드라마국 피디들이 준비를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한 감독의 요청으로 연기대상의한 꼭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우연찮게 한 쪽 눈을 잃은 스턴트맨에 관한 5-10분짜리 다큐를 맡게 되었죠. 사실 전 드라마 작가로서의 공부는 해봤어도, 다큐멘터리를 써 본적이 없던 터라 좀 황당했습니다.
이건 다큐 작가를 시키지 왜 날 시킬까?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나기도 했지요. 원래 다큐 프로를 잘 보던 저로서는 재미있는 체험이 되겠다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일단 그 스턴트맨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하고, 간단한 취재를 한 후,대충의 구성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감독과 스텝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그 스턴트맨의 동선을 따라 촬영장으로 집으로 따라다니며 촬영을 했지요.
그런데 막상 그의 인생의 밝은 부분과 희망을 찾아내려고 하다보니 거짓말이 되는겁니다. 그래서 감독과 의논해서, 그의 아픈 부분들을 드러내보자, 그가 한 쪽의 가짜 눈을 빼서 씻어 다시 넣고 하는 장면도 솔직하게 보여주고...또 촬영장에서도 예전같은 스턴트는 할 수 없는 현실 등등..그 스턴트맨도 저의 제안에 응해주었고, 우리는 다시 촬영을 했지요. 그리고연기대상 시상식날이 되었습니다.

항상 그래왔듯이 연기대상은 자축 파티같은 거 아닙니까?
모두가 웃고 즐기는 가운데 갑자기 슬픈 스턴트맨의 이야기가 다큐로 나가자 조금은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지요. 거기다드라마 촬영 중에 사고가 났고, 그 후방송국 측으로 받은 보상금은 너무 약소해 생활도
하기어려운 현실까지 보여지면서 그가 이 현실을 받아 들이고 이 앙다물고 살아가는 모습이 비춰지며 끝나자 객석에 있던 연기자와 방송관계자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더군요.
마침 그것을 객석에서 보고 있었던 그 스턴트맨은 눈시울을 붉히다 동료들의 성화에 못이겨일어나 인사를 했구요...어쩌면 방송국의 높으신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 것 자체가 못 마땅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티비로 보니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고 계시더군요.
그 스턴트맨은 직업으로서 스턴트를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었지만 그 좋아하던 촬영현장에서 다쳐 이제는 엑스트라 외에는 할 것이 없는 현실이 되었는데...방송국에서는 몇 푼의 보상금으로 슬쩍 마무리 지었던 거지요.
전 그 스턴트맨을 보면서 어쩌면 나도 저렇게 쓸모있을 땐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방송의 소모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끔 일본 영화를 보면 (예를 들어 철도원같은) 한 인간이 자신의 직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미화되어 나오는데요, 전 그런 것을 보면 마치 '개인이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때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한번은 제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니시리즈 <열애>란 드라마를 쓰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먼 친척 분에게 전화가 와서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뭐하냐는 겁니다. 나는 물론 "전화 잘못하셨는데요" 했지요.
하지만 그 분은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얼른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고, 전 손을 떨며 집으로 전화하니 안 받더군요. 그래서 다른 친척의 집으로 했더니 사실이라는 겁니다. 전 정신이 아뜩했습니다. 당장 방송국으로 전화해서 감독에게 아버님이 위독하시니 부산에 내려가야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감독은 당장 돌아가실 거 아니면 방송국 와서 대본 마지막회까지 줄거리 만들고 의논한 다음에 가라는 겁니다. 전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방송국에 앉아서 새벽까지 뒷이야기의 줄거리를 만들어 놓고 방송국을 달려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엔 비행기도 기차도 버스도 없는 시간이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택시를 타고 부산까지 가자고 했고, 결국 오전에 병원에 도착했지요.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친척들이 모두 와 있고, 다들측은한 눈으로 날 보며 어서 병실로 가보라는 겁니다. 가슴이 내려앉더군요.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겨우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와 동생이 눈물을 흘리고 있고,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놓으셨더군요.
저는 울면서 왜 이렇게 늦게 알려줬냐고 화를 내니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이었다며, "경미 일하는데 방해되니까 알리지마라"하시고는 내가 알까봐 매일같이 내가 집에 전화하기 전에 먼저 나에게전화를 해서 안부를 물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신지 8일만에 돌아가시면서 제게 그런 유언을 남기셨다더군요.
"좋은 작가 되어라..."
저는 아마 평생 동안 그 말씀때문에 좋은 작가인지를 돌아보며 살게 되겠지요.
하지만 가끔은 '별 대단치도 않은 글' 쓴다고 아버지가 아프신지도 모르고,결국 아버지의 병 간호도 한번 못 해드리고 돌아가시게 한 저를 ....용서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드라마작가란 직업을 사랑하기는 더욱 어려웠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예전의 그 스턴크맨이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 집 근처라면서 좀 나오라고 하더군요. 전 왜 그러나 하고 뛰어나갔더니 사과 한 상자를 턱 하니 내려 놓고는 꾸벅 인사를 하는 겁니다.
전 당황스러웠지만 그 분의 마음을 알았기에 이 선물까지 뇌물이라고 안 받을 수는 없겠다 싶어, 얼른 기다려 보라고 하고는 근처에 있는 빵집으로 가서 케익 커다란 것 2 개를 사서 드렸죠.(그 분 가족은 형님가족이랑 같이 살아서 어린아이들이 5명이나되었거든요)
그 분도 내가 억지로 드리니 안 받을 수가 없었는지 받으시고는 서로 이심전심의 웃음을 웃었지요.
그리고는 그때그런 글을 써 줘서 고마웠다고 말하고는 얼른 차를 몰고 도망가듯 가시더군요.
그 분의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론 내 글이 그 분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었구나 기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래도 그 분에게 달라질 것이 없는 현실이기에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작가란 것이...
이렇게 내 인생의 희노애락이 녹아있는 내 삶의 한부분이기에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내 인생, 혹은 다른 이들의 인생을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담담하게 그려내는 노래꾼으로 사는 것이기에...
이제흠도 많고 고통과 불행도 많은 인생이겠지만 그 속에 사랑과 희망을 찾아내도록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겠구나.... 하고는 그 무거운사과상자를 낑낑거리고 집에 들고와 아껴 아껴 먹었지요.

그래서 가끔은 작가로서 사는 것이 힘들 때, 그때의 그 사과 맛을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힘들고 괴로워도, 모진 어려움 끝에 느끼는 사과맛같은 행복이 있기에 우리는 인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 당시 스턴트맨은 광명에 살고 있었는데... 지금도 여기 사신다면, 그리고 혹시 제 글을 보신다면 연락 주세요. 우리끼리 술이나 한 잔 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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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者 2003-04-25 12:47:42
가슴이 찡하게 울립니다. 시선이 달라야 작가가 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아니면 가장 평범하던지... 그 분과 상황을 생각하며 잘 봤습니다. 근데 한잔 하자는게 이 글의 목적인가요?

김경미 2003-04-25 12:47:42
ㅋㅋ...술도 안드시면서....

이재길 2003-04-25 12:47:42
사과를 혼자서 오래 먹는 방법은??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 .

토박이 2003-04-25 12:47:42
앗, 김작가를 사랑한다는 폭풍은 누구일까? 김작가 미혼이라던데...

송재신 2003-04-25 12:47:42
김경미님 고정팬이 많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