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행정부가 '북한위협론'에 집착해온 이유
부시 행정부가 '북한위협론'에 집착해온 이유
  • 정욱식대표
  • 승인 2005.02.2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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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하] MD와 '북한위협론'의 질긴 악연

"미 네오콘은 한반도 갈등 상황이 오래 갈수록 미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미국은 남북관계가 호전될 때마다 절묘하게 북핵 의혹을 제기했다."(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2005년 1월 24일 북한대학원대학교 강연에서)

"의회와 전문가 그룹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과 하는 거래가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구축의 명분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북미 정상회담에 반대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2003년 9월 출간한 회고록 '마담 세크러테리(Madam Secretary)'에서)

한국과 미국의 전직 고위관리가 토로한 위의 두 발언은 한반도 평화와 미국 강경파의 구상이 얼마나 큰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세현 전 장관은 남북관계가 풀릴만하면 미국이 '북핵'을 들고나와 제동을 걸었던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북미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었던 시점에 미국의 강경파가 '북한위협론'을 보존하고자 제동을 걸었던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낸 것이다.

4년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올스톱'시켰던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2기 부시의 대북정책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2기 부시의 정책을 전망하기에 앞서 필요한 일이 있다. 바로 1기 부시, 아니 탈냉전 이후 미국 강경파의 의도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일이다.

부시가 제네바 합의를 싫어한 '뿌리 깊은' 이유

김대중 정부는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을 불과 13일 앞두고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었다고 발표했다. 충격적인 이 발표는 분단이후 첫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환희보다는 '총선용'이라는 비난을 가져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정상회담 발표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된 직후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언론들은 "북한은 정말 위협적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면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최대의 명분으로 삼아 추진되었던 NMD에 직격탄을 날렸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NMD를 추진했던 클린턴 행정부로서는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만난 것이다.

'스타워즈'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레이건 행정부의 '전략방위구상(SDI)'이 약 1천억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날리고 레이건이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미국의 MD 구상도 냉전과 함께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는 미국의 승리 못지 않게 위기도 가져왔다. 냉전 시대의 최대 수혜 세력인 군산복합체가 '적'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냉전의 해체로 생존의 기로에 선 군산복합체들과 이들과 결탁된 공화당 및 안보전문가들은 새로운 적들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북한, 이라크, 이란 등 7개국들을 '깡패국가'(rogue state)로 부르면서 미국은 이들 위협에 맞서기 위해 군비증강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운영유지비를 포함해 약 1조달러가 투입되는 MD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하고 이 구상을 재가동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쳐나갔다.

이와 같이 새로운 위협을 찾아 나서는데 혈안이 된 강경파들에게 북미 제네바 합의 체결이 반가운 소식일리 없었다. 이들은 1994년 10월 21일 체결된 제네바 합의를 "미국이 북한의 협박에 굴복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클린턴 행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특히 그 해 11월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하자 한편으로는 제네바 합의를 무력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MD를 되살리고자 했다. 제네바 합의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불만이 '뿌리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공화당의 정치 공세에 직면한 클린턴 행정부는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는 추진하면서도 사업 규모가 이보다 훨씬 큰 NMD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을 미사일로 공격할 나라가 있는 것인지, 괜히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해 새로운 군비경쟁을 야기하는 것은 아닌지,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만큼 어렵다는 미사일 요격이 과연 가능한 것이기는 한 지, 돈 쓸 곳도 많은데 수천억달러를 이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이러한 문제로 갈팔질팡하던 NMD 구상은 1998년 8월 들어 두 가지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을 만났다. 하나는 미국 정보기관이 '텅빈 동굴'을 '비밀 지하 핵시설'을 우기면서 등장한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리면 망할 것 같았던 북한이 건재함을 과시하듯 3단계 로켓체(광명성 1호)를 쏟아 올린 것이다. NMD파들로서는 그야말로 '광명'을 만난 것이다.

북한의 로켓체 발사 약 한달 전에 '탄도미사일 위협 보고서'를 작성한 도날드 럼스펠드(현 국방장관)는 '내 말이 맞잖아'하면서 무릎을 쳤고, 공화당 주도의 미 의회는 "가능한 빨리 NMD를 구축하라"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3+3 계획'을 발표해 3년간의 시험평가를 통해 3년간 초기 NMD를 실전배치 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제 NMD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듯 했다.

2000년 6월의 '충격'

그러나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다'는 한반도 정세는 NMD가 탄탄대로를 걷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NMD의 가장 큰 명분, 즉 '북한위협론'의 설자리가 좁아진 것이다.

도전과 기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클린턴은 페리프로세스에 바탕을 둔 대북포용정책에 본격 시동을 걸었고, NMD 구축 여부는 차기 정권으로 넘겨버렸다. 남북정상회담 3개월 후, 그리고 미국 대선을 2개월 앞둔 9월달 발표된 내용이다. 클린턴이 NMD를 취소하지 않고 유보한 것은 대선을 앞두고 이를 취소하면 부시 진영으로부터 안보 공세에 직면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쨌든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촉진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미국 매파의 오랜 꿈인 NMD를 '일단' 요격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대선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 확실했던 NMD 문제는 클린턴 대통령의 '유보'라는 모호한 발표를 통해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되었다.

그러나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 내 강경파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눈앞에 다가온 '스타워즈'의 꿈을 클린턴의 평양행 비행기와 함께 날려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강경파들은 부시의 당선을 계기로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고, 클린턴의 방북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ABC(Anything But Clinton)'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사실상 전면 폐기했다.

부시의 '북한위협론' 집착

부시 행정부가 핵문제 해결을 비롯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꺼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MD 명분 강화'를 들면 이를 '음모론'으로 일축하는 경향이 있지만, 부시 행정부가 출범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출범하자마자 부시 행정부가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도 언급한 "대북 협상의 유망한 요소"를 완전 무시하고, 북한위협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MD 구축을 선언한 것이었다. 또한 2001년 3월 DJ의 방미를 앞두고서는 한국이 MD 참여를 약속하고 오면 한미정상회담은 분위기가 좋을 것이라며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깡패국가들의 미사일 위협에 대비한다"며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여객기'를 이용한 공격을 당하면서 MD 구상은 위기에 직면하는 듯 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대량살상무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9.11 테러를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극대화하는데 활용했고, 가장 큰 근거를 북한으로 들면서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다.

2002년 10월 이른바 '북핵 파문'이 불거진 이후에 부시 행정부는 이를 MD 강화 및 동맹국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근거로 적극 활용해왔다. "동맹의 현대화"를 앞세워 노무현 정부에게 MD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한편, 2003년 8월부터는 패트리어트 최신형인 PAC-3를 남한에 배치해 수원-오산·평택-군산-광주를 잇는 서부 MD 벨트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의 MD 정책도 미국과의 공동연구개발에서 PAC-3와 이지스함에 장착할 수 있는 스탠다드미사일-3(SM-3) 등 미국제 무기를 직구매해 2007년까지 배치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호주도 MD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핵'을 앞세워 동맹국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자국의 무기를 대거 판매키로 함으로써 짭짤한 수입까지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할 부시 행정부가 아니었다. 실전배치에 들어간 PAC-3나 탄도미사일 궤도를 추적할 수 있는 이지스함으로는 미국 본토를 방어할 수 없고, 이에 따라 미국 국민에게 미치는 정치적 효과도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2004년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요격이 가능하다는 지상요격체제(GMD)를 시험평가도 거치지 않고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 배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펜타곤이 2004년 대선을 앞두고 2000년 부시 후보의 MD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바보같이 돌진하고 있다"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MD와 한반도 평화, 양립할 수 없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의 MD 구상에 있어서, 북한이 단순히 '명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는 점이다. 미국은 북한을 최우선적인 무력화의 대상으로도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부시 독트린에 북한을 포함시킨 것과도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흔히 MD에 대해 "북한을 구실로 삼아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라고 평가하는데 신중해져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미국의 계획대로 MD가 진행되면,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전력을 적지 않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군사적인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선제공격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 전력을 상당 부분 파괴시키려는 선제공격 전략으로 뒷받침되기도 한다. 미국의 MD 전략의 요체는 '사후' 방어보다는 공격작전을 통해 미사일이 발사되기 전에 파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MD의 위험성은 MD만 봐서는 잘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주한미군의 변형(USFK transformation)'과 함께 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변형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첫째 장비 현대화와 새로운 작전개념 실행을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둘째 전력구조를 최적화하기 위해 역할과 임무를 정하며, 셋째 지속적인 주둔을 위해 기지와 병력을 재배치한다는 것이다.

2007-8년쯤이면 대부분 마무리될 이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면, 미국은 정보력과 공격력은 대폭 강화한 반면에,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피해는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주한미군이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북한의 대미 억제력은 사실상 미사일만 달랑 남게 된다. 북한의 핵보유 선언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이 공세적인 성격의 주한미군 변형이나 MD를 차질없이 추진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계속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한미 양측 모두에서 제기된 '주한미군 감축·철수론'과 'NMD 계획 차질'을 똑똑히 목도한 미국의 매파들이 이러한 상황을 재연시킬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변형과 MD 구축이 상당 부분 진행된 이후에 초래될 수 있는 한반도의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북미간의 적대 관계 해소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러나 북미관계가 좋아지면 주한미군 변형과 MD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점에서 적어도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의 핵카드를 비롯한 군사주의 노선도, 남한의 군사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자주국방 비전과 한미동맹 재조정도 위와 같은 '미래의 불안'을 해소하는데 올바른 대응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남북한의 상호배제적인 국가전략은 거꾸로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를 강화시키면서 한반도를 더욱 불확실한 위협으로 내모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남북한 모두 '국가'를 넘어선 '민족' 차원의 전략 수립이 절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 주도의 한반도 정세 틀에서 벗어나 남북한 중심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복원·발전시키는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해온 탈냉전 15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정욱식/2005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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