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의 궤.도.이,탈.] 달팽이길을 걷고 싶다
[별똥별의 궤.도.이,탈.] 달팽이길을 걷고 싶다
  • 별똥 이영신 <볕드는 창>
  • 승인 2023.09.04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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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놀며 일하고 있는 작은 학교 뒷마당. 그곳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비탈진 텃밭이 있고, 그 텃밭 위로는 5분이면 오를 수 있는 동산이 있다. 너무 작은 야산이라 이름도 없는 그 동산에서, 나는 지난 20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뛰고 구르며 놀았다. 그렇게 조그만 산이지만 남쪽 경사면으로는 활엽수가 자라고 북쪽 경사면으로는 침엽수가 자라는, 있을 건 다 있는 산이다.

봄이면 진달래꽃 따다가 화전 부쳐 먹고, 아까시꽃 주렁주렁 열릴 때면 아까시튀김 먹은 아이들 입에서는 달콤하고 고소한 내음이 만발한다. 여름이면 무성한 초록 숲으로 더위를 식혀 주고, 추석 무렵이면 툭툭 떨어지는 알밤들 주워 모아 종일토록 군밤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겨울 빈 산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낙엽들 끌어다가, 빈 가지들 줏어다가 끼리끼리 비밀 공간을 꾸며 놓고 온갖 놀이들이 그 곳에서 벌어진다.

뒷동산에 무시무시한 호랑이나 멧돼지는 없지만, 아이들의 놀이감을 끊임없이 만들어 주고 욕심꾸러기들에게는 벌을 내리기도 하는 도깨비가 살고 있다는 걸 아이들은 믿는다. 놀다 보면 싸우고 다투고 하는 일 허다하지만 혹여 도깨비의 노여움을 살까 아이들은 산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뿐만 아니라 또래들끼리의 놀이 예절도 알아가고 있다. 나도 그 작은 산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 곁에서 20년을 훌쩍 자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다. 아이들 말썽이 지나쳐서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때, 함께 지내는 어른들끼리 의견이 맞지 않아 번뇌에 휩싸일 때, 혹은 이유 없이 쓸쓸해질 때 나는 뒷산에 오르곤 했다. 5분이면 오를 수 있는 그 작은 산을 30분에 오른다. 내려올 때도 20분은 걸린다. 5분짜리 산이 50분짜리 산이 된 것이다. 직진으로 오르면 5분이지만 밑에서부터 산을 두 바퀴를 휘돌며 오르고 또 두 바퀴를 휘돌며 내려오니 50분짜리가 되는 것이다.

이름 없는 구름산자연학교 뒷동산

이름난 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우스운 산이지만 그 산길은 ‘달팽이길’이라는 이름도 있다. 작은 학교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 이름도 없는 그 작은 산을 굳이 에둘러 오르내리며 20년을 살다 보니, 익숙해질수록 시간을 단축시켜 효율성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 때때로 나는 어쩌면 뒤로 후퇴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기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사회를 쫓아가며 살고 있을 때 나만 가만히 있는 듯해서 조급해지기도 했다. 아이들과 지낸 지난 20년 세월이 없었다면, 또 뒷동산 달팽이길에 서 보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도 마음이 바쁠 뻔 했다. 5분짜리 직진으로 오를 수 있는 산을 둘레둘레 돌고 돌아 오르며, 나는 철들지 않은 아이처럼,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법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해 태풍이 지나가고 많은 비가 내리면서 달팽이길이 막혔다. 누군가의 발걸음이 켜켜히 쌓인 덕에 달팽이길이 생겼다. 때문에 그곳에서 아이들과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발걸음도 닿지 못하게, 달팽이길은 끊어졌다.

한여름 중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 뒷동산에는 함부로 뻗은 나뭇가지들에, 키만큼 마구 자란 풀들에, 온갖 벌레들 특히 한 번 물리면 1주일은 긁어대야 하는 산모기가 극성일 것이다. 하지만 가을이 저만치 오고 있고, 옆집 늙은 몽실이는 더이상 짖지 않고, 고속도로 공사로 아랫마을은 뚝 잘리어 아이들과 함께 걷는 나들이길이 변변치 않은 오늘…

문득, 그 달팽이길을 걷고 싶다.


별똥
별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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