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당한 성체 3
회수당한 성체 3
  • 김경일신부
  • 승인 2004.12.0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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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정책협의회가 한 밤중에 서울 시내 천주교 어느 수녀원의 밀실에서 열렸다. 회의는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나 보게되는 일제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의 우국충정이 아마 이렇지 않았을까. 다들 싸움닭의 투지로 무장하고 한 목숨 버릴 각오를 하고 모인 대표들의 결연함에 오금이 저려 숨도 못 쉴 지경이다. 
각 교단마다 대표들이 나름대로 민주화를 위한 전략전술을 펴는데 거의 전투를 치르는 것 같다. 나는 이 바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어설픈 초년생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도 어려웠고 그저 복잡한 논리들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으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설프게 어느 한쪽 편을 들었다간 얻어맞을 분위기다. 
서로 의견이 상반되는 타교단 대표들이 가끔 나를 따로 개인적으로 불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공식석상에서의 지지를 요구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정치한 논리일지라도 논리는 논리에 의해 반드시 극복된다는 입장이어서 나도 모르게 딴죽을 거는 태도가 되므로 결국 확신의 김을 빼는 회의론자의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 내가 운동권의 논리에 대해 전폭적으로 동조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한 성장배경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단기간 몇 권의 운동권 커리큘럼을 이수하기만 하면 하나같이 똑 같은 논리를 펴게 되는 것이며 일단 유사시 상부조직의 지시가 떨어지면 누구도 별 이의제기 하는 사람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같이 운동을 하던 동지 중에는 정부 쪽 논리에 완전히 넘어가서 간혹 수사관으로 얼굴을 맞대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권커리큘럼에 대해 허점을 찾고 논리를 완성한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다른 각도에서 상반된 논리를 세워보려는 노력도 해 보았다. 극단적인 흑백논리의 강요는 서로 다른 관점의 논리를 제시해 선택을 유도하는 것보다 결국 설득력이 약하며 일방적인 한쪽주장의 수용은 탄탄한 반대논리에 부딪쳤을 때 기왕에 수용했던 논리에 대해 속았다는 판단과 함께 극단적인 거부의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내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었다. 
현실의 급한 파도는 빠른 판단과 전투적 대응을 요구하는데 나는 운동권의 논리가 반대를 위한 반대이고 실질적 대안이 부재하다는 기성세대의 비판에 대해 나 자신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줄 만큼 학문적 바탕이나 실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어쨌든 민중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부도덕한 군부정권을 하루 빨리 무너뜨리고 국민의 민주적 선택에 의한 민주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어서 그 방면에 전문지식과 사회운동 경험이 풍부한 프로운동가를 다른 교단에서 영입해 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 대성당 대학생회 학생들에게 탈춤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신학대 출신 운동가가 성격이 치밀하고 운동에 대한 태도가 성실하므로 한달 여 동안 설득해 성공회 청년운동의 내부조직 체질강화와 학습의 임무를 맡겼다. 
81년 9월 27일 대학생회 주보를 발간했고 11월 26일에는 성공회 전국청년 연합회 회보가 발간되어 교회 내에 청년들이 독자적 언론매체를 갖게 됨으로서 대성당의 청년운동은 전국단위의 조직을 가지고 다른 교파와 연계하는 가운데 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대성당청년회 총무로 당선되었다. 청년회 회장은 현직 검사로 봉직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대성당대학생들의 대내외 활동이 그 영향력을 더해 갈수록 교회의 제재와 간섭도 더 심화되어 갔다. 마음대로 활동하게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결국 학생들이 다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대학생회 사무실 문이 교회당국의 일방적 결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는 앞에서 망치질 끝에 폐쇄되어 인근 식당이나 술집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학생들이 성경공부 모임을 하다 우는 일이 잦아졌다. 교회의 압력은 나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성직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한 사람씩 교회당국에 불려가 개인면담과 함께 성소에 대해 확인을 받고 오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당시 나는 설상가상으로 신문학과 대학원 독일유학파 출신 젊은 교수의 미움을 사 그의 과목에서 낙제점수를 받았고 3년이 지나야 그 과목을 이수할 수 있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었다. 논문준비를 하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한 마디로 졸업불가 통고였다. 총장사퇴사건 이후 이미 보복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성적표를 받아들자 호흡이 멎을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당장 담당교수를 찾아가서 사생결단을 내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신학원 입학에 지장이 있을까봐 성질대로 할 수도 없었다. 세상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철부지를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인내심이 약했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마치 적으로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한동안 부상당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다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시 대성당에 시무하시던 부제님을 찾아갔다. 그는 한참동안 나를 달래더니 예상 밖의 조언을 해주었다. 부산교구 상황이 열악하기는 하나 주교님이 성소자를 참 아껴주신다고 부산교구행을 권했다. 나는 그 길로 서울역으로 가서 부산가는 밤차에 올라타 부산교구 주교님을 찾아갔다. 주교님은 초면의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이런저런 대화 끝에 뜻밖의 아주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부산교구 소속으로 추천을 받을 경우 신학원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까지 해외장학금으로 지급해 주겠다는 것이고 나의 장학금을 보내줄 미국의 바로 그 신학대학에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셨다. 나는 당장 추천을 해 주십사고 주교님께 요청을 했다. 주교님은 쾌히 승낙했다. 
나는 이 소식을 어머니에게 들은 대로 전했다. 어머니는 두 말없이 밀린 방세를 갚으라고 목돈을 건네 주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내내 콧노래를 부르며 서울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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