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도 대북 선제 핵공격 정책 유지
클린턴도 대북 선제 핵공격 정책 유지
  • 정욱식대표
  • 승인 2005.03.16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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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1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제네바 합의문 3조 1항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공식 보장을 제공한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거의 같은 시기에 내부적으로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의 영자 신문인 『The Japan Times』의 3월 6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선제 핵무기 사용 정책을 폐기하면 미일동맹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핵 선제공격 정책을 유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클린턴 행정부 1기 때 국방부 차관 특별보좌관을 지낸 스티브 페터의 진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매릴랜드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페터는 탈냉전 이후 미국의 핵 정책을 입안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만약 미국이 핵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 북한은 남한이나 일본을 더 쉽게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을 것"이라며, 이로 인해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을 해줄 것인가의 문제는 당시 "중요한 토론 주제였다"고 밝혔다.

페터는 미국이 대북한 선제 핵공격 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배경도 설명했다. 그는 "독일과 일본과 같은 미국의 핵심적인 동맹국들은 핵 선제공격 정책의 철회를 자신들에 대한 미국 안보공약의 약화로 볼 것이다"며, "우리는 동맹국들에게 그와 같은 신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1994년 당시 토론에 참여했던 자네 놀란 피츠버그 대학 교수 역시 "만약 미국이 핵 선제공격 정책을 거두어들이면, 미국의 전체 핵우산이 침식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토론이 함축하는 바였다"고 회고했다.

결국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 체결 당시부터 북한에 소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입증하듯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 체결 이후에도 북한을 상정한 모의 핵공격 훈련을 계속했다.

북한, 미국의 핵 선제공격 대상에서 빠진 적 없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전쟁을 포함해 북한은 미국의 핵 선제공격에서 빠진 적이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 당시 30여발의 핵폭탄 사용을 추진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적이 재래식 군사력을 동원해 침공할 경우 핵무기로 대량 보복하겠다"는 '대량보복전략'을 채택해 남한에도 본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 카터 행정부는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인 비핵국가들에게는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최초로 약속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그 해부터 유사시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훈련까지 포함된 팀 스피리트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북한이 NPT 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극적 안전보장의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팀 스피리트 훈련은 북한이 NPT에 가입한 1985년 이후 계속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한반도에서의 핵 위협도 사라지는 듯 했다. 1991년 말에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를 철수시켰고,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1993-4년에는 북미간의 위기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94년 10월 제네바 합의가 체결되면서 북한은 핵 개발 동결을, 미국은 소극적 안전보장을 비롯한 정치적·경제적 상응조치를 취하기로 하면서, 북한도 비로소 미국의 핵 선제공격 목록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은 1995년 NPT 검토 및 연장 회의를 앞두고 비핵국가들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원칙을 재차 밝혔고, 유엔 안전보장 의사회는 결의안 984를 통해 미국의 이러한 원칙을 재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클린턴 행정부의 '공약(空約)'임이 밝혀졌다. 2002년 9월 미국의 노틸러스 연구소는 정보자유법에 의해 입수한 미국 정부 문서를 근거로, 미국이 제네바 합의 체결 이후에도 북한을 상정한 모의 핵 공격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문에서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약속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핵 선제공격 정책을 유지하기로 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전부터 미국이 제네바 합의의 중요한 사항을 위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제네바 합의가 미국의 일종의 '기만 전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1995년 NPT 연장 회의를 앞두고 있었던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 저지'에 사활적인 이해가 걸려 있었다. NPT 회원국이 이 조약에서 탈퇴해 핵무장을 한 최초의 사례가 나올 경우, 미국 주도의 NPT 체제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협상이 여유치 않을 때 수만명의 미군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폭을 추진했었다. 카터의 방북 이후 협상의 여지가 커지자 고위급 회담을 재개해 제네바 합의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애초부터 제네바 합의를 준수할 의지가 없었다. NPT를 구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일단 약속은 해주고 "기다리면 북한은 망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합의 사항을 성실히 준수하지 않은 것이다. 

정욱식/2005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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