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한의 핵 물질 수출설' 조작 파문
미 '북한의 핵 물질 수출설' 조작 파문
  • 정욱식대표
  • 승인 2005.03.23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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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체제(MD)의 명분을 잃지 않기 위해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중단시키고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했다.”

“2002년 가을. 남북관계와 북일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에 크게 당황한 부시 행정부는 실체가 불분명한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를 제기해 제2의 북핵 사태를 몰고 왔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본질을 이와 같이 말하면 흔히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일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기를 포함해 5년째에 접어든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설명하는데 음모론만큼이나 설득력 있는 것도 없는 듯하다.

최근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는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또 하나의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음모론이란 “부시 행정부 내 매파들이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 리비아에 핵 물질을 수출했다는 루머를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즈의 2월 2일자 보도로 촉발된 ‘북한의 대(對 ) 리비아 핵 물질 수출설’은 부시 행정부가 90% 이상의 확신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대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북한산(産) 우라늄 샘플도 없이 분석한 결과를 가지고 북한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황당한 일을 벌어졌는가 하면, 부시 행정부가 이와 같은 비과학적인 분석 결과를 한국, 일본, 중국 등에 통보해 대북 압박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부시 행정부 내 매파들이 대북강경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어왔다.

북한이 아니라 파키스탄

워싱턴포스트의 3월 20일자 보도는 이와 같은 관측에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신문은 파키스탄과 리비아 사이의 핵 물질 거래를 상세히 알고 있는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북한이 리비아에 핵 물질을 수출했다는 것은 미국 정보기관이 (행정부에) 보고한 것이 아니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이는 마치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량살상무기 정보를 조작한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대표적으로 이라크가 수입한 고강도 알루미늄의 용도가 포탄 제조용이라는 정보기관의 결론을 백악관이 “원심 분리기 제조용”으로 둔갑시켜 “후세인 정권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고 주장한 사례도 있다.

특히 워싱턴포스트는 리비아에 핵 물질을 수출한 나라는 북한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파키스탄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보도했다. 파키스탄이 북한으로부터 우라늄을 수입해 리비아에 팔았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파키스탄이 ‘테러와의 전쟁’의 핵심 동맹국임을 의식해 파키스탄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그 책임을 북한에게 떠넘기려고 했던 것이다.

약 400만톤의 채굴 가능한 우라늄을 보유한 북한이 파키스탄에 이를 수출했을 가능성은 예전부터 거론되어왔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이를 “북한이 리비아에 핵 물질을 수출했다”는 것으로 둔갑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한·중·일에 통보하고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동참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왜 정보를 조작했나?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이와 같은 ‘음모 정치’는 역풍을 맞았다. 미국의 설명을 들은 한국과 중국이 수긍을 하기는커녕 미국의 의도에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포스트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동아시아 순방 목적은 이와 같은 손상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에 있다”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왜 부시 행정부는 정보 조작을 시도한 것일까? 부시 행정부가 한중일에 ‘조작된’ 정보를 설명한 것은 1월말-2월초였다. 이 때는 2기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과 연두 교서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고, 핵문제 해결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한국과 중국이 동분서주 할 때였다. 부시 행정부는 바로 이와 같은 ‘민감한 시기’에 터무니없는 정보를 건네준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관리들은 한중일에 북한의 핵물질 수출을 설명하기 위한 순방단의 구성은 “한국과 중국이 6자회담에 대해 불만을 보이기 시작한 직후에 급히 조직되었다”고 말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한국과 중국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불만을 나타내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우라늄 수출설’을 내세워 6자회담 틀 안에 묶어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과 중국은 미국의 설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몰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북한이 외무성 성명을 통해 최초로 핵무기 보유 및 6자회담 불참을 선언하고 나왔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잡게 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문제 삼으려고 했던 중국은 거꾸로 미국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북한의 외무성 성명 직후부터 부시 행정부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중국 역할론’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는 파키스탄과 리비아 사이의 핵 물질 거래를 북한과 리비아 사이의 거래로 둔갑시키면서 또 다시 공작 정치를 시도한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2003년 8월까지 부시 행정부 대북담당특사를 지낸 잭 프리처드의 지적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동맹국들이 완전한 그림을 확보하면, 미국의 신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의 정보 정치에 대해서 알수록 동맹국들이 미국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제 국제사회는 적어도 대량살상무기(WMD)와 관련된 부시 행정부의 주장은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할 것 같다. 정보 자체가 불확실한 것도 문제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조작·왜곡해온 사례가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욱식/2005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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