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호> 스승과 화두 그리고 복음 관상
9호> 스승과 화두 그리고 복음 관상
  • 김경수
  • 승인 2004.12.0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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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이 화두라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뿐만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체험을 직접 전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서 직접 전수한다는 뜻은 최초의 체험자들에게 생명을 주었던 예수의 사건들을 독자도 기록을 통해 최초의 체험자들과 같은 생명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복음은 예수에 대한 체험을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복음을 통해 어떻게 제자들이 한 생명 체험을 후대의 독자들도 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과 화두의 유사점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간화선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라면 먼저 전승되는 화두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 이를 체험한 스승과 그 스승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스승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통해 화두참구와 복음 관상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승

  선에서는 스승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이 말은 진리를 체험한 사람은 말을 하든 하지 않든, 행동을 하든 침묵하든, 존재 자체로써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바르면 그가 하는 말도 바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보지 않고 글만 가지고 따지면서 진리를 찾는 서양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간화선에서 스승의 진면목은 제자를 깨닫게 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다. 우선 스승의 화두의 실체를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다.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제자를 인도하고 제자의 체험을 인준한다. 스승은 말로써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로써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두 참구에서 제자는 자기 앞에 태산과 같이 우뚝 솟은 스승의 진면목을 접한 감동으로 자기 힘으로는 감히 뛰어넘으려는 엄두도 못내는 자기 한계를 훌쩍 뛰어넘게 된다. 제자는 화두 참구를 매개로 스승과의 인격적인 통교를 함으로써 스승의 진면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승의 진면목은 제자의 실존 안에 스며들어 맥동 치며 제자의 망상을 다스리고 방향을 제시하여 마침내는 스승의 경지에 일치하도록 한다. 이처럼 스승은 제자에게 화두를 내리는 사람이요 제자의 체험을 인가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스승없는 화두 참구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복음 관상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스승 아래서 입문하지 않는다. 누구로부터 관상을 인가받지도 않는다. 물론 영신 수련과 같은 특별한 수행에서는 관상을 위해 복음 장면을 지정해 주고 복음 관상이 제대로 진행되었는지를 인가하는 지도자가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지도자가 스승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반드시 스승의 지도하에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스승은 그 사람 수준에 알맞은 수행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체험을 인가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승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스승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스승은 선에서처럼 구체적인 한 인물로 실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승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원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사는 사람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체로서 스승을 늘 모시고 살고 있는 것이다. 매사에 늘 스승과 함께 할 때 그리스도인은 스승을 모시는 것이 된다. 이 점에서 복음 참구의 길이 선의 화두 참구의 길과는 다른 독창성을 지닌다. 자기 존재 속에 숨어 계신 스승을 찾아내어 인격적인 통교를 트는 것이 복음 참구의 비결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점은 선에서는 화두 속에 등장하는 스승과 제자의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이 동일인이 아닌 데 반해 그리스도는 제자의 수행을 이끄는 스승이자 동시에 복음 속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가령 선의 ‘무’자 화두에서의 스승은 조주지만 이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는 다른 스승 아래서 지도를 받는다. 반면에 수행자가 복음의 한 장면을 관상하게 될 때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에 등장하는 스승이자 동시에 수행자의 수행을 이끄는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스승은 복음 속에서는 드러나 활동하시지만 제자의 수행에서는 숨어서 활동하신다. 여기에 화두 참구와는 다른 특색이 있다. 즉 복음 관상은 복음만 갖고는 안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일상에서 수행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에서는 화두 참구할 때 오로지 화두만을 붙들고 몰입하게 되지만 복음 관상에서는 어떤 복음 장면을 관상할지, 어떻게 복음을 관상할지는 일상에서 자신이 모시고 있는 스승이 수행자의 수행을 어디로 이끄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복음 관상은 이를 관상하려는 수행자의 일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일상을 접어 두고 화두에만 몰두하는 선의 화두 참구와는 다른 점이다.
  또 다른 점은 선에서의 인가는 스승이 내리는 데 반해 복음 관상에서의 인가는 일상속에서 스승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통교가 트일 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인격적 통교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일상이 복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자는 복음 속에서 복음의 증인들이 증언한 생명을 체험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체험이다. 이차적이라고 해서 간접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증인들이 그들의 일상의 허다한 사건들 중 삶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을 ‘바로 여기’라고 표시해 둔 것이나 같다. 따라서 남이 지적하는 사건을 통해 실체를 체험한다는 의미에서 이차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는 누구나가 복음의 증인들처럼 일차적인 체험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아무도 삶에서 ‘바로 여기’에 실체가 있다고 지적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차적인 체험이 올바르다는 인정은 일차적인 체험을 통해 받는 것이다. 복음 관상에서 삶의 실체를 체험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일상 속에서도 그 지혜가 그대로 생활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혜가 생활화하는 그곳에 스승과의 인격적인 통교가 있고, 스승이 계신 곳에 삶의 실체가 드러난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믿음

  선에서 스승의 진면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면 제자는 스승에 대해 완전히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선에서는 예로부터 사자계합(師資契合)이 매우 중요시되어 왔습니다. 내가 참선할 때 지도를 받은 사승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르곤 했습니다. 즉 이분이야말로 진짜라고 여겨지는 선사를 만나면 자기 생명을 바쳐도 좋을 만큼 홀딱 반해서 끝까지 그 선사를 따르는 것, 이것이 선 수행의 중요한 관건입니다.”
  선에서 스승에 대한 신뢰가 깊으면 깊을수록 스승의 진면목을 받아들이는 내적 공간은 더 넓어지는 것이다. 의심 없이 스승을 받아들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스승의 진면목이 제자의 마음속에서 생동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스승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나타날까? 이것은 스승인 그리스도께서 늘 자기와 함께 하시면서 수행을 이끈다는 신뢰로 나타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화두 참구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를 내 밖에 계시는 분이나 하늘에 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나와 분리시키는 한 화두 참구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분의 현존이 체험으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는 매사에 있어서 스승의 현존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하고  그 현존 안에서 수행을 해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믿음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이끌어 준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은 인격적 통교라고 한다. 이 체험이 있기까지 제자는 스승과 숨바꼭질하는 것과 같다. 아직 그리스도의 현존에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감으로 현존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때는 스승의 현존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다가 어느 때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듯한 의심이 일어난다. 이처럼 스승은 제자의 일상에 숨어 있고 제자는 숨어 있는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이다.
  숨어 계신 스승을 찾는 지혜를 복음 관상을 통해 터득한다. 따라서 복음은 일상 속에 숨어 계신 스승을 알아보는 눈이 되어 주는 것이다. 이 숨바꼭질은 인격적 통교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인격적 통교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찾는 행위는 중단된다. 인격적 통교는 봉사가 눈을 뜨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자신의 실존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너무나 명백해 더 이상 의심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이 때에 가서는 그분을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분을 부름으로써 언제든지 그분의 현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현존이 자신의 삶의 근원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 통교가 이루어지기까지 제자는 스승의 흔적을 더듬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수행이다. 비록 인격적 통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스승의 흔적은 알아볼 수 있다. 스승의 흔적은 남다른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현존이 주는 느낌이 바로 흔적이다. 이 느낌은 닿는 모든 것을 순진 무구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곳에는 세상에 있는 근심 걱정이 없다. 그리고 체험하는 사람의 마음을 동심으로 돌려놓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 그분이 현존하는 그곳이 바로 하늘 나라이기 때문이다.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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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신수련과 선” (김경수 저, 카톨릭 출판사 간행)에서 화두 참구와 복음관상에서의 스승에 대한 부분을 타이핑 한 것입니다. 도움이 되시길....... / 송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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