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불빛] 프롤로그
[작업실 불빛] 프롤로그
  • 권용화 <볕드는 창>
  • 승인 2023.06.0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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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하필 또 도배공사다. 이번엔 집이 아니라 작은 나의 작업실 도배공사다. 재계약은 11월이고 이제 여름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앞날이 불투명한 작업실 벽에 나는 겨울맞이 방한지를 붙이고 있다. 겨울엔 이곳이 화가 날 정도로 춥기 때문이다. 성질이 급하면 손해를 많이 본다는데, 끝부터 시작하는 나의 버릇은 그저 천성이라 영 고쳐지지 않는다.

<권용화의 미술 사이렌>을 이곳 광명시민신문에 실은 때가 2021년 10월 15일이다. 아이 생일이었다. 하지만 ‘미술 사이렌’ 초고를 쓴 건 2013년이다. 층간누수로 80세, 90세 넘은 노할머니 노할아버지와 다투고 아파트 관리소장을 9번이나 만나고 시청에 민원까지 낸 뒤였다. 생활비 한 푼이 아까운데 우체국에 가서 내용증명 서류에 도장을 찍어 요금을 내고 바로 위층으로 그 우표 달린 서류가 배달되는 모습을 봐야했다. 그리고 더 큰 일도 있었다. 사람마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2013년 그 즈음 나는 시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저버렸다. 내상이 깊었다. 관계를 조절한다는 것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먹는 건 잘 먹어요?”

“과일만 조금… 먹고 있어요. 그것 말고는 들어가는 게 없어요.”

그러고서 10년. 많은 일이 있었고 모든 게 변했다. 2021년에, 2013년에 쓴 글을 들고 혹시 게재해 줄 수 있는지 신문사를 찾아갔다. 글에는 유통기한이 있는데 더 이상 통조림처럼 처박아 놓을 수 없어서였다. 글은 신문사 데스크의 벽을 요행히 넘었고 나는 결국 헨리 다거, 세라핀 루이 등에 관한 글을 손질하여 온라인에 게재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데스크에 감사 인사를 전한다.

요즘 내 마음은 춥다.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해도 되는 일, ‘여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되는 일은 나보다 우리 집의 전 주인, 그 여인네가 잘했다. 이사를 하고 나간 자리에는 명품 가방이며 향수 등을 쇼핑한 흔적-쇼백과 상자가 즐비했다. 상자는 좋은 냄새도 나고 튼튼해서 두어 개를 보관함으로 썼는데 어떤 행사에 들고 갔다가 한 언니에게 가더니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아마도 그 행사의 누군가가 욕심을 부렸던 모양이고, 나는 미련을 두었던 게다.

'돈' 있어 보임은 이렇듯 중요하고 사람들은 절박하다. ‘그런데다가 돈을 왜 써?’라며 울그락 푸르락 하다가도 자기한테 지갑을 열겠다고 하면 다들 좋아한다. 돈. 쇼핑. 우리네 행복은 돈 버는 과정, 특히 그 과정에서 만나는 과정이나 관계의 질이 아니라 돈으로 지르는 물건이 얼마나 비싼가, 그래서 내가 얼마나 있어 보이는 가와 얽혀 있다.

때문에 내가 작업실을 갖는 일은 여러 가지 의구심을 많이 샀다. 다들 묻는다. "월세가 장난 아닐 텐데" 라고. 대체 얼마냐, 말해봐라, 돈은 어디서 나느냐고 궁금해 한다.

모두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다. 인정한다. 하지만 밥상머리에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피해줬으면 싶은, 내게 유익하지는 못한 질문이다. 차라리 나, 권혁미는 시간 당 얼마냐고 물어봤으면 좋겠다. 실은, 괜찮아? 어려운 건 없어? 필요한 건 없니? 불안하지는 않아? 어머니 병원도 다니시는데 검사며 기다림은 족히 3시간인데 정작 진료는 5분이라니 어이없고 속상하지? 힘든 시기야, 힘들다 못해 괴로움도 찾아올 거야, 그래도 힘 내…,이런 말이 듣고 싶다.

돈. 남의 건물에 세 든 신세. 때문에 언제 접을지 모르는 작업장, 그러나 월동준비를 해버리는 나는, 다른 만남에 드는 비용이나, 친구나 언니들끼리의 여행 경비나, 곗돈이나, 길거리 커피 값이나, 아이의 사교육비를 지난 10~15년간 절약해 왔다. 이제 늙으셔서 아무 것도 모르시는 친정 엄마께 드리는 용돈을 10만원 삥땅친 적도 있다. 술자리도, 밥자리도, 찻자리도, 거의 없었다. 참으로 조용하고, 참으로 고즈넉하며, 오지랖 없는 삶이었다.

나는 삶을 삶답게 사는데 나를 오롯이 바치고 싶다, 삶은 쇼윈도우의 물건을 내 것으로 만들고, 차로 운반해 집에서 헤쳐 요리를 하고, 포장지를 북북 뜯어 옷장에 걸고, 거실 장에 진열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미술사이렌>을 쓰면서 ‘검은 거울 속으로의 여행’을 갔다 왔다. 그리고 묘하게도 방한지를 붙이고 벽지를 바르는 일을 꼭 10년 만에 하면서, 지금 내가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있음을 직감한다. 나의 작업실은 여행을 시작하는 공간이자, 또한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맞아줄 공간으로 낙점됐다. 남편은 대찬성을 해 주지는 않았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내가 하지 말란다고 당신이 안할 리 없잖아. 뭐, 지금 이 나이가 되면 다들 모여 술 먹기도 몸이 안 따라주고 그래서 하나 둘씩 뭔가를 하긴 해. 또, 그래야 안 늙어.”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나 사람은 너무나 많다. 조금 독립한 아이는 버스를 혼자 타는 건 짜릿해하지만 자기 방 청소는 건너 뛰어 버린다. 친정아빠는 벌써 10여 년째 묵묵부답이시고, 친정엄마는 항암 치료의 기로에 있다. 조직 검사 결과를 토대로 앞으로의 치료 계획 혹은 포기 계획을 세우는 날은 5월의 많은 휴일 때문에 자꾸만 미뤄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에 없이 옷맵시를 말쑥하게 하고 장신구를 골라 나 자신을 완전 무장시킨다. 오래된 벗들은 괜찮다고 그러라고, 하라고 충고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마 병원을 쫓아다니다가 그 뭐라 할 수 없는 감정과 책임감 때문에 무너질 것 같다.

작업실에 들어와 손을 뒤로 하여 문을 쿵 닫으면, 정적 속에 나는 행복하다. 15년 동안 거의 해낸 작품이 없다. 따라서 겨우 당도한 이곳에서는 ‘나’한테 초점을 두기 때문에 편안해진다. 이곳이 얼마나 유지될지 걱정이지만, 유지하는 동안 걱정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나의 작업실은 ‘작업실 불빛’이라 이름 붙였다. 여행의 시작이다. ‘시작이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은 여행이기도 하다. 조용히, 정적으로 괴괴한 작업실 건물의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이제 나의 작업실에 불빛을 당긴다. ⓒ容和 권혁美

 

카미유 클로델 <불모지의 꿈> 1899~1905
채색 대리석과 청동
22 x 30.5 x 25cm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은 매우 단단한 대리석, 마노 등의 재료를 섬세하게 조각하는 재능이 있었다.
위 작품은 불빛을 넣도록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두 종류가 있다.

권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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