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이여, 최면에서 깨어나라
열린우리당이여, 최면에서 깨어나라
  • 정욱식대표
  • 승인 2004.06.29 1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린우리당이여, 최면에서 깨어나라


평화개혁 세력을 자임하며 지난 4·15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이 중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반전평화'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와 여당 및 한미관계라는 현실적 고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6대 국회 때 파병 반대를 비롯한 '반전평화'를 주창했던 의원들과 386 및 전대협 출신 초선 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추가파병 재검토 결의안'에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비난 여론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들이 파병 반대 입장을 철회했거나 결의안 서명을 주저하고 있는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그래도 '생각 있는' 의원들이 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추가파병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할 수 있거나, 최소한 파병을 통해 상황 악화는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뒤집어서 추가파병을 철회하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는 노무현 정부는 물론이고 열린우리당 의원 대다수가 내세우고 있는 핵심적인 '파병 현실론'이다.

둘째, 주한미군 감축 등 한미동맹 재조정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추가파병을 철회하면 한국의 협상력이 크게 저하될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현실에서 추가파병의 철회는 한국의 경제적 불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추가파병 철회→한미관계 불안→투자자들의 불안 심리 고조→경제 불안'이라는 연결고리를 갖는 추론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 경제, 안보에 있어서 결코 미국을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에서 미국에게 약속한 추가파병을 철회하면, 아무래도 한미관계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관적 현실주의'에 허덕이는 자신들을 보라

그러나 파병과 관련해 상당수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모습을 보면, 비관적 현실주의에 빠져 정작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미동맹에 눈이 멀어 국가와 국민을 총체적인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들은 그토록 현실을 강조하면서도 한미관계를 지극히 감상적인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다. "한국이 파병을 철회하면 부시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혹은 어려울 때 부시를 도와주면 우리를 잘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파병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국익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주의에 기반을 둔 국익을 '감상주의' 차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먼저 '파병 현실론'의 최대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북핵 문제는 파병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한국의 추가파병이 국제사회에서 궁지에 몰리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정치적 체면을 살려줌으로써 '재선 지원군'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부시의 재선이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인지는 열린우리당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합리적이고 단호한 해법을 기초로 미국을 설득하고 압박하는 것에 있지, '파병'이라는 편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년 9월 윤영관 당시 외무장관이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한국의 파병과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연계시키는 발언을 했다가 면박을 당한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최근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미묘한 변화 조짐이 보이는 이유 역시, 한국의 추가파병 결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서 발목이 잡히고 북한과의 협상을 촉구하는 미국 안팎의 압력이 높아진 것에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특히 믿었던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고는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권유하고, 대체로 '중립적 위치'에 있었던 중국과 러시아가 최근 미국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면서 성실한 협상을 촉구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추가파병'이라는 꼼수에 의존해 미국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분명 되새겨야 할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경제문제를 따져보자. 추가파병을 철회하면 한미관계가 불안해지고 이에 따라 덩달아 외국 투자자도 동요하고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처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한미관계와 한국 경제에 정통한 한 미국 전문가는 지난 5월 초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준 바 있다. 그는 국무부 등 미국 정부에서 20년 넘게 경제문제를 다뤄온 베테랑이며 한국이 파병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파병 철회와 경제 문제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의 심리적 영향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면 경제도 나빠질 수 있다. 그러나 외국 투자자들과 신용평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파병 여부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이다."

또 한 가지. 미국이 갑작스럽게 주한미군 일부 병력을 이라크로 차출하고 주한미군 병력수 3분의 1을 감축한다고 했을 때,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미국의 대표적인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A3) 전망을 `부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상향조정하지 않았는가?


추가파병, '강행과 철회' 이분법에서 벗어나라

물론 미국에게 거듭 약속한 추가파병을 철회할 경우 한미관계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특히 노무현 정부로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를 재확인해주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파병 방침을 철회하면 안 그래도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는 한미관계는 더욱 불안해질 것이다.

기실 한국 정부의 추가파병 철회시 가장 큰 문제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깊어질 것이라는 점에 있다. 정부의 외교안보팀의 '어설픈 대미외교'로 인해 부시 행정부가 노무현 정부에 대해 일정 정도의 불신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밝힐 수 없는 속사정"도 바로 여기에 있고, 노무현 정부가 추가파병 결정을 철회하는 것을 기대하기도 힘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회, 특히 다수당이자 '평화개혁' 세력을 자임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에서 주입시킨 '비관적 현실주의'에서 깨어나고, '파병 강행이냐, 철회냐'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열린우리당은 추가파병을 철회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 함몰된 나머지, 추가파병을 강행할 경우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추가파병의 결정과 실행은 '문제의 끝'이 아니다.

이번 김선일씨의 안타까운 참사가 보여주듯, 그것은 '더 큰 문제'의 시작일 뿐이다. '집단적 최면'에 걸려 자기의 존재 이유마저 망각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은 바로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딜레마에서 열린우리당 등 국회에서 발휘할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추가파병의 '강행'도 '철회'도 아닌 '재검토'를 선택하는 것이다. 강행과 철회 모두 문제점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재검토는 문제점을 최소화하면서 대(對) 이라크 정책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추가파병을 재검토해야 할 이유들은 넘쳐흐른다. 더구나 이번 김선일씨 참사는 정부와 국회가 추가파병을 강행할 최소한의 준비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미국도 새롭게 구성된 국회가 추가파병을 재검토하겠다고 결의하면, 속은 언짢겠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검토를 선택한 주체가 정부가 아니라 국회이고, 파병을 '철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16대 국회에서 결정했을 때와 상황과 조건이 많이 달라진 현실에서 기존의 정책을 재검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들이 기꺼이 '반전' 대열에 나서고,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고, 파병한 병력을 철수시키는 선택을 했다. 이들 국가들이 이러한 선택을 했다고 해서 미국으로부터 '국익'의 큰 손실을 입을 만큼 해코지를 당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열린우리당에게 바라는 것은 이 정도까지도 아니다. 허울로 드러난 '반전'을 선택하라는 것도, 이라크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서희·제마부대를 철수시키라는 것도, 추가파병 결정을 철회하라는 것도 아닌, '추가파병 재검토'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속삭인다. 테러에 굴복하는 것보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 낫다고…. 그러나 열린우리당을 굴복시킨 것은 미국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말뿐인 평화개혁 정신'이자 노무현 정부가 파놓은 '비관적 현실주의'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무지몽매'이다. 집단적 최면에 걸려 '솔로몬의 지혜'를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더 늦기 전에, 열린우리당이 최면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기회는 있다. 50여명의 서명을 받은 추가파병 재검토 결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있지 않은가?

정욱식/ 2004년 6월26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