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불빛] 끝을 정하고 나니 두렵지 않다
[작업실 불빛] 끝을 정하고 나니 두렵지 않다
  • 권용화 <볕드는 창>
  • 승인 2023.07.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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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월마을, 설월리….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도 ‘설월아파트’는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박차고나온노미새미나’에 견주는 긴 외국 이름의 아파트가 생길 것이다. 내 고향 설월리가 사라지는데 대한 한恨의 정서가, 나로 하여금 글로 나아가게 한다.

6살에서 7살 무렵. 설월리 고향집 문간방에는 홀어머니와 4남매가 살고 있었다. ‘영구 오빠네’

초등학교를 입학해서야, 할머니가 누워계셨던 침대가 학교에서 쓰는 과학실 책상인 것을 알게 됐다. 여하튼, 아랫목에 과학실 책상을 꽉 차게 놓고, 그 위에 요를 깔고, 할머니는 누워서 꼼짝 못하는 와병 중에 계셨다.

그 과학실 책상 밑에서 큰 오빠, 막내 영구 오빠, 작은 언니, 가장 윗목은 큰언니 순으로 잠을 잤다. 긴 각목이 대각선으로 지나가는 과학실 책상 밑에서 다 큰 장정이 잠을 자야 했음을,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애잔하다.

아침이 되면 영구 오빠는 검은 교복에 빡빡머리를 하고 학교에 가고, 다른 언니 오빠들은 일터로 갔지 싶다. 온종일 할머니는 과학실 책상 위에 누워 계셨다.

“집 잘 보고 있어”

‘특명’을 받은 나. 아랫방 식구 막내. 나는 마당 한쪽에 묶인 주인집 쇠돌이와 그 집을 지켰다. 목단꽃이며 활련화며 접시꽃이 주인집 마당에 흐드러지게 폈다. 그러던 어느 날, 햇볕이 따갑고 무더웠던 어느 날, 가느다란 음성으로 ‘아무개야, 아무개야’ 소리가 났다. 문간방 할머니였다.

“저기…, 나 부채질 좀 해다오.”

실낱같은 목소리. 과학실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부채질을 해드렸다. 이렇게 더운데 내가 무디고 굼떠 늦게 찾아간 것이 죄송스러웠다. 한참을 부채질 해드려 팔이 아파왔지만 별로 싫지 않았다. 나는 말을 할 줄 모르고 할머니도 별로 할 말이 없으셨던지 우리 둘 사이에는 멀뚱멀뚱한 정적만 흘렀다.

할머니는 오랜 와병 중인데도 짜증 한 마디 없으셨으며, 그 집 언니 오빠들 또한 아무 불화가 없었다. 나는 종종 문간방에 놀러가 과학실 책상 밑에 낑겨 ‘산골짝에 다람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면 큰 오빠가 그걸 녹음을 해서 틀고는 같이 들어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할머니도 내 노래를 들으셨겠지.

어느 날 그 복닥복닥한 집에 누렁 강아지가 하나 들어왔다. 예쁜 강아지는 얼마 안 있어 잠시 한 나절동안 내게로 왔다.

“혁미야, 강아지 좀 봐 줄래?”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나는 강아지가 생긴 게 기뻤고 그 녀석이 오줌 싼 것을 치우며 좋아할 무렵, 큰 언니가 흰 한복을 입고 대문 밖 뜰에 서서 친척 어른이 가르쳐 주는 대로 동서남북 합장하여 눈물을 흘리며 반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어렴풋이 알았다. 할머니가 세상을 뜨셨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그 문간방 식구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눈동자 색깔이 검고 눈썹 또한 짙었던, 밤하늘 식구 같았던 그들은.

<작업실 불빛>의 끝은 그 문간방과 같다. 끝을 정하고 나니까 두렵지 않다.

부엌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어 지금은 따로 살지만, 엄마가 힘이 없어지면 엄마를 햇빛 창가에 눕히고, 나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엄마 옆에 있는 것. 내가 내다볼 수 있는 가장 멀리의 <작업실 불빛> 모습이다.

얼마 전 보름날.

10년 만에 만난 도예가가 여전히 작품이 좋았다. 그가 물었다.

“<작업실 불빛> 명함에 주소가 없네요?”

“네. 제 건물이 아니어서 언젠가는 떠날 것을요. 제가 아는 <작업실 불빛>의 마지막 모습은 이러이러해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많이 성장해 있었다. 삶과 정정당당하게 승부했으며 10년 전 그 마음속에 읽히던 분노가 이제는 없었고, 광명의 재개발로 타 지역에 터를 잡았다.

내 <작업실 불빛>의 마지막을, 그와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잠시나마 좋은 만남이었다. 그러므로 검은 별밤의 4남매 앞에 고운 길만 있었기를, 슬픔이나 한을 털어버리고 각자 짝을 만나 다복하고 화목했기를, 도예가를 만나고 돌아온 밤 보름달이 아름다웠듯 그들의 앞길이 은은하고 아름답고 불빛이 엉기어 있었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해본다.ⓒ容和 권혁美


권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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