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불빛] 책도둑
[작업실 불빛] 책도둑
  • 권용화 <볕드는 창>
  • 승인 2023.11.0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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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놓아두려 책을 훔쳤다.

이야기는 고2의 어느 가을에서 시작된다. 

나는 다니던 입시미술학원 수채화 선생님께 뱀 인형을 선물했다.(그 선생님은 뱀띠였다) 그 다음주 나는 답례품으로 한 책을 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에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스폰지처럼 그 책을 흡수했고 애착을 갖게 됐다.

어이없게 대학 3학년 때 엉뚱한 장소에서 그 책을 잃어버렸다. 부랴부랴 달려간 서점에는 재판본이 초판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판본은 새로 디자인 되어, 검은 표지에 작가의 얼굴도 찍혀있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나는 베레모를 눌러쓴 저자의 노란 표지가 아니면 가질 수가 없었다. 노란 표지의 초판본에 이미 익숙해 있었으니까.

결국 학교 도서관에 있는 초판본 책을 훔치기로 결정했다.

도둑질은 간단했다. 일단 책을 빌리고, 책을 잃어버렸다 공을 치고, 재판본으로 변상하면 되는 일이었다. 책 분실은 종종 있는 일이어서, 도서관 사서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무 큰소리 없이 재판본을 접수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25년이 지났다. 여전히 노란표지의 그 책을 펼치면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브레히트가 1950년대 이런 생각을 했다."

선배들은 언제 어느 때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책에서 위안을 얻었을까? 1985년 출간. 1990년대 초반부터 기록이 시작된 책의 대출카드. 책에는 선배들의 낙서와 밑줄과 동그라미가 가득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1944

히틀러라는 거대한 적.
아버지. 시댁이라는 거대한 적.
못난, 지배자의 밑에서 고통 받았던 그 니.

며칠 전, 암으로 6개월 생존선고를 받은 나의 친정어머니가 선고를 받은 지 단 3주만에 소천하셨다. 우리 남매는 급격한 악화를 피하고 천천히 가는 내리막길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그니는 3년여 간의 별거생활로 만족한 듯, 서둘러 길을 바삐 가는 쪽을 택했다.

왜 그렇게 살았냐고 화를 내고 싶지만, 그 니 덕에 내가 이렇게 목숨을 누리고 자라고 나이들 수 있었다.

“체구가 작은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중 <나의 어머니> 1920 에서


권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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