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호> 절을 하며
9호> 절을 하며
  • 이기록
  • 승인 2004.12.0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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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살기 ‘정’자를 뺀 “진모임”은 행복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그 때의 행복감을 무어라 표현 못합니다. 설령 제가 그것을 아주 멋진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단지 박제된 것입니다.
  그 때 당시로 제 마음을 가두어 두지 않기 위해 절했던 것만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절을 받을 때는 ‘얼나’가 되고 절을 할 때는 ‘제나’가 되었습니다. 얼나는 항상 행복하고 맑고, 드넓은 본모습이요, 제나는 쉽게 변하고, 약하고, 실수 많은 몸나이기에 제나가 얼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지요.
  작년 노트를 보니 그 당시에 저는 몸나가 얼나에게 절하면서 이런 마음으로 했더군요.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열어 놓습니다. 곱게 머리 숙여 절을 합니다. 나는 절하면서 나를 봅니다. 손 놓고 왼 발 오른발 접고, 고개를 푹 숙이고 깊은 감사로 당신께 머리 숙입니다. 나의 호흡, 나의 열기, 내 정성으로 당신께 나를 열어 놓습니다.’
  저는 이렇게 절을 한 반면에 절을 받는 얼나가 되어서는 매우 피곤했나 봅니다. 그 당시의 노트를 보니 ‘얼나는 피곤해’라는 낙서가 있더군요. 재미있어서 소개해 봅니다.
  <얼나는 졸면 안 된다. 얼나는 기침을 참아야 한다. 얼나는 다정한 눈빛으로 몸나를 대해야 한다. 얼나는 웃어야 한다. 얼나는 절하는 몸나를 보며 가벼운 웃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 혹 웃기는 몸나들이 많다해도 얼나는 절하는 몸나의 이마에 뽀뽀를 해서는 안 된다. 얼나는 절하는 몸나의 허리를 잡고 빳데루를 해서도 안 된다. 얼나는 방구를 뀌어서도 안 된다. 얼나는 목이 짧은 몸나의 목을 잡아 당겨서도 안 된다. 얼나는 지긋한 사랑의 눈길로 은근한 웃음으로 절하는 몸나의 모든 것을 다 보아야 한다.>
  작년에 저는 뻣뻣하게 앉아서 이를 악물고 우악스러운 표정 그대로 절을 받았었나 봅니다. 그런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습고 피곤했던지 이 낙서는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올 해 저는 맨 나중에 절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절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눈물샘인가 봅니다. 그 분 앞에서 절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감격과 기쁨, 행복이 우러나오는 눈물이었지만요.
  얼나가 된 저는 웃음 보따리였습니다. 한 분, 한 분 절하는 모습이 어찌나 그토록 사랑스럽던지요. 사실 절하는 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저보다 나이가 많았었는데도 사랑스럽고 기뻤습니다.
  올해는 서명석 목사님의 목을 빼주고 싶지도 않았고 김순구님의 허리를 잡고 빳데루를 할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얼나가 되어 한없는 사랑과 웃음을 한사람, 한사람에게 전했습니다. 손을 대지 않아도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졌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했지만 그들에게 저의 모든 사랑을 주었습니다. 얼나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절을 받은 후 저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감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를 낮추고 그분들을 높일 수 있을까 하다가 땅바닥에 배를 바짝 대고 엎드린 후 손을 뻗어 따뜻한 손으로 저를 잡아 주기를 원했습니다. 손을 뻗치면서 얼나가 손을 놓기 전에는 미동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모든 얼나들에게 존경을 드렸고 그 분들은 다정한 마음으로 제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심지어 제 손을 잡고 놓지 않아 제가 속의 다짐도 어기고 손을 빼기도 했습니다. 예수살기 진모임은 매 순간 행복했었고 절하기는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웠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을까하여 조금만 덧붙입니다.
  저는 절을 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나 기도할 때에 잡념이 많습니다. 잡념이 생기면 일단 거부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자꾸 잡념에 놀아납니다. 이럴 때는 염자를 떠올리라 배웠습니다. 염자를 풀이하면 지금 여기에 마음이 있다이니까 염자를 자꾸 떠 올리면 잡념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이것을 해보았습니다. 효과가 대단하더군요. 절을 할 때 잡념이 생기면 사랑합니다를 살짝 중얼거리면 잡념을 이길 수 있더군요.
  또 하나 로렌스 형제는 ‘성령의 바람이 그 속에 있는 자는 잠자는 동안에도 진보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것을 구하기만 하면 잠자는 동안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저의 잠재의식을 좋게 가꾸어 주신다는 뜻이랍니다.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내의 큰 볼에 입을 맞춘답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저에게 특유의 웃음을 보입니다. 그리고나서 밖으로 나와 우리집 식구가 된 강아지 예나에게 크게 웃어주고 예나를 안고 하늘과 산들과 나무들에게 환한 웃음을 전하면서 속으로 오늘은 아주 멋진 날이군 합니다. 이렇게 하는 아침의 5분이 제 삶에 활력을 심어 줍니다.
  예수살기 이름을 버리기로 한 뒤 제게 숙제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독립된 승가를 새울 것인가가 그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제겐 스스로 삶을 멋지게 꾸려 나갈 자생 능력이 생겼습니다. 제게 가장 친한 벗인 아내가 있고 친한 동지들이 있으니 게으르지만 않으면 가능하다고 느껴집니다. 몇 년전 마음이 매우 힘들었던 시절에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제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를 가르치시고 게으르지 말며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너를 가르쳐 네 갈 길을 배우게 하고 너를 눈여겨보며 너를 이끌어 주리라. 부디 철없는 말이나 노쇠처럼 되지 말아라. 재갈이나 굴레라야 그들을 휘어잡는다.(시 32:8-9)
  올바른 사람에게 불행이 겹쳐도 야훼께서는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해주시고 뼈 한 마디도 부러지지 않도록 고이고이 지켜주신다. (시 34:19-20)
  야훼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니 그 발걸음이 안정되고 주님 뜻에 맞는다. 야훼께서 그의 손을 붙잡아 주시니 넘어져도 거꾸러지지는 아니하리라.(시 37:23-24)
 
  저는 이 약속을 믿기에 저에게 희망을 가집니다. 선생님께서도 제게 지금 잘 살고 있으니 교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살기 이름을 버렸다 할지라도 선생님과 선배들과 동지들은 여전히 제겐 큰 의미가 되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지런히 살려고 합니다.
  저에게 그들은 영원한 의지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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