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를 행복으로 삼는 김명호 씨
봉사를 행복으로 삼는 김명호 씨
  • 이재길기자
  • 승인 2005.07.02 12: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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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근무를 끝낸 상태에서 인터뷰에 응한 김명호 씨 


 장마철이다. 신경통을 앓는 이들은 참 괴롭다. 온 몸이 아프다. 의욕도 떨어진다. 김명호 씨(62세)는 신경통을 앓고 있다. 특히 한쪽 다리는 걷기 불편할 정도이다. 기아자동차에 다니던 젊은 시절에 야근 하다가 다친 뒤로 고질병이 되었다. 부인은 당뇨로 인해 몇 년째 병원 살이 하고 있다. 몸도 성하지 않고, 나이도 적지 않은데다가 부인까지 아픈 터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행복으로 삼고 사는 이가 김명호 씨다.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사

 김명호 씨의 고향은 전남 신안. 부모는 가난 속에서도 7남매를 낳았다. 그 시절 대다수 아버지들은 ‘장남’만 자식으로 보였다. 없는 살림에 염전까지 야금야금 팔아 큰 형의 교육비로 투자했다. 형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명호 씨는 그 그늘에 가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다. 현실이 그러함에도 명호 씨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 천 한자를 암송하고, 형의 도움과 독학으로 고교 교과서를 독파해 간다. 주경야독한 배움으로 깨달은 바를 실천하려 개간과 간척사업을 열심히 한다. 때마침,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노래가 울리며, 새마을 운동이 확산된다. 명호 씨는 ‘새농민상’을 받는다. 그간 공로와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허나 배움에 대한 갈증은 지독한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지식욕이 식욕과 성욕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했다. 새마을 운동은 어느새 산업 근대화 과정에 밀려난다. 농어민들은 하나둘 보따리 싸들고 도시로 간다. 김명호 씨도 어느새 4남매를 두었다. 그 자신 배움에 대한 갈증이 너무 강하여 못 배움에 대한 한이 서렸던 터. 자식을 위한 부성은 가시고기 사랑이 아니던가. 주저 없이 도시 행을 결정한다. 1977년의 일이다. 그의 도시 행 보따리는 달랑 이불 두 개였다고 한다. 재산은 모두 형님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후에 형은 땅을 모두 팔아 목포에 빌딩을 세웠는데, 하자가 발생 해 빈손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광명은 저의 제 2의 고향입니다. 여기 산 지도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가네요. 먼 친척이 광명에 살고 계셔서 광명으로 올라 온 것인데, 다행히 소하동에 있는 기아자동차에 바로 입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13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커 가면서 교육비 부담이 너무 커 회사 월급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표내고 퇴직금 받아 시작한 게 양곡상하고 종합 식품업입니다.” 주변의 도움으로 장사는 잘 되었다.  


봉사하는 일에 눈이 열리다

 자식들은 사회로 진출하고, 생활에 여유가 좀 생기면서 이웃의 처지가 눈에 잡히기 시작한다. “모친은 남에게 밥 퍼주는 일을 좋아하셨습니다. 뭐든지 나누어 쓰셨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청량리에서 밥 퍼 주는 일로 유명해진 최일도 목사는 섬김의 영을 강조한다. 육체로 봉사하는 일에는 한계가 금방 드러난다는 것이다. 명호 씨도 예수를 믿게 된다. 그가 배운 예수는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해 오신 분이었다. 깨달음은 실천을 강제한다. 그는 자율순찰대, 방범위원회, 청소년선도위원회와 지도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  하기 시작한다. 소하동은 대부분 그린벨트에 묶인 상황이라 서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청소년 문제가 타 지역에 비해 많이 발생했다. 그런 만큼 청소년선도위원회 활동을 통해, 극빈층 학생을 선발 해 장학금을 주는 일은 가슴이 저미는 행복의 전율을 가져다준다. 현재까지 계속하여 청소년 4명에게 분기별 15만원을 전달한다. 그중 강남대 졸업반인 이진아 양은 “고 3 때부터 편하게 도움을 주셨어요. 늘 관심을 지니고 연락 하셔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격려와 함께 후원도 해주세요” 하면서, 어려운 중에서도 꾸준하게 도와주시는 점을 감사드린다고 말한다. 실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명호 씨는 학생들이 돈을 주는 일보다 관심과 함께 상담 해주는 일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봉사가 있는 곳에 이심전심이 있다.
 그런데 이 시절, 가게를 보던 아내가 쓰러지는 불행이 찾아 왔다. 당뇨병에 걸린 것을 모르고 방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여파로 가게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형이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뒤에 수양관을 운영 중이었는데, 명호 씨는 그곳에서 관리인으로 일하게 된다. 그도 잠시, 얼마 뒤에 형이 수양관을 처분하면서 당장 생계가 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택시 운전대를 잡는다.


택시 운전을 통한 봉사

 운전대를 잡은 지 벌써 7년이 넘었다. 개인택시를 마련해 보려고, 경력을 쌓는 동안 형이 암으로 사망하는 통에 도움도 못 받아 택시운전이 본업이 되었다. 성경에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이 있다. “운전을 하면서 지난날 장애인과 노인들을 지나치던 택시들을 목격한 일이 기억이 났습니다. 몸 불편한 분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소명의식이 점화되면서 직업을 통해 감사드릴 방법이 보인 것이다. 그 뒤로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무료로 이동시킨다. “어떤 때는 하루에 2-3회, 평균 주 3회 꼴로 이분들을 방 앞에까지 모셔다 드립니다. 그런데 버는 돈이 비슷합니다.” 봉사를 경험해 본이라면 누구나 이런 맛을 선물로 받는 경험을 한다. 봉사는 봉사를 낳는 속성이 있다. “운전을 하다보면 상습 정체 구간이 있습니다. 대부분 교통의 흐름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것을 보고 모범 운전자회에 가입했습니다.” 5년째 교통정리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월 6회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이 불편한 것은 뒤로하고, 사납금 충당하기도 벅찬 불황 속에서 가장 황금 시간대에 교통정리하고, 장애우 이송한다고 생각해 보라. 택시 업계도 불황의 그늘이 깊다. 경제가 어렵기 때문인 점은 말할 것 없고, 택시증차 남발, 지하철과 버스의 새벽까지 연장운행, 그리고 대리운전과 성매매 단속 후 손님이 많이 준 것 등의 요인이 크다고 한다. 오토매틱 차량 운전에 따른 연료비 상승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상황이 이러니 사납금 충당하기도 벅찬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 비워야 가능한 게 봉사입니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몸을 나누어 어디가 더 중요하다 할 수 없지만 장애 중에 가장 치명적인 장애를 보통 시력을 잃어버리는 일이라 한다. 그 생각이 든 그는 소하동에 있던 시각장애인 지회를 찾는다. 그때부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발이 된 것도 그에겐 행복이 된다. “그분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서 우리를 훈훈하게 만들어 주는 분이세요.” 한국시각장애인경기도지부 광명지회 회장인 이재승 씨는 흥분해 가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광명엔 약 천 명의 시각장애인이 있는데, 그 중 400명이 지부 회원이라고 한다. 이들의 운영후원회 회장직을 김명호 씨가 맡고 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작년엔 도지사 표창장을 받았다.



▲ 장애인을 이송하는 명호 씨. 하늘색 제복을 입은 이.


희생 없이 봉사 없다

 타인을 위한 섬김의 길엔 뜻하지 않는 희생도 있다. 정작 가까이 있던 부인을 돌보지 못한 점은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고 미안한 일이다. 이웃을 향한 마음만큼만 아내에게 인색하지 않고, 따듯하게 베풀었다면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 때면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또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것도 안타깝다고 한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우선순위가 봉사로 향하는 까닭에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안 보면 잊어진다. 한때는 가족들도 명호 씨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고 한다. “자식들이 용돈을 주곤 했는데, 그 쓰임이 불분명하다 보니 오해도 샀어요. 시민대상 후보로 두 번 오르면서 그제야 자녀들도 존경하는 반응을 보입디다. 가까운 가족에게 존경 받는다는 그게 가장 뿌듯했습니다.”
 김명호 씨는 현재 광명시장애인연합회 자문위원이다. 또 국민연대 환경지회 회원으로도 활동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일에도 열심을 내고 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남선교회를 통해 독거노인을 돕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극빈학생 두 명에게 매월 오만 원씩 후원하고 있다.


인생 최고 행복은 봉사
 
 그도 우리네 평범한 아버지이다. 아들 결혼 걱정하고, 방이라도 얻어주는 소박한 꿈을 지니고 있다. 자녀는 딸-아들-딸-아들 순으로 멋있게 낳아 길렀는데, 두 딸과 장남은 결혼했다. 장남과 며느리는 명호 씨와 같이 살고 있다. 신혼인 아들 내외를 위해 오래되고 낡은 빌라 집을 수리하였다. 큰 아들에게 방을 얻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는 지금 둘째아들 결혼 걱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봉사하는 일에 더 가 있어 보인다. “주변에 불우이웃이 너무 많아요. 할 수만 있으면 돕고 싶은데, 안타가운 마음만 더 듭니다.” 웬만한 이들이라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봉사만 실천한다 해도 힘들 터인데, 명호 씨의 봉사를 향한 불길은 아직 거세다. 그의 눈은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노리는 눈처럼, 불우이웃에게 향해 있다. 그가 써둔 글에 이런 말이 있다. ‘행복한 삶은 신체 건강, 재력, 학문의 지식이 갖춰진 것이다. 이 보다 더 값진 행복은 봉사를 통해 얻는 행복이다.’ 그의 신념이면서, 그가 봉사를 실천하며 얻은 자신감이 깊게 벤 말 같다.

기자 주> 인터뷰는 2005년 6월30일 오전에 김명호 씨 집에서 한 것이다. 그리고 독자 분들 주변에 소개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연락해 주십시오. 연락처 T. 018-238-1873.

2005. 7. 2  /  이재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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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란 2005-07-06 08:45:55
돈이 있어야 남을 베풀지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더 구두쇠라는것을 알았지요.. 반대로 돈이 없어도 봉사할 수 있는거야 라고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렇게 힘든데 라고 체념하며 우선순위를 내 배고픔에 두게 되더라구여.. 남을위해 산다는 것은 그래서 진정한 마음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한 자가 되도록 이끄심이 있어야 선한일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이모저모로 힘든가운데에서도 기꺼이 주고 또주는 이웃사랑 너무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지니 2005-07-04 16:27:56
어려울때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그것을 실천하기가 더욱 어렵지요. 항상 힘내시고 주변을 돌아

응원하는 저희들을 바라보시고 오래 오래 건강한 생활지켜나가

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