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유와 삼백년전 향촌사회의 실마리
권유와 삼백년전 향촌사회의 실마리
  • 양철원
  • 승인 2005.12.12 14: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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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초 서독산 권형묘에서 바라본 일직동 모습

경부고속철도 광명역을 바라보는 서독산 자락 아래 마을은 양지편이라고 한다. 이 곳은 몇 해전만 하더라도 길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으나 광명역 진입로를 만들면서 이제는 큰길가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에 뒷산을 올라가면 옛 묘가 여럿 보인다.

묘역은 일찍이 이 지역에 세거하던 안동 권씨의 것이다. 산중턱을 따라 조성된 묘역은 가지런한 문인석과 상석 등의 호위를 받으며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모셔져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권형이다. 
권형(權詗, 541-1605)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1558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시에는 선조를 호종하여 행재소로 향하였다. 훗날에는 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권형은 효성이 지극하고 우정이 돈독한 것으로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사후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이 묘를 지나 광명 최남단 안서초등학교 옆 군부대안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의 묘소가 있다.
오래전부터 군부대가 자리 잡은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통제 지역에 있는 이 묘소는 권형의 현손인 권유(權愈, 1633-1704)의 묘가 있다.



▲ 권유 영정

권유는 조선 후기인 현종, 숙종조에 활약하던 인물로 소위 “남인 최후의 대제학, 문형(文衡)”으로 불리던 이이다. 숙종조는 당쟁의 격화로 남인과 서인간의 정권교체가 숨가쁘게 일어나던 시기이다.
1675년(숙종 1년) 갑인환국이 단행되어 인조반정이후 40여 년간 집권을 해오던 서인세력은 일시에 물러나고 남인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로 인해 허적, 허목, 윤휴, 권대운, 민암, 오시수, 이하진등의 남인이 대거 등용되었다. 권유는 1665년에 문과 급제후 여러 벼슬을 거쳐 갑인환국 이후인 1675년에는 영남지방의 어사로 파견되었으며 후에 서천군수로 올랐다.

그러나 1680(숙종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은 다시 실각하게 된다. 당시 영의정 허적을 비롯한 우의정 권대운등 남인은 일거에 몰락하게 된다. 권유 또한 서인세력이 집권한 이 시기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0년을 유지해오던 서인정권은 1689년(숙종 15년) 그 유명한 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의 세자 책봉 문제에 반대를 하다 숙종의 미움을 받아 몰락하고 만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다시 물러났던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이 삼정승에 오른다. 권유와 관련하여 주목할 인물인 권대운, 김덕원이 정권의 담당자로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권유는 이 시기에 대사간 예문관 대제학 등 정부요직을 맡았다.
일찍이 대제학을 추천할 때 그와 이서우 두 사람을 놓고 얼른 선택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을 내어 재주를 시험하자 즉석에서 시를 지어 좌중을 놀라게 하여 그가 대제학에 올랐다고 한다. 옛 글을 즐기고 청빈했으며 시문에 능하여 『인경왕후지』를 저술하였고 태조부터 현종까지 역대 임금의 글을 모은 열성어제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재차 몰락하면서 실각하여 진보지방에 귀양가게 된다. 숙종 23년(1697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재기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평소의 신망으로 숙종 28년(1702년) 원로대신들의 반열인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2년 후 72세로 죽었다. 갑술옥사로 남인은 다시는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이런 연유로 권유는 남인 최후의 대제학으로 불리우게된 것이다. 
현재 광명에 그의 묘소와 안동 권씨의 묘소는 많이 알려진 바가 적은데 그 이유는 갑술옥사로 인해 권유의 후손들이 화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된 바에 연유한다. 이 와중에 그의 문집 『하계집』역시 이름만 전하고 있다. 그의 글재주가 뛰어나서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사실에 비추었을 때 문집이 발견되면 그의 훌륭한 문장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당대의 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나 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최근 공주지방으로 피신했던 권유의 후손으로 종손인 권처흥씨가 아산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정 두 점의 밑그림과 호패가 알려져서 광명을 근거지로하며 한 시대의 문형으로 활약하던 권유에 대해서 재삼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권유의 존재 의미는 단지 광명의 인물로서만이 아니라 과거에 시흥지방에 일정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소위 기호남인의 존재를 알려주는데 그 의의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남인은 한때는 집권세력으로 활약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몰락하였다. 따라서 그들에 관한 자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런 이유가 그동안 기호 남인에 대한 연구가 적은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광명지역은 옛 시흥에 속했던 곳으로 한성에서 인접한 곳이다. 이런 중요한 지역에 세거하던 정치세력에 대한 분석은 지역향토사 복원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이런면에서 광명의 대표적인 인물인 오리 이원익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리 이원익은 당색은 적었으나 일반적으로 남인의 인물로 여겨지며 그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이원익의 손녀사위인 허목은 당대의 남인의 영수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필적했던 인물이다. 이원익 사후 배향서원인 충현서원을 건립하는 과정과 오리영우를 조성하는 시기는 남인이 집권한 시기에 남인세력의 힘이 집중되어 이루어진 역사(役事)이다. 참가한 인물을 봐도 허목, 이관징, 김덕원 등과 남인과 가까운 소론의 이경석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권유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남인 우의정 김덕원의 존재이다. 김덕원은 훗날 충현서원의 이건과정에도 깊이 개입한 인물로 남인의 문화적 후원자 역할을 한 인물이다. 또한 권유와 종씨인 권대운은 남인 집권시기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사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강경 남인이었다. 인근의 시흥시 도창동에 그의 묘소가 전하며 이 지역이 근거지였다.  더불어 오류동에는 선조의 공주인 정선옹주 묘가 있는데 정선옹주는 안동 권씨 집안의 권대임에게 시집을 와서 그곳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를 유추해보면 옛 시흥지역에는 광범위한 기호남인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권유는 이원익의 문집인 『오리집』을 편찬할 때 서문을 썼는데 이 때가 대제학에 오른 1691년이다. 아마도 면면히 이어온 남인의 학자이기에 편찬자인 이원익의 종손 상현이 서문을 부탁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그동안 광명지역에는 특정한 정치세력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권유의 존재와 그 가문이 지역에 산재한 사실을 통해 분석해보면 연구가 더욱 진행되고 자료가 발굴될수록 향토사속에 흐르는 기호남인의 면모를 찾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여진다.
잊혀진 인물 권유의 존재를 알리면서 한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어 향토사 복원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05. 12. 12  /   양철원(광명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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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2005-12-12 16:09:32
기대가 됩니다. 시 역사가 짧은 도시에서 향토사로, 지역의 뿌리와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이 흥미롭습니다. 좋은 성과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