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 제2장 적색사랑(7)
19호> 제2장 적색사랑(7)
  • 정호영
  • 승인 2004.12.03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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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던 날, 붉은 색의 원피스를 입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하루 전날 컴퓨터 대화에서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올 것이냐”고 묻자 난 “알아 맞춰보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그는 “아마도 붉은 색 원피스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왜요?”라고 물었고, 그는 “당신은 적색사랑이니깐 그럴 것 같다”고 말하기에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
 그는 또 “녹색 옷을 입고 오겠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에 나도 그러라고 했다.
그와 난 6개월 가까이 만남을 계속해 오면서도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의 나이와 이름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 흔한 전화번호조차도 묻지 않았고 또 구태여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왠지 목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하면 오히려 어색할 것만 같았다. 그냥 글로 내 생각을 꾸밈없이 전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문득 언제부터인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얼굴을 마주하는 가까운 사람들부터 대화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편하고도 눈을 마주보며 대화한 적이 극히 드물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존재가 내 삶에 크게 각인된 이유이기도 했다. 
오래전, 한 때 내가 좋아했던 노래 중에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좋아”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그 노래가사가 생각이 났다. 그는 내 마음속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와 만남의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차 마음이 차분해졌다. 남편에게는 학원에서 회식이 있어 늦는다고 미리 말을 하고, 학원에서는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간다며 일찍 퇴근을 했다. 모처럼 나만의 합법적인 시간이 너무도 새삼스러우면서도 자유롭게 느껴졌다.
만나기로 한 신촌의 카페에는 약속시간보다 약 10분 일찍 들어섰다. 난 투명한 유리 사이로 거리풍경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 안은 생각보다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모던한 실내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서빙을 하는 젊은 아가씨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조금 있다가 주문할게요.”
“네, 그러세요. 그런데 붉은 색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리시네요.” 
그녀의 말에 난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비록 그와 처음 만나지만 만남이 전혀 어색할 것 같지가 않아 마음이 편안했다.
귀에 익은 듯한 팝송 몇 곡이 울려 퍼지자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중 Moon river란 노래는 대학교 영문학과에 갓 들어간 신입생이던 내게 당시 선배이자 지금의 남편이 곧잘 들려주던 노래였다.
Moon river, wider then a mile ~.
청순한 이미지의 세계적 배우인 오드리 헵번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의 주제곡인 이 노래를 부르며 그 때 남편은 내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고, 난 점차 마음을 빼앗겼다.

달빛이 흐르는 강, 엄청 넓어요.
언젠가 난 당신의 모습을 외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 오랫동안 사랑했지만 나의 꿈을 부셔버린 사람
나는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당신을 따라 가겠습니다.
세상의 밖에 존재하는 두 표류자.
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는 무지개의 양쪽 끝에 있습니다.
나의 허클베리 친구가 무지개 저쪽 끝에 있습니다.
달빛이 흐르는 강, 그리고 나~.

한편의 시와 같아 오랫동안 가사를 외우고 음미했던 이 노래를 듣자 문득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남편에 대한 옛 감정이 불현듯 솟구치며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 옛날 내게 사랑을 고백하던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달빛이 흐르는 강가 한복판에서 내가 찾는 무지개 사랑은 어떤 것일까? 나의 허클베리 친구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갑자기 마음이 복잡했다. 우연히 들은 노래 한 곡에 순식간에 감정이 엉클어져 버렸다. 누군가 “과거 사랑을 했던 흔적이 조금이나마 가슴에 남아 있다면 지금의 결혼은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랬다. 남편은 내게 처음으로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퇴색되어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난 망설였다. 새로운 사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난다면 모든 것이 처음 그대로가 될 것이었다. 그동안의 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기억 한구석에서 점차 사라질 뿐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인생의 한 부분처럼…
시간이 없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살폈다.
그 때였다. 카페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나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그였다. 그는 내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난 감전이 된 듯 자리에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아, 나는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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