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께 드리는 공개 편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께 드리는 공개 편지
  • 정욱식대표
  • 승인 2005.03.10 1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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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평화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정욱식이라고 합니다.

지난 6년간 평화운동을 해온 저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을 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이 일에 소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김 위원장께서 택하고 있는 대미 전략에 큰 결함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시 행정부 출범이후 북측이 취해온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北이 오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선반도의 핵문제"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산물이고, 최소한 북측의 핵 포기가  미국의 적대정책의 철회와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북측의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출범 전부터 공화당 진영, 특히 네오콘들의 대북정책을 나름대로 관찰해온 결과 지금과 같은 北의 대미 전략으로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측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 정보를 왜곡하면서 이라크 침공을 강행했습니다. 또한 유럽연합과 이란 사이의 핵 협상이 진전을 이루자 이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면서 이란의 인권, 정치체제를 집중적으로 문제삼고 있습니다. 또한 북에 대해서도 최근 인권과 정치체제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면서 생화학무기, 미사일, 재래식 군사력, 경제 문제 등이 전반적으로 해결되기 이전에 관계 정상화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핵문제'를 빌미로 삼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국가들의 정권을 축출하는데 본질적인 의도가 있다는 의구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저는 북측이 최근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조건부이긴 합니다만 6자회담 불참 입장을 밝힌 것은 이와 같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내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北은 양면 전략을 취해왔습니다. '핵 시위'를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를 압박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협상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대미 억제력의 확보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두 가지 전략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北의 핵무장'과 부시 행정부의 득실관계

먼저 핵 시위의 강화가 협상용으로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부시 행정부가 북의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북의 핵무장은 미국이 주도해온 핵비확산체제에 파열음을 내는 것으로 분명 미국에게도 심각한 도전이자 외교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또한 클린턴 행정부 때의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다릅니다. 북의 핵무장에 따른 부정적인 여파를 통제할 수 있다면, 당분간 '악의적인 무시'로 일관하면서 북의 핵무장을 군사 패권주의를 강화하는데 활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듯이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체제(MD) 등 군사패권주의를 추구하는데 '北위협론'을 최대 구실로 활용해왔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정치적 탈출구를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北이 1990년대 초반에 이미 1∼2개의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며 비판의 예봉을 피해왔던 것입니다. 또한 6자회담을 통해 외교적인 해결을 시도해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이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부각시켜왔습니다. 즉, 부시 행정부는 北의 핵무장 책임을 클린턴 행정부와 北에 전가시킴으로써 책임 회피를 해온 것입니다.

또한 부시 진영은 北이 핵무장을 하더라도 그 파장을 줄일 수 있다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는 판단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北이 핵 물질과 기술을 외부로 이전하는 것을 '금지선'(red line)으로 설정해 이를 봉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론을 억제할 수 있다면 부시 행정부로서는 실보다 득이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北의 핵무장에 따라 한국과 일본 내에서 제기될 수 있는 핵무장론은 핵우산을 포함한 안보공약의 강화를 통해 '당분간' 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거꾸로 한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높임으로써 21세기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해온 동맹의 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北의 핵무장은 최근 차질을 빚고 있는 최첨단 무기체계 개발 및 보유에 더없이 좋은 명분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른바 "깡패국가"들에게는 억제력이 통하지 않는다며 선제공격을 공식 채택한 상황이고, 이를 뒷받침하고 위해 MD 구축 및 지하시설 파괴용 소형 핵탄두 개발을 추진해왔습니다.

그러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요격용 지상배치 MD는 작년 12월과 올해 2월 잇따른 실험 실패로 위기를 맞고 있고, 소형 핵탄두 개발 예산은 미국 의회에 의해 전액 삭감되었습니다. 北의 핵무장은 이와 같이 위기에 처한 무기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은 요인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부시 행정부는 北의 핵무장을 北의 붕괴나 정권교체를 유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부시 행정부 내부에는 北과의 평화공존보다는 "할 수 있다면 북을 붕괴시키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北의 핵무장은 "기회가 왔다"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핵 억제력'으로 안전해질 수 없어

이처럼 핵 시위를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부시 행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담판을 짓는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핵비확산을 최우선적인 외교정책으로 삼은 바 있는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는 근본적으로 '위협'을 필요로 하는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부시 행정부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北이 공언해온 것처럼 "핵 억제력"을 포함한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으로 부시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방법은 北이 함정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부시 행정부는 北의 핵 시위 강화에 대해서는 '악의적인 무시'를 하면서 이를 구실로 삼아 중장기적으로 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을 차곡차곡 준비해나갈 것입니다.

우선 당분간 부시 행정부는 "북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선제공격 전략을 문제삼으면서 "핵 억제력" 강화를 공언하고 있는 北의 주장에 김빼기를 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대북 억제력" 강화를 명분으로 한반도 안팎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수시로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北의 군사력 소진과 내부 동요를 유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6자회담의 복귀를 촉구하면서 회담에 복귀하지 않는 北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상황 악화의 책임을 北에 돌리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北의 인권문제를 지속적으로 문제삼으면서 대북적대정책을 정당화시키고 인권법 등을 통해 대량 탈북을 계속 유도할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가 앞으로 北의 경제적 취약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北의 외화수입원을 차단한다는 목표 하에 다양한 제재와 봉쇄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제재에 돌입한 일본에 이어 남한과 중국 등도 대북 제재 노선에 동참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北의 핵무장은 미국이 北의 경제적 취약성을 공격하는데 고삐를 당겨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정일 위원장께서는 핵무장을 통해 北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더라도 군사적 억제력 확보에는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대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핵무기 보유가 실질적인 대미 억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핵무기를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소형 핵탄두 제조 기술의 확보 ▲상대방의 선제공격에 의해 핵무기가 파괴되어도 보복공격을 할 수 있는 '여분의' 핵무기 확보 ▲상대방의 선제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보 즉시 발사' 태세 확보 ▲상대방의 동향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력의 확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과 첨단 기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요구됩니다. 또한 北은 영토가 작기 때문에 핵무기의 분산 배치가 어렵고, 지하시설 깊숙이 은폐시킬 경우 신속한 대응 공격이 어려워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마땅한 대미 억제력이 없는, 특히 주한미군 재배치로 北의 야포 전력이 무력화될 상황에 처한 北은 일단 '몇 개'라도 핵무기를 보유하면 미국의 선제공격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핵군비경쟁의 본질을 볼 때 이는 결코 현실적인 인식이 아닙니다.

군사적으로 적대 국가인 北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한-미-일 삼각체제는 북한의 핵무기고(庫)를 최우선적인 파괴 대상으로 삼을 것이고, 이에 불안을 느낀 北은 핵무기와 미사일의 양을 늘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北이 스스로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의 핵무기 보유는 핵무장 자체가 갖고 있는 안보 딜레마의 속성과 북한의 경제력 및 기술력, 그리고 한-미-일의 군사력을 종합해볼 때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군비경쟁의 늪에 빠지면 그 결과는 자명해질 것입니다. 미국에 의해서든 北에 의해서든 한반도는 끊임없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北은 첨예한 군비경쟁과 경제난의 '악순환' 속에서 체제 붕괴의 위험성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스타워즈'를 통해 소련을 붕괴시켰다고 믿고 있는 미국 매파들의 노림수도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저는 김 위원장께서도 핵무장이 결코 북의 안보적·경제적 우려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동시에 적대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김 위원장께서 인정하셔야 할 것은 부시 행정부를 상대로 최선을 기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최악을 피하고 차선을 추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최악을 피하고 차선을 추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북이 '피(被) 포위의식'에서 벗어나 기존의 대외정책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발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는 6자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해 협상과 타협을 누가 거부하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핵 억제력'보다 '정치적 억제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비교우위'의 관점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6자회담, 北이 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먼저 북은 6자회담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6자회담과 관련해 미국이 북과의 직접 협상을 회피하고 시간 끌기와 명분 축적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이 6자회담에 적극 참여해 문제 해결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노력이 회담에 불참하는 것보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북이 6자회담 조건부 불참 카드를 가지고 미국의 정책 변화를 꾀하는 것은 실효가 없는 반면에, 미국에게 적대정책의 명분을 강화시켜주면서 다양한 수단의 대북 압박 및 제재를 강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6자회담에 불참하게 되면 오히려 미국의 시간 끌기와 명분 축적이 더욱 용이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북이 6자회담 장(場)에 나와 자신의 제안과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면서 미국의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한계란 3차례의 6자회담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4차 회담에서도 미국의 정책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회담 불참보다 장점은 있습니다. 북이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밝히면서 기존의 제안보다 유연한 입장을 보여주는데 미국이 계속 적대정책으로 일관한다면, 상황 악화 및 문제 해결 지연의 책임이 미국에게 있다는 것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과 러시아는 북의 핵포기와 "합리적인 우려 사항들"이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북이 회담 참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여줄수록 북이 아니라 미국이 국제적으로 압박을 받는 구도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 안팎에서 부시 행정부의 자세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입니다. 이는 회담에 불참하는 것보다 회담에 참가해 북의 주장과 논리를 펴는 것이 미국의 정책 변화를 위한 분위기와 여건 조성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김 위원장께서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최악을 방지하고 차선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혹시 김 위원장께서 6자회담에 참가하는 것이 "핵 억제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잃는 것이라는 판단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앞선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북의 핵무장은 군사적 억제력의 측면에서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반면에, 한반도와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키고 미국의 북폭론과 맞물려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매파들은 북의 핵무장을 '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길 것입니다.

'정치적 억제력'을 추구하시길

저는 북이 '핵 억제력'보다 '정치적 억제력'을 추구하는 것이 확고한 비교우위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정치외교적 맥락에서 북한이 핵무장을 시도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미국의 군사 행동 가능성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추가적인 대북 제재와 봉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이 "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오면, 미국이 대북 제재나 군사 행동의 명분을 찾기는 어려질 뿐만 아니라, 미국 내부와 국제사회의 동의를 확보한다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저는 이를 '정치적 억제력'이라고 부르고자 하며, 북의 전략적 선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북미 갈등의 해결 틀이 6자회담이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미 미국은 이 회담을 통해 북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다자간 안전보장, 경제제재 및 테러지원국 해제 논의 개시, 한국 주도의 중유 제공 용인 등을 해줄 의사가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제안이 '동시 행동'과 '일괄타결'을 요구해온 북의 제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북이 핵문제 해결과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납득할 만한 수준의 조치를 취하면 미국 역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것입니다. 이는 미국이 북에게만 한 약속이 아니라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다른 6자회담 참가국과 국제사회에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의 핵 포기 의사 천명의 상응조치로 다자간 안전보장을 받아내면,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억제력'은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북이 핵 억제력 대신에 정치적 억제력을 선택하는 것은 극심한 경제난, 특히 식량난과 전력난의 완화를 비롯한 경제 회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대남, 대일 관계 개선의 '확실한' 물꼬를 틀 수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이미 남측의 노무현 정부는 핵문제가 해결되는 맥락에서 '포괄적이고 대북지원'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도 임기 내에 북일수교를 완료하겠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습니다.

물론 노무현 정부가 말한 '포괄적 대북지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한국 국내의 정치적 복잡성과 대미 종속성을 고려할 때 이를 담보해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북한으로서는 확신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남북관계의 정상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울러 북일관계 개선에는 핵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인 납치 문제라는 또 하나의 암초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북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는데 일본이 북일평양선언을 비롯한 양국 사이의 합의를 준수하지 않은 것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도 김 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른바 '가짜 유골'을 둘러싸고 비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양국이 전문가 회의를 통해 진위 여부를 검증하자고 제안하시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제 3국의 법의학 학자들의 참여도 가능할 것입니다.  
남북관계 정상화의 중요성

무엇보다도 김 위원장께서는 대승적인 견지에서 당국자 회담의 재개를 비롯한 남북관계의 정상화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남북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쌓아가면서 서로를 배제할수록 외세의 영향력만 키워준다는 것은 불행했던 역사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가장 큰 교훈입니다.

반면에 비록 부시 행정부의 출범으로 그 빛이 바랬지만, 북미관계가 가장 좋을 때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였습니다. 남북이 '평화지향적인 민족공조'에 나설 때, 외세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민족의 도전이자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북측의 입장에서는 남측에 대해 여러 가지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노무현 정부가 한미공조에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대북관계를 홀대한 것이 커다란 실책이었다고 비판해왔습니다.

그러나 대승적인 견지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원화된, 특히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커다란 이견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남측 사회에서 정부나 특정 정당이 대북정책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북관계가 정상화되지 못하면 민족공동체 운명은 타자화(他者化)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고 북을 도우려고 하는 선의(善意)와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럴 때 북에서 호응을 해준다면, 서로의 오해와 불신을 털어 버리고 남북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믿습니다.

저는 김 위원장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시면 큰 도움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김 위원장께서 초청하신다면 핵문제를 비롯한 민족의 장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계십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혜안을 보여주고 계신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김 위원장에게 가장 훌륭한 조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 비교할 수는 없었겠지만, 1994년 6월 김일성 주석께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한반도 정세를 극적으로 반전시켰던 지혜가 또 다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님과 노무현 대통령께 권고해서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정치외교는 '가능성의 예술'

물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북이 한다고 해서 '다른 미래'가 열린다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높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흔히 정치외교를 가리켜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거대한 구조에 맞서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한반도에서의 거대한 구조는 분단과 함께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라는 괴물은 남북이 서로 헐뜯고 무기를 축적해 가는 과정에서 더욱 큰 힘을 갖게 됩니다. 북의 '핵 카드'도 남의 '자주국방'도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양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가 왔다고 믿습니다. 또 다시 대결의 늪에서 한반도의 주민들이 생존의 벼랑끝으로 내몰리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민족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김정일 위원장님의 현명한 선택이 요구됩니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적개심과 노무현 정부에 대한 서운함을 뛰어 넘어, 20세기와는 다른 21세기를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2005년 3월 9일 민족공동체의 새로운 미래를 염원하며
정욱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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