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호> 다시 眞理와 벗하여 살고 싶습니다.
9호> 다시 眞理와 벗하여 살고 싶습니다.
  • 정희수
  • 승인 2004.12.0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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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에는 다시 진리(眞理)와 벗하여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벌써 달력에는 며칠 동안 자유시간 없이 약속과 회의로 날이 꽉 잡혀 버렸습니다. 한 달에 거의 일주일 이상은 집을 떠나 긴 출장을 해야 됩니다. 때로는 풀 수 없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세파에 밀려서 마음의 자리를 다듬을 겨를도 없이 지내 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자신의 외양과 체면의 시종이 되어서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내면, 영혼의 거친 숨소리는 경솔히 여겨 왔습니다. 여러 스승들이 비춰 준 도인의 행색이 깊이 도전을 해 오고 있는데도 진득하게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순례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으로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나의 욕심이 아마도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층층이 욕심뿐인데 어떻게 마음을 정결케 할 것이며 안심(安心)의 풍요를 맛보겠습니까?
보다 낫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또 속절없는 순수한 욕심이라고 추켜세워 보지만, 역시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래도 제가 평안한 마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제 자리를 정돈하고 내면의 깊은 자리를 살필 때입니다. 속에서 소리가 납니다. 마치 얼어붙은 땅 속에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 간간이 쪼록쪼록 소리들 내듯이 소리가 납니다. 내 자리가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속에서 나는 소리는 온통 잡음일 뿐입니다. 그래도 조금 침잠하고 정돈이 되어 있어서, 그 고요에 기대면 필경, 속에서 원음(原音)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생생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는 일을 가장 으뜸가는 소명으로 삼고자 합니다. 내면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일을 소일거리로 삼으려면 은총에 기대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은총의 받들어 줌 없이는 내 자신의 자리 정돈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예 제 자신의 자리 정돈이 은총에 기댐 없이는 가능치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리 정돈이 어려운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은혜 덩어리라는 깨달음이나 신앙 없이는 자리 정돈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요사이 조금씩 확신처럼 저에게 다가오는 깨달음은 “하늘이 나의 존재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속을 잘 달래면서 조금씩 얻은 힌트이기도 하고, 나의 온 살덩어리는 타인들이 빚은 조각품이라는 생각이 깊어진 때문입니다.
내 몸은 어느 한 부분도 스스로 된 것이 없고, 온통 다른 이들의 빚더미이고 살과 피가 다 인연으로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것이니 하늘이 존재의 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後之言學者, 舍心而外求, 是以支離決裂, 愈難而愈遠”

이는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의 근제설(謹劑說)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양지(良知)라고 본 왕양명이 이른 말로, “이후에 학문을 말하는 자들이, 마음을 버리고 밖에서 구하기 때문에, 지리멸렬해져, 더욱 어려워지고 멀어지게 된다”로 해석됩니다. 이처럼 속에서 나는 소리를 가벼이 여기고 밖에서 구하는 버릇은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을 버리고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아마도 혼잡할 대로 혼잡해진 우리들의 심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엉키고 뒤섞여 혼잡하게 하는 우리의 삶은 속에서 유유하게 흐르며 말하는 양지를 거스르는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젠 다소곳이 자리를 정돈하고 본원에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본원을 경주하고, 속 소리를 진득하게 들으면 결국 우리들 마음에도 예쁜 꽃이 피고, 평안함이 찾아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왕양명은 “활연유견(豁然有見)”을 마치 은혜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속 소리를 잘 듣고 꾸준히 양지(良知)를 다독거리면 배우고 깨닫는 과정에서 일종의 비약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공부가 더욱 오래되고 깨달음이 더욱 깊어지면 어느 순간엔가 순풍이 불어서 우리들의 마음에 자유로움이 깃들고, 무언가 무궁무진한 속을 훔쳐보게 되고 기쁨과 환희에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 공부하다가 어느 순간에 툭 터져서 환하게 보이는 것을 “활연유견”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마 비약 그 자체는 새로운 인식의 거점을 주는 경험일 것이고, 뭇 사물의 겉모습과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마음의 큰 그릇을 묘사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일상사를 살면서 정성을 들이다 보면 하늘의 은총이 강물같이 넘쳐나 은혜의 강물에 잠기는 무경계성의 감격을 가르치는 것일 것입니다.
선불교의 견성도 체험의 자리는 은총의 경험과 매 한가지일 것이요 아미타불의 원력에 힘입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지는 “횡초(橫超)”의 체험도 활연유견의 이치일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늘에 기대고, 은총에 기대고, 선생님에게 기댈 때에 우연히 자연스러운 경계의 터득을 이룩할 것입니다.
자연(自然)은 우선 힘의 환상으로부터 먼 데서 구체화됩니다. 실제로 힘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어느 곳엘 가도 창대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힘과 권력에 대한 놀음은 밤낮 없이 요연하고, 엎치고 뒤치고, 혼돈을 자초합니다. 힘에 대한 환상이 멈추지 않고는 자연을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하느님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이웃들로부터는 스스로 떨어져 나누어지고 맙니다. 힘으로 망조가 든 인류를 고치기 위해서 하느님은 “힘없는 성(聖)”을 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역사에 당신의 뜻을 도입하는데 완전히 힘없는 나약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적인 선택(divine choice)입니다. 예수는 그 힘없는 진리의 표상으로 새로운 소망을 땅으로 옮기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는 자연(自然)의 섭리를 배태한 진리의 본원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기가 된 사건은 아마 가장 하늘의 꿈을 땅 위에 펴기 위한 최선책이었을 것입니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면 암만해도 우리들이 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힘의 환상을 거침없이 깨뜨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됩니다. 환상의 틀을 깨는데는 다소곳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적이 필요한 줄 압니다. 그리고 속의 소리를 기대고 듣고, 벗삼아 청총하면서 허망한 세월을 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길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더 간절하게 소원해 보기는 마음을 간직하고, 가능하면 외유하지 말고 소중한 한 해를 살고자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 양지(良知)의 줄기들이라면 분명히 내심낙원(內心樂園)을 꿈꾸어 볼일입니다. 마음밭 농사를 하기 위해서, 행차하는 일은 가능하면 줄이고, 바깥의 화려한 외출은 횟수를 적게 할 것입니다.
이제 속에 있다 한 무진장한 자유를 소박하게 꿈꿀 일입니다.

君子一心, 萬理完見, 死物雖多, 莫非在我(「 白沙子全集」).
(군자의 한 마음에는 온갖 이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 사물이 비록 다양하지만 나에게 있지 않은 것은 없다.)

이런 맥에서 아마 우리는 내 마음이 곧 우주라는 믿음도 극단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자유함이 있다면, 일단 마음을 가꾸는 일에 수행의 본원을 삼고, 다시 한번 그 속의 비밀스런 소리에 청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좌함이나 기도를 통하여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허기진 영혼의 소리를, 바쁘게 살더라도 때때로 두문불출하고 반드시 구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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