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호> 이미 정하신 대로
9호> 이미 정하신 대로
  • 김경희정리
  • 승인 2004.12.03 1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월 3일 낮

  한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동반이 되어 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모두 무슨 약속이나 한 양 한 사람씩 모여들었다. 오랜만의 만남. 그래서 오래도록 서로에게 시선이 머물렀고, 오랫동안 껴안고 인사했다.

     저녁

  스무 여남은 명이 모였을 때, 30배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선생님부터 시작하여 서로 돌아가며 안음으로 첫인사를 나누었다. “편안하니?” “지난 1년 고마웠다” “보고싶었어” “잘 지내셨죠?” “……” 왜 마지막날 하는 인사를 지금 하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했으니 
 
  집으로 잘 돌아가라고!’ 농을 던지신다.
  이번 모임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데, 작년에는 ‘정진 또 정진’이라 써 붙이고 했으나, 이제 정진의 ‘정(正)’자도 빼고 그저 ‘진(進) 모임’으로 하자고 하신다. 그리고 내년에는 ‘진’자도 없애자 하신다. ‘이것이 예수살기의 마지막 정진모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생각을 놓치지 말고 이 모임에 임하자는 선생님 말씀으로 2000년 예수살기 신년정진모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두명씩 짝을 지어 앉아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1년을 대신 말하기로 하였다. 도란도란 둘러앉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1년도 열심히 길을 걸어온 사람들...
  이제 우리는 둘러 앉아서 지난 1년 동안, 지난 해 ‘한 말씀 들은 것’을 기억하고 또 그에 따라 어찌 살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각자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아까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하기로 했지만, 그 땐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라 하시는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의 다양한 경험들을 통하여 받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먼저 주는 것, 그것 이상의 방법이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셨다. 누군가 ‘마음 놓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마음을 놓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 걱정이 사라지는 것? 두려움과 걱정은 어느 때에 생기는가?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을 때 그것을 할 수 없게 되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비로소 nothing인 나를 깨달을 때 잘못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해보는 것, 다만 그 동기(motive)가 중요할 뿐, 결과는 결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멸치 똥까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송호일 목사, 대전 장애인 선교회에서 수원(부목사)으로 간지 이제 1년 된 이야기를 한다. 어리숙한 지난 1년, 참 바보같은 자신을 보는데, “니가 장애인이잖아” 하시는 음성이 들려왔단다. 여전히 어리숙하기 그지없어 다 맡길 수 있는 것이겠지.
  다 운영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한다는 이종철 목사,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연출하시는 그분을 경험하는 것 아니냐고 선생님 말씀하신다.
  미리 상대의 마음과 반응을 생각하여 행동하는 것은 습관이다. 그것이 가나안을 정탐하였던 나머지 열명의 태도가 아니었느냐는 말씀이다. 그들이 “그들이 볼 때 우리는 메뚜기 같이 보일 것 같습니다.” 하고 가나안 사람들의 생각을 미리 생각하였던 것, 오히려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데서 그쳤더라면 그들이 하느님의 분노를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나를 굴절시키는 것들이라는 말씀이시다.
  지난 1년 동안 돈버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연길, 그러나 돈버는 것은 그리 좋은 목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어떤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참 좋다는 말씀을 하시며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 목사님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 목사님의 꿈은 미국 유학 가는 것이었는데 정말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그 때 더 이상 꿀 꿈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꿈은 꾸지 말라고 가르치셨단다. “꿈을 꾸어라! 그러나 나 같은 꿈은 꾸지 말아라.” 그래서 선생님 역시 나는 무슨 꿈을 꿀까를 고민하다가 슈바이처 같이 되자 하셨다. 그리고 어린 시절 존경하던 인물들의 공통점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꿈은 그렇게 믿음의 길을 간 사람들, 성인이 되는 것이었단다.
  문득 목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영섭, 목회란 이해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국선도 도장 선생으로 지난 1년을 바쁘고 보람있게 보낸 이정은 사범, 가슴을 거스르며 살 수 없음을 느꼈다는 혜원, 너무나 잘 살았고 그대로 행복해 보이는 이기록·서미나 목사 부부, 무슨 새로운 계획하심을 느끼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박재철 집사, 한 두달 아주 힘겹게 지냈지만 지금은 편안하다는 순구, 지난 1년 용맹정진하던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고 왔다고 담담히 말하는 경희, “경희야! 니 사랑도 답이 이미 있어. 그 행로가 정해져 있어.”
  자기 무화(無化)와 자기절대화의 영성이 하나가 아니겠느냐는 말씀.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생각할 것을 당부하신다. 그러면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간절한 것만으로도 안되고, 충심으로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러니 생각도 함부로 말고, 말도 함부로 말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다 한 분의 경영이심을 명심하라 하신다. 그분은 지난 1년 ‘1인 다역의 모노드라마’를 훌륭히 해 내신 것이었다.

     1월 4일 아침 

  60번 큰절로 새 날 인사.
  지난밤 갑자기 아파 누운 송호일 목사. 아침에 깨어나서 같이 자리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다. 어제 송진을 나누어 먹고 체한 것이란다. 그래서 들은 말씀. “아무 거나 먹지 마라.” 선생님도 걱정이 되었는지 새벽에 깨어 기도하게 되셨단다. 그런데 문득 정말 송호일이 이대로 못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셨단다. 어제 장애인 운운 한 것에 대하여 말조심할 것을 당부하신다.
  풍경소리사에서 나온「읽을 거리②」중에서 ‘해방의 문’이라는 틱 나트 한 스님의 글을 읽는다. 한 문장 읽고 음미한다. 해방의 세 가지 관문에 대한 글이다.

  “비어있음은 무엇이 비어있는 것을 뜻한다. 컵은 물의 비어있음이다. 대접은 국의 비어있음이다. 우리는 동떨어진 나의 비어있음이다.”(「읽을 거리②」12)
  “만일 비어있음을 철학으로만 배운다면 그것은 해방의 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비어있음은, 우리가 그것을 깊게 통찰하여 만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고 서로 안에 들어있음을 깨달을 때 해방의 문(門)이 된다.”(15)
 
  동떨어진 나의 비어있음, 꽃이 꽃 아닌 요소들로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보는 것처럼 참나란 나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나’임를 보는 것이다. 내 손, 내 발, 내 얼굴이 결코 내가 아니나 나인 것, 그러나 그것을 철학으로만 배우지 말고 참으로 깊이 통찰하여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만물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두 번째 해방의 문은 모양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가르치듯 나·사람·생물·수명이라고 하는 네가지 상(四相)에서 벗어나야 바로 이 해방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미 나 아닌 것들이 없는 것이고, 사람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사람을 보는 것이고, 생물과 무생물이 다르지 않으며, 시간의 축에 한정된 존재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야 말로 이 사상(四相)을 벗어버린 분이다. 바람과 이야기하고... 아상, 인상, 중생상에서 벗어나면 자연과 친화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경지이다. 그리고 여기에 ‘시간’까지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해방의 문은 목적없음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수행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움켜잡지 않고, 목적없이 사는 법을 닦는 일’(23)이라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문단에서 새해 소망을 보았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만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회 전체를 섬길 수 있다. 목적없음(無爲)은 모든 것을 멈추고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 이미 수중(手中)에 들어있음을 깨닫는 것이다.”(24)

  선생님은 이것을 거듭 읽고, 거듭 듣고, 거듭 생각하여 세포 하나 하나에 절어 들게 할 것을 당부하신다.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것을 선생님으로 보고 오늘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이 무엇을 내게 가르치시는가를 보는 수련이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짜증과 미움에서 벗어나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낮 3시까지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각자 흩어졌다.

    

  3시가 되어 하나 둘 모여 앉기 시작하였다. 이종철 목사부터 말문을 열었다. 단소를 배우고 있는데, 단소의 구멍을 보면서 그분이 관통하는 피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분과 하나되는 데서 비로소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는 것을 보고, 그분이 관통하는 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런데 아직 그분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단소가 못되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되물으신다. “하느님이 미숙한 단소쟁이가 아니라면 이미 완벽한 소리가 나는 거 아니요?” 그리곤 계속 하셨다. “사람은 단소가 아니란 말요. 의지가 있어. 그것이 다 사라지면 완벽한 소리가 나겠지.”
  김민해 목사는 이기록 목사와 우연히 손잡고 산책을 했는데 참 행복했단다. 손으로 전달되는 그 느낌이 참으로 좋았단다. 작년에 정진모임 마치고 돌아가서 전일이를 안고 ‘가슴으로 사랑하자’라고 말했는데 아마도 그 마음이 전달된 모양인지 유난히 전일이가 아빠만 찾는 아이가 되었다고 이것이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틱 나트 한 스님이 쓰는 정념 수행에서 념(念)자는 지금 금(今)자와 마음 심(心) 자가 모여 된 말이니까 념이란 ‘지금 마음’이라는 뜻이고, 이 정념(正念,mindfulness), 마음모으기 수행이 참 좋다는 선생님 말씀.
  이 시간이 시작되면서부터 계속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는 것보다 걱정의 연속 속에 있었다는 박재철 집사. 지금도 계속 그 걱정을 놓을 수 없단다. 집에 물 걱정, 아이들 걱정, 이 말을 하는 지금도 그 장면들이 떠오르고 어쩌지를 못하겠다 한다. 선생님 말씀 “걱정해봐야 상황을 바꿀 수 없는데도 계속 할거냐?” 그리고 그 걱정을 기도로 바꾸라 하신다. 우기청호(雨奇晴好), 비오는 날은 비가 와서 신비롭고 맑은 날은 맑아서 좋은 법이다.
  송호일 목사가 선생님의 단소소리를 청한 덕분에 우리는 다함께 선생님 단소소리에 마음을 실었다. 오늘은 소리가 잘 안된다고 하셨지만 듣기에 참 좋았다. 송 목사는 3시까지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배우라 하셨던 숙제를 가장 열심히 한 모양이다. 사사건건 모든 것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한다. 아까 밖에 나가 보니 초복이에게 이기록목사가 가래침을 뱉았단다. 그런데 그 더러운 가래침을 초복이가 낼름 먹더란다. 자꾸 뱉더란다. 그 모습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것은 다 받아 먹는 것을 보았다 한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단다. 그 때 이기록 목사 끼어들어 말하기를, 어디서 보니 개들이 사람의 가래침을 참 좋아한다 한다. 그래서 집에서도 개들에게 자주 침을 뱉어 주고, 특히 예뻐하는 강아지에게 많이 준다 한다. 아, 그 말을 듣고 나니 가래침이 더러운 것은 우리 생각일 뿐이고 침을 뱉는 이기록 목사와 초복이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선생님 말씀하신다. 초복이에게 가래침은 좋은 것이다. 우리도 우리에게 ‘욕’이 올 때, 욕을 ‘가르침’으로 들으면 좋겠다 하신다. 누군가 여쭈었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수행하다가 그 감정이 다 사라졌을 때 말하는 것이 슬기롭다 하신다. 속엣 얘기를 하며 사는 것이 좋으나 ‘반드시 무엇 무엇해야 한다’는 것은 없다 하신다.
  자신을 일제히 쳐다보는 사슴들의 눈을 보았다는 영섭, 그 순간의 경험이 참 좋았다 한다. 선생님은 우리가 이 길을 가는 것이 그저 나무처럼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신다.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것이 말이다. 한 그루 나무처럼, 사슴처럼 존재하려고 말이다. 말없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말이라는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일 뿐임을 다시 한번 본다.
  ‘無盡藏’이라 글씨를 써 오셔서 앞에 세워 두고 이 말을 화두 삼고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저녁

  저녁을 먹고 무진장에 대하여 명상한 후 저녁공부를 시작한다. 종이 세 번 울렸다. 무진장, 무진장, 무진장, 무진장...... 어느 순간 들리는 소리 “(아닌 것이) 없다!”
  김명중 목사가 말문을 연다. 무진장 하니 물, 산, 바다 등 무진장한 것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곧이어 그 무진장의 것들이 세금을 내야 하는 것들로 변해 있는 것을 보며 이것이 무진장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기록 목사가 이 세상에 무진장한 것이 네가지 있다고 말문을 연다. 다들 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까 귀를 기울인다. “첫째는 아내의 요리솜씨” 다들 웃었다. “둘째는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 다들 더 많이 웃었다. “셋째는 하느님의 두뇌, 그리고 창작활동” 무진장한 것이 또 있다. 이기록 목사의 유머.
  혜원이는 무진장에 대하여 명상하는데, 다함이 없는 보고(寶庫)가 생각났고, 그 ‘무진장은 나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단다. 홍광순 집사는 욕심이 아닌가 한다고 말한다. 박경서 목사는 그 욕심을 만족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만족시켜보는 것이라 한다. 자동차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는데 막상 자동차를 사고 나니 별다르지 않더라는 것이다. 욕심, 만족... 욕심을 없애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지만 어렵고, 욕심을 만족시켜보는 방법은 좋은 방법이지만 위험하다고 말씀하신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을 때에야, 즉 아까 공부했듯이 아상(我相)을 극복할 때에야 비로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이시다. 아상이 극복되면 갖고 싶은 대상(목적)도 사라진다.
  남영숙 목사가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 과부의 기름과 밀가루를 채워주셨던 것처럼 양식을 채워주셨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아하, 선생님은 그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요구했던 말을 기억해내셨다. “빵을 구워 먼저 내게 주고 너와 네 아들이 먹으라.” 뿌리를 살리고, 하느님을 먼저 먹이고, 비로소 그 때에야 내가 사는 것이다. 디펙 초프라의 ‘줌의 법칙’도 그것 아니냐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질서이다. 영어로 “Order”는 순서라는 말인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질서이며 법이다. “나를 안 주면 나를 안 준 것이 아니라 널 안 준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爲學은 一益이요 爲道는 一損이라’ 우리가 배우고 가는 길이 바로 덜어내는 길인 것이다.
  한상희 목사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그것은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평생 마르지 않아야 하는 샘이란 기도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항상 매달려 있는 질문인데, 존재론적인 물음이 이 무진장과 얽혔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 그 앞에서 엇갈린 생각. 10년 전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지금 누리는 이 행복이 항상 불안하다는 상희. 이번 정진 모임 내내 그를 따라다닌 질문이다.
  송호일 목사, 아버지께 물었단다. “무진장이 뭡니까?” “나다.” “그럼, 예수님도 무진장입니까?” “그러엄.” “그럼 저는요?” “너두지.”

     1월 5일 아침

  90배로 아침 문안.
  오늘은 가야산에 갔다가 덕산 온천에 가기로 한 날인데 비가 계속 내려서 틱 나트 한 스님의 글 ‘승가 세우기’를 읽었다. 불교에 삼보(三寶)라 하는 것이 있는데, 승가는 그 중 하나이다. 삼보란 부처님과 법과 승가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승가란 교회공동체를 말한다. 이 글은 틱 나트 한 스님이 프랑스에 세운 플럼 공동체에서 겪은 일들을 적고 있다. 이 글에서도 스님은 정념 수행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정념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깨어있기’라 하겠다. 즉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지금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글에는 ‘다섯살 명상’이라는 것이 나온다. 다섯 살 명상이란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다섯 살짜리 아기로 자신을 본다. 숨을 내쉬면서 내 속에 있는 다섯 살짜리 아기에게 웃어준다.” 이렇게 마음을 모아 명상하는 동안 자신을 다섯 살짜리 아기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 아기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자신이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제 수없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더욱 단단히 묶여오기만 했던 매듭을 기어코 풀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다섯 살 아기로 보고 수행을 하게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의 아버지에게로 묶여있는 매듭을 푸는 것이다. 이제 이 정념 수행을 통해서 다시금 자신의 아이에게 똑같은 짓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제 저녁, 무진장 명상 때에,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미움과 원망 때문에 오열하였던 사모님. 오늘 그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지난 밤 잠못들고 예수님께 이 모든 것들을 묻고 모든 것에 대하여 들은 대답을 이야기하신다. 어린 시절 억압된 분위기에서 자란 그 기억이 아직도 나를 억누르고 있어 언제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튀어 올라오는 이 고통, 할머니에 대한 원망. 이제 그것을 낫게 하시려고 그 기억을 다시 퍼올리신 것이다.
  봇물 터지듯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꺼내놓는 남영숙 목사, 이정은 선생, 조혜원, 김종원 목사, 송영섭... 아이에게 도망갈 장소가 필요한 까닭으로도 승가는 중요하다. 스님이 이야기하는 수행공동체는 서로에게 법형제, 법자매, 법아저씨, 법아주머니, 법아버지, 법어머니가 된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가정의 뿌리를 찾아주고, 비로소 새로운 뿌리가 돋아나게끔 하는 것이다. 승가는 이렇듯 서로 만나 수행한다. 함께 정념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 기본 수행이다. 잘 모르는 사람, 안정되지 못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가 당신의 오두막을 의지처로 삼으라.”(본문 중에서)는 것이 승가의 기본 수행이다. 선생님은 아버지(육신의, 업의)를 끊고 아버지(하느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해주셨다. 아버지는 뿌리인데 어찌 끊을 수 있겠는가? 업의 매듭이 꽁꽁 묶여 있다면 이제 나에게서 끊으라. 내가 풀라.

    

  점심을 먹고 여기 저기 흩어져서 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선생님도 지난밤 잠을 못 주무신 탓에 누워 계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무지 낮공부 시간에 모이라는 소리는 없다. 그런데 하나 둘씩 선생님 주변에 둘러 앉는다. 선생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 중 하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외가에서 쉬고 계셨다. 외가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곳이었는데, 제천 여름 수련회 하는 곳 근방이란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어머니께서 닭을 한 마리 산 채로 들려 외가로 보내셨다. 외가까지 가는 버스비만 달랑 들고 말이다. 그래서 외가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가도 가도 눈에 익은 마을이 나타나질 않는다. 한참 가다가 버스 기사에게 물으니 이 버스는 하루 한번 다니는 빙 둘러가는 다른 노선이란다. 장터에 내려 외가 동네까지 가는 차를 얻어 타고 돌아갔다. 그리고 외가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울기 시작하였단다. 다음날 동네에 소문이 나기를 여우가 내려왔으니 닭 조심하라 하였단다. 마당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버선발로 나오셨다. “니가 웬 일이니?” 하셨단다. 방문을 열었을 때 그 방으로부터 흘러나온 환한 빛을 잊을 수 없다 하신다. 아버지와 만나 집 이야기를 하는데, 병아리 깐 것이 어찌되었느냐는 물음에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마음에, “알 낳았어요.” 했단다. 그래도 미심쩍어 하는 아버지께 확신을 드리려고 “피도 묻었는걸요.” 했단다. 며칠 후 형이 외가에 와서 다 들통이 나고 거짓말했다는 이유로 많이 맞았단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 상상력이 풍부했던 그 시절 이야기로 날이 저물어 갔다.

     저녁

  예수살기 소식지 12월호 중에 ‘거름을 꽃으로 바꾸기’(틱 나트 한)를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기로 한다.
  요즘 관속에 들어가 있는 상상이 자주 떠올라서 두려웠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두려움에 대한 포기가 일어났다는 김명중 목사, 지하실 깊은 데서 불쑥 그 두려움이 솟아오른다는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께서 아까 낮에 들은 이야기 중에서 여학생들을 괴롭혔던 ‘노출증 환자 퇴치법’을 이야기하신다. 그런 사람을 물리치는 방법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는 그 반응을 즐기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도망가지 말고 똑바로 보면 그들이 오히려 도망가고 만다는 것이다. ‘naming the devil’명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악마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명상법이다. 예수께서 마귀를 만났을 때 그 마귀들이 예수를 향해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안다”는 말로 제압하려는 것도 이 맥락이란다. 이종철 목사의 이야기 들으니, 제마(製麻) 때도 그 이름을 지어주면 사라진다 한다. 분노, 두려움, 실망, 슬픔 이런 감정들이란, 그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거기에 반응하게 되면 자꾸 들락날락 하다가 끝내 문간에 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오면 그대로 보는 것. 그리고 깊이 보는 것. 이것이 정념의 수행이다. 
  박재철 집사의 경험이다. 화목이가 자동차에서 장난하다가 그만 다리를 다칠 뻔하였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갑자기 화가 나서 아이를 마구 때렸단다. 그리고 나서 때린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한 열흘간 괴롭게 지냈다. 선생님은 참 좋은 경험을 했다 하신다. 그런데 아이를 때린 것만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그것도 보았으면 하셨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없애주시려고 했던 것도 죄가 아니라 죄책감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감히 하느님을 벌거벗긴 상을 지우지 못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영섭, 그리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를 보면서 폭행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단다. 그런데 어느날 그런 여자가 참 아름답게 비친 날이 있었단다. 그 때 비로소 그 두려움이 씻겨지는 경험을 하였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있음을 보게 될 때까지 그 경험은 반복되는 것이라고 선생님 말씀하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보고’ 또 ‘자세히 볼 것!’
  김상국 전도사, 무언가에 몹시 화가 나서 돌아온 아내에게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 순간 자신은 깨어 있기 때문에 아내가 화난 상황을 알고, 또 아내에게 화낼 것 없음을 일깨워 주지만 아내의 화만 더 돋구는 것 같다.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누군가 이야기한다. 자신은 아내의 화에 동의해 준다고.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일단은 그 화의 씨앗에 자꾸 물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 참으로 도와주는 방법은 정념으로 보아주는 것이다. 교회도 그렇지 않은가. 교회에도 가시같은 존재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을 없애려고 한다면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을 보는 자세야말로 정념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타인을 향해서는 두려움으로, 자신을 향해서는 분노로, 또 하느님을 향해서는 죄의식으로 항상 둘러싸여 있다는 누군가의 말에 다만 정념으로 그 모든 것들과 만나기를 종용하실 뿐이다.
  한상희 목사가 권고 사직된 장로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한 마음, 그 지경이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남아있음을 본다고 한다. 선생님 말씀은 그 상황은 그 장로가 만들어 간 것이란다. 제자공동체에서 유다처럼 말이다. 예수는 본래 열린 분이라 아무 것도 막을 수 없는 분이시다. 예수는 문이 없으신 분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 어떤 행동도 도무지 막을 수가 없다.
  내게 이 글 읽으며 뭐 할 말 없느냐는 선생님 말씀에 계속 떠올랐던 엄마와의 일을 이야기 했다. 얼마 전에 엄마와 싸웠는데, 엄마한데 서운한 게 있어서 “엄마 그때 왜 그랬어?”라고 물으니 엄마가 오히려 더 화를 내셨던 일이다. 그래서 지난 일까지 떠올리며 엄마나 나나 마찬가지로 화내고 했던 이야기. 그런데 싸우고 방에 들어와서 잘못했구나 생각했지만 금방 사과할 수 없었다. 한동안 말 안하고 지냈다. 그 때 염치가 없어서 기도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했다. 말의 내용보다 감정이 더 먼저 전달되는 법이라고 일러주신다. 화가 나는 순간 그 화를 잘 보고 감정이 사라진 후에 차분히 말하도록, 그것이 정념수행이다.
  이정은 사범은 천안에 또 다른 수련원을 내는 문제를 이야기했다. 평소에 마음에 안들고 거슬리는 사범이 하나 있는데 그가 같은 지역에 수련원을 낸다는 것이다. 마음에 걸리고 싫었지만, 그를 도와주기로 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단다. 그러고 나니 그야말로 참으로 어여쁘고 사랑스럽게 되었단다. 지금은 그 수련원을 아주 잘 운영해 나가고 있단다. 선생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그 자리에 서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을 너보다 낫게 여기라”는 바울 선생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그러다, 또다시 이야기마당으로 넘어갔다. 장일순 선생님 이야기. 그 꼿꼿했던 한 분 스승 이야기.

     1월 6일 오전

  120배로 아침 문안.
 「읽을 거리②」중에서 ‘넘어 보기’ 읽기.

  “처음에는 영(靈)과의 접속이 나약하고 끊어지기 쉬운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좀더 성숙해서 자신(自信)을 품게 되면 당신의 삶(人生)이 온통 의미로 가득 차 있음을, 매 순간마다 그것들을 넘어서는 관점(aspects)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4)

  11가지 경험(30-31) 중 하나를 택하고 그 과거의 경험의 순간으로 돌아가 그 경험에 단지 ‘반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전체적으로 그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기로 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진실과 만나도록 기다린다. 그리고 떠오르는 상이나 이야기나 한 두마디 말을 듣는다. 선생님은 이미지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의미(메시지)를 듣고, 또 의식적인 간과를 경계하라고 하셨다. 이미지는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니니 두려워 할 것도 없다. 그 사건 역시 이미지일 뿐임을 일러주셨다.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려움이란 단지 언어일 뿐!!
  이통상 목사는 기도에 응답받은 경험, 김민해 목사는 부드럽게 감도는 빛의 경험, 김명중 목사와 서명석 목사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 느낀 놀라움, 나와 영섭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수 있다고 생각되는 한 순간, 상희는 지난번 자동차 사고 때의 경험, 김상국 전도사는 자연의 장관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 혜원은 위험한 상황의 위기 속에서 돌보시는 은총의 경험, 남원장은 기도하고 응답받았던 숱한 경험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어떻게 또다시 선생님의 옛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서예가 민병산 선생님 이야기이다. 그분의 글씨는 매우 독특한데, 그가 글씨를 쓰게 된 것은 몹시 좋아하던 책모으기가 무산된 이후라 한다. 희귀한 책들을 그렇게 사 모았는데 어느날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단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인생의 절망에 빠져 있다가 글씨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날마다 글씨만 썼는데, 종이를 두루마리로 말아 놓고 써 내려갔단다. 어느날 ‘한삶의 집’ 기금을 마련하려고 바자회를 열었는데, 그분께 가서 글씨를 얻었는데 ‘이―만큼’을 주셨단다. 선생님께서 지난날 만났던 기인들의 이야기이다. 참 멋있게 사셨던 한 인물이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흘렀나 하시며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박경서 목사는 지난번 자동차 찾으러 가던 날 교통사고 때 이야기를 한다. 다양한 각도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one perspective이지만 하느님은 all perspective라고 미국의 어느 사람이 말했다고 선생님 일러주신다.
  작년 여름 오대산 기억을 떠올리며, 수없이 죽을 뻔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순구, 선생님 한마디 “여기도 오대산이거든.” 지난 12월 1일 11시에 예수님으로부터 당신은 나의 누구입니까에 “애인이다” 하시는 대답을 들으셨다는 사모님, 어제 밤 기도하는데 평소에 아주 무서워하고 질색인 쥐가 떠올랐단다. 그런데 그 쥐가 아주 귀엽게 느껴졌고, 강도가 들었는데 “네가 원한다면… 다 맡긴다” 하는 심정이었다는 이야기. 운전이 항상 두려웠던 이정은 선생, “이런데도 네가 뜸을 들이느냐”는 음성을 들었단다. 메시지가 즉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사로잡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종철 목사.
  선생님은 언제든지 메시지를 기억하고, 또 실천하고, 또 과거로 돌아가서 메시지를 듣고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지금까지 과거의 경험으로 가서 들었으니 이제부터는 지금 이루어지는 경험에서 메시지를 듣자!고 하시며 오후에 마애삼존불과 덕산 온천을 들러오자 하셨다.

      

  점심을 먹고, 서산 마애삼존불을 향했다. 천년이 넘도록 저 바위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신 부처님 얼굴. ‘백제의 미소’라 하는 그 맑고 밝은 웃음을 보고, 덕산 온천을 들러 목욕을 하고, 추어탕과 칼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안골로 돌아왔다.

     저녁

  오늘 낮 동안 ‘넘어 보기’ 경험을 나누기로 한다.
  ‘한말씀 주십시오’ 하는데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는 서명석 목사, 마애불 아래에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곳에 부처님이 한 분 계신데, 이런 소리 들렸단다. “여기가 내 자리다. 비교하지 마라.”
  김종원 목사는 목욕탕에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게 말을 걸었단다. “넌 행복하냐?” “행복이 뭐냐?” 하더란다. 그리곤 “생명이냐, 아니냐만 중요하다.”라는 대답인지 생각인지 들었단다. 그리고 “행복이란 건 사람이나 추구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더란다. 선생님 한마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찾는 사람은 없겠지.”
  자신을 잘 보고 있는 자신이 참 기특하고 흐뭇했다는 김민해 목사. 평소 자신의 표정이 매우 경직돼 있는 것에 불만이 많았는데, 오늘 부처님 얼굴을 보면서 바로 이 얼굴이다 싶어서 이제 그 웃음을 닮기로 했다는 송영섭. 박경서 목사는, 마애삼존불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항상 무표정으로 보였단다. 그런데 오늘은 그 웃음이 보였고 그 웃음이 매우 익숙한 웃음이라 기억되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지 하는 느낌이 왔단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돌의 진면목을 보았고.
  서미나 목사는 부처님을 보고 내려오는데 절벽 아주 초라한 곳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여서 “왜 여기 계세요?” 여쭈었더니 “여기가 내 자리야.” 하셨단다. 다들 저 위에 있는 저 분께 관심이 가 있는데 왜 보이지도 않는 그곳에 계시냐고 물었단다. 모두 하난데 다들 어떤 상만 찾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선생님 말씀하시기를, 老子가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 했는데 바로 그 말이 그 뜻이겠구나 하신다.
  서산 마애삼존불이라 해서 많이 기대하고 갔는데, 글쎄 전에도 두 번이나 다녀간 곳이었다는 호찬. 선생님, “두번은 간과했는데 이제 봤구만” 하신다. 혜원은 평소에 남의 살이 닿는 것에 대해 참 못견뎌 했는데, 오늘은 누군가라도 곁에 있으면 손을 잡고 싶었단다. 그런데 오늘 내내 아무도 곁에 없거나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나 했단다. 그러던 차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머리가 아프다는 김종원 목사님 손을 이 때다 하고 잡아주었단다. 자신의 모습을 가만 생각하니 평소에 베풀고 보살피면서도, 사랑이 늘 있으면서도 나는 잘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충분히 향유하지 못했음을 보았단다. 이제 그 사랑을 충분히 향유하면서 살겠구나.
  난 어제부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서른 둘에 혼자 되셔서 참 고생하시고 사셨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내게는 내가 보살펴 드려야 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교회에 잠깐 나오시다가 지금은 안 나오셔서, 평생 하느님을 못 만난 채 사시다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늘 있었다. 그런데 어제, 아하 내가 엄마께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 드리면 되는 거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마애삼존불 뵙고 오면서, 저 돌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천년이 넘도록 위로를 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생각하며 들었던 생각과 만나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특히 반가사유상 얼굴이 참 우스웠다 하신다. 사람들이 다들 여래입상만을 관심할 때, 옆에 앉아서 “나는 다 안다. 물어봐라. 나 말 안해”하는 표정으로 있더란다. 내 뒤에 서서 연신 웃으시던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구나.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봐라! 솜씨를 만나면 돌맹이도 웃잖냐.”
  내내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상희. 안골로 돌아와서 한 성도의 부음을 들었다. 암 선고받은 성도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갔다. 몇 달 더 사시겠지 하는 마음에 자주 찾지도 못했는데, 그게 마음에 걸리고 잘 보내드리지 못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 무슨 뜻인가를 생각했더니, 억지로 의미부여 하지 말 것과 의미부여하는 것과 메시지 듣는 것은 다름을 말씀하신다. 의미부여 하는 것, 그리고 메시지 듣는 것...
  사모님은 명상 중(꿈이었는지)에 강도가 들었을 때 했던 말 “네가 원한다면...” 이 말이 계속 떠오르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신다. 선생님은 신중할 것을 당부하신다. 하느님의 뜻(원하시는 것)이 네가 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내가)이 원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삼가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하신다. 그리고 아까 온천에서 기다리던 혜원이에게 늦고서도 천천히 걸어온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데 혜원이가 “잘 하셨어요” 했단다. 사모님에게 그 말이 아주 크게 들렸단다. 선생님께서 거 참 좋은 버릇이라고 말씀하신다. 혜원이는 어른한테 그런 표현을 한 것에 대해 몹시 민망해 했지만.
  그 때 상희가 갑자기 “사모님 말씀 들으면서, 그 돌아가신 성도 ‘잘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하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맞어” 삶과 죽음... 선생님은 이 모든 것이 관념에서 빚어진 것이며, 삶은 좋고 죽음은 나쁘다는 그 관념을 바꾸는 걸 정말로 해보고 싶다 하신다. 그리고 내내 망설였는데, 그리고 아까 목욕탕에서 계속 하느님께 여쭈어 보았다시며 한번 해 보자 하신다. 연극을. 주제는 선생님의 장례식이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당신은 죽은 것이니 이제 모여 장례식을 준비하라 하신다. 그리고 당신도 그 장례식에 ‘유언 비디오’ 쯤에 출연하시겠단다. 이 난데없는 제안에 아무도 ‘아니오’라 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 이미 선생님의 뜻을 헤아린 제자들의 모습이겠지만, 또 어쨌든 연극인데 하는 심정이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겠지만, 나로선 이것이 무엇인가 싶은 심정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 자연스런 흐름에 나를 맡기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흐름을 믿는다.
  서로 이해가 다른 사람들의 논전이 있었고, ‘돌아가신 후 방황하고 다시 희망을 찾고 그리고 장례식을 치르고’ 하는 방식으로 연극을 구성하기로 했다. 돌아가신 선생님이 죽을 수 없는 이 지경(주문을 잘못 이해함)에 나타나셔서 ‘단지 장례식’만을 준비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식 절차를 짰고, 그 순서를 몇 명씩 나누어 맡았다. 기도와 환송사, 약력 소개, 유언, 헌사, 환송가 순서로 장례식을 짰다.
  우리에게 더 없는 행운이셨던 선생님, 이제 다시 돌려 보내드린다고 아버지께 다시 돌려 보내드린다고 기도하고, 못다한 사랑과 만남을 아쉬워하며 그 동안 보여주셨던 삶과 사랑에 감사하는 애절한 편지, 우리에게 한 분 스승이셨던 이현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짧은 보고, 그리고 이제 아쉬움으로 떠나가는 선생님의 유언, 그리고 한 사람씩 나가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한마디씩 말씀을 올리는 헌사. 아, ……. 그리고 부엌에서 가져온 악기들을 들고 춤을 추며 불러 드린 환송가 ‘오! 자유’.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모두 어우러져서 춤을 추었다. ‘오오 자유 오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후기

  울음과 눈물의 한바탕 연극이 끝났다. 어떤 이는 말했다. “또 속았다.”
우리가 참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을까?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四相)에 사로잡혀 있는 이 어쩔 수 없는, 얽매인 실존의 아픔 앞에서 우리의 눈물과 통곡은 아름다웠다. ‘사랑한만큼 운다’는 느낌. 그래서 많이 울기 위해 많이 사랑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사랑밖에는, 그리고 이 세상 떠날 때 남겨둘 것 역시 사랑밖에는 없다.
  그리고 다시 둘러앉은 우리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가, 다시 웃음과 즐거움으로 돌아와 있었다. 선생님은 내일 하시려 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셨다. “그 동안 예수살기, 그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다고 했지만, 이제 그 이름조차 없게 하자. 그 동안의 몇 가지 일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고, 재작년 산에 가면서 들려주셨던 ‘이제는 혼자가거라’는 말씀. 이제 실천할 때가 정말 온 것 같다. 예산 땅을 떠날 생각이다. 조만간 이사할 것이고 여기도 이제 정리하게 되겠지. ‘여럿이 가면 결국 혼자가 되지만 혼자서 가면 친구들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이제 앞으로 예수살기라는 모임으로는 모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정말 예수살기하는 거지.”
  다음날 아침 우리는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26절까지 읽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우리가 갈 길 역시 스승을 따라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홀로 그분을 따라가는 것뿐이겠지. 2000년 전, 유대 땅의 그분을 따라갔던 그 제자들처럼. 하느님은 참으로 하신 일을 되풀이하시는 분이시다(전3:15)

---------------------
빠진 이야기가 좀 많아서 아쉽고 메모를 좀 더 성실히 할 걸, 후회가 남았어요. ‘마지막 정진모임이라 생각하고 지내자’하셨던 선생님 말씀을 정 말 듣지 않았던 걸까요? / 정리 :  김경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