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관광]개성을 다녀와서
[개성관광]개성을 다녀와서
  • 홍기, 성현국
  • 승인 2005.10.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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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지만 그간의 반목과 대결의 상징이었던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의 도시를  관광한다는 것이 왜 아니 설레겠는가!

전날의 중요했던 모임도 1차로 끝내고 2차는 불참하는 파격을 감행했음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집결지 약속장소인 경복궁 주차장에 도착하여보니, 6시에 출발할 때까지 40~50분이나 여유가 있는 것이 부족한 잠 때문인지 억울한 생각이 든다.

지금 나와 함께 송도삼절 중 하나인 박연폭포와 황 진이를 보러간다고 흥분하고, 설쳐대던  성 현국이사 는 어제 밤늦게까지 마신 술 탓 때문인지 아직도 오지 않아 함께 출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웬걸 출발과 동시에 울려대는 휴대폰 속에 “형님! 난 임진각으로 갈 테니 그  곳에서 만납시다.”한다. 왠 임진각? 그렇지.....   임진각에서 픽업하여 8시 정각에 우린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렇게 쉬이 넘나들 수 있는 일이 그간 왜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아직도 남쪽의 대성동 마을과 북측의 평화의 마을엔 세계에서 가장 큰 태극기와 인공기(가로30m, 세로 25m)가  펄럭이고는  있으나 (펄럭이는 모습이 곧 사라지게 될 분단과 대결의 잔영을 보고 있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비무장지대 안은 50여 년 동안 제대로 보존된 지역이기에 당연히 논밭이었던 곳도 갈대만 무성하고 작은 습지들이  생태계보전에 큰 기여를 하는 듯하다. 훗날 통일이 되어도 이곳은 역사의 유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드물게 잘 보존된 자연환경인 까닭에 거대한 생태 자연박물관으로 하여 계속 보존될 수 있도록 하자는데 누가 반대 할 것인가?!!

비무장지대를 경계로 하여 남북이 확연히 다른 것은 북한 쪽의 산은 대체로 벌거숭이 민둥산이요 남한 쪽의 산은 삼림이 울창한 것이 너무나 대비되었다.  간혹 보이는 나무는 잣을 채취하기 위하여 남겨놓은 잣나무로서 그 덕에 속옷은 걸치고 있어 나체쇼는 면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에너지 사정을 웅변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할 틈도 없이 북측 CIQ지역으로  들어와 또 검문, 약간은 경직된 북한군 소좌 등 2명이 버스에 탑승 인원검문을 실시한 후  호명에 따라  1명씩 하차한 후 생글생글 인상 좋은 여군의 안내로 북측의 CIQ를 통과하였다. CIQ후면에 설치된 매대에서 엄선된(?) 북측의 자연 미인들이 진열된 상품의 판촉활동을 열성적으로 한다. 귀로엔 복잡하니 서둘러 사두란다.

하차와 승차를 반복한 후 우리를 실은 버스가 9시 정각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가 있는 시범공단을 통과할 즈음 북측의 공단근무자들이 4~5열종대로 질서정연하게 출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의 그 옛날  “재건합시다”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시범 개성공단은 13개 업체가 입주 4개 회사가 가동 중이며, 여타 기업은 아직 건설 중이다.

이 길을 통하여 육로로 평양을 다녀왔고, 두세 번 이곳 개성공단을 다녀왔다는 성이사의 설명과 공단조성으로 산이 없어지고, 비포장도로가 포장됐다는 설명에 옆 좌석 앞, 뒷좌석 등 함께 동행 한 개성 실향민들은 아이가 돼 버린 듯 경청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1·4후퇴때 사흘만 내려갔다 오겠다며 짐을 싸들고 나간 지 54년 여 만에 귀향의 소원을 풀었다하고, 또 누군가는 친구 집 에서 며칠 놀다가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이 되고 등등,,,,,,

타이밍 맞춰 성현국 이사가 암송한 타고르의 시 “당신이 얼마나 먼 곳으로 가든지 너와 내 마음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황혼이 되면 나무 그림자가 얼마나 크든지 너와 내가 나무뿌리는 언제나 연결돼 있다.”라는 시 구절이 대변하는 듯하였다. 이 노 실향민들이 온다는 것을 하늘도 알았는지  따사로운 햇볕으로 이들을 감싸 안아 맞이하는 듯 했다

오전관광은 개성시내를 통과하여 버스로 30분 정도 달린 후 영통사에서 시작하였다. 영통사는 고려11대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출가한 이후 35년간 불경공부를 하며 한국천태종을 창시했던 장소로 천태종의 성지이기도하다. 사찰 건물은 조선시대에 불에 탄 것으로 추정되며, 영통사 대각국사 비, 영통사 당간지주, 영통사 동삼층석탑 등 돌로 된 국보급 문화재들만 남아있었다.

북측에서는 지난 1998년부터 영통사 조사 발굴 작업을 실시했으며 18,200평의 부지에 사찰, 동북무덤, 서북건축지구 등의 구역으로 나누어 기초 복원공사를 하던 중 남한의 천태종 교단에서 2003년 10월부터 새로 40여만 장의 기와와 단청재료, 주변 성지순례 도로공사 장비 등을 총 15차례에 걸쳐. 자금을 지원하여 복구한 것이란다. 사찰의 하드웨어만 제 모습을 보이고 절을 찾는 신도도 수도하는 스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부처님께 3배하고 남북의 공동번영과 평화를 빌고 조속한 통일을 염원하였다.

무엇인가 알아야 하는 성이사의 성격에 남한의 단청에는 12간지와 용마루 용상 등,,, 사찰 이곳저곳을 남측사찰과 비교하며 북측 지도원들한테 설명을 요구했지만 그들도 처음 와 본 곳 이라는 답변과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 현지관광가이드도 없고 현대아산 측의 직원도 관광 안내할 정도의 지식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아 무척 실망하였다.

영통사 사찰경내에 임시 설치된 매대에서 북측의 윤 경수 화가가 그린  미인도 유화를 팔고 있었는데 매대에서 일하는 차진옥이라는 명찰을 단 아가씨가 그림 속의 실제 모델이었다. (괜히 흥분하여 사진 한 장씩 찍었다.)





영통사를 뒤로 접고  돌아오는 길에 왼쪽 산중턱에 걸려있는 커다란 바위를 보고 성 이사가 인공적으로 올려놓은 듯 하다고 하니, 원래가 개성이 고향인 할아버지 관광객의 말씀이 그 바위가 55년 전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있었다고 하신다.  

개성시내에서 영통사사이의 도로를 구역별로 나누어 관리를 하는지 구역별 담당표시 팻말이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점심시간. 식사장소는 통일관,  정갈한 개성식 11첩 반상으로 차려진 오찬에 남측 사람들은 또 한 번 감동했다. 11가지 반찬이 놋쇠그릇에 정갈하게 담겨진 조선시대의 임금님이 드시던 밥상이란다.  한 테이블에 동석한 실향민들이 사양하는 바람에 성 이사와 아마 각 1병씩의 개성 소주를 마신 듯하였다. 일부는 감회에 젖어 그리고 예전의 개성이 아니라 너무 초라해졌다는 속마음으로 인하여 식사를 통 못하시는 모습이었으나 성 이사와 난 정말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식당에서 일하는 북측의 안내원과 접대원이 어떻게 다르냐?“는 우리의 물음에 동일하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아마도 개성자체와 평양에서 온 관리자들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또한  여성 안내원은 “개성공단이 들어서고 이곳 통일관 식당에 남측인사들이 많이 찾아옵네다. 이것이 통일로 가는 길 아니겠습네까”라고 뿌듯해했다.

식후에 통일관 식당 옆에 있는 남대문을 버스로 돌아 개성시내를 지난 우리 관광단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공부하였다는 숭양서원을 거쳐 선죽교를 찾았다. 선죽교의 원래 다리는 보존을 위해 돌기둥으로 위와 옆을 막아 놓았다.
선죽교는 길이 6.67m, 폭 2.54m의 자그마한 돌다리로 처음에는 선지교라 불렸지만 주위에 충절을 의미하는 대나무가 자라면서 후에 이름이 선죽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도 정몽주의 핏자국이라는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으나 아마도 돌에서 나온 철의 성분이 아닌지..... 선죽교 건너에 정몽주의 충절비가 커다란 거북등위에 세워져 있었다.

혁명을 주장하는 곳에서 구체제의 낡은  왕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것을 충절로 기리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로 생각되었다.

우린 다음 관광지인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는 성균관으로 갔다. 지금은 건물 일부가 고려시대 유물 1천여 점이 소장된 고려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지만, 옛 모습 그대로라며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개성 고려중학교를 나와 6·25전쟁이 나기 전 남측으로 내려온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와보고 이번이 두 번째”라면서 “내 키 만하던 나무가 훌쩍 커버린 걸 보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균관
북측문화재 사적 제50호.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고려시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1592년) 현재 건물은 1602~1610년에 지은 것으로 12동의 기본건물과 6동의 부속건물에 70,000㎡의 부지가 있으며 돌담장으로 둘러친 장대한 규모이다. 성균관은 크게 명륜당과 대성전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명륜당은 강의실이고 대성전은 유학자와 선현들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고려박물관
고려시기의 역사와 경제, 과학문화의 발전모습을 보여주는 1,000여 점의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는 박물관. 고려성균관의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동무, 서무, 계성사, 존경각, 향실 등 18동에 해당하는 건물들과 그 주변에 역사 유물들을 진열해 야외 전시를 겸한 특색 있는 박물관으로 꾸려지게 됐다. 고려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자료와 고려시기 금속공예, 건축, 조각, 회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관광 후 무슨 선물을 하나 살까 고민하던 중 성 현국이사 왈 “형님 이곳 소설책을 사봐 진짜재미 있어.” 한다, 그래?  우린 박물관 매대에서 하나에 5불(평양가격) 하던 개성역사책을 3불씩 한다기에 성이사의 아이디어로 둘에 5불 하자고 실험적으로 흥정을 하였더니 놀랍게도 흥정이 성사되어 북한지역에서 물건 값을 깎아보는 경험을 하였다. 매대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서로가 자기물건을 사주기를 바라는 것이 판매실적에 따른 인센티브가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전체적으로 영통사를 제외한 관광유적지가 걸어서 30분 이내면 족할 거리에 있었으며 시범관광이라지만 관광유적지에 대한 역사지식을 설명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으며, 버스를 타고 지나는 개성시내가 남한의 작은 시골 읍내를 지나는 듯하여 개성직할시라는 이름을 무색케 할 뿐만 아니라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개성이 고향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예전의 개성이 아니라 너무 초라하다며 속상해 하셨다.)

관광유적지를 북한 주민들은 아무도 찾지 않고 ( 버스가 지나는 곳곳에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주민들의 출입을 통제하였을 것이다.) 방북관광객들만이 짜여진 시간 계획표대로 움직이다 보니 관광다운 맛은 현저히 감소된 느낌을 받았다.

귀로에 개성공업단지를 지나 북쪽의 CIQ 매대에서 마지막 쇼핑을 하고 군사 분계선을 넘기 위해 미군과의 약속된 시간까지 기다리는데 국경도 이념도 없는 노루 한 마리가 도로가에 까지 나와서 우리 시범관광단을 배웅하고 있었다. 

2005. 10. 10  /  홍기, 성현국(평화네트워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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