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고 교사 노용래 씨
광문고 교사 노용래 씨
  • 이재길기자
  • 승인 2005.12.14 14:43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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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열린 평준화촉구 집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노용래선생


내가 2005년 <광명사람들> 마지막 손님이라니 놀랍다. 나는 광문고 화학교사 노용래(37세)이다. 오늘 12월 12일 날씨처럼, 1212군사쿠데타가 발생했던 날도 이토록  추웠을까? 민방위 훈련을 받고 돌아와 저녁밥 얻어먹고, 철산동 상업지구 안에 있는 한 커피를 파는 집에서 내 인생을 더듬어 보았다.  

내 인생을 구제한 한 여자
 
동해(東海)는 그 푸르고 짙은 색깔보다 진한 추억들을 담아, 밀물과 썰물로 생동한다. 쓰라린 추억을 썰물처럼 밀어내고자 하는 이는 망각 편에 서고, 오늘보다 그 시절이 더 아름답다고 여긴 이들은 밀물이 밀려오는 듯한 기억 속에서 그 때를 기억하며 산다. 
내게 동해는 이 두 가지가 맞물려 있다. 10년이 넘었다. 속초 어느 허름한 여관에서 느닷없이 경찰에 연행되어 간 일 말이다. 속초 모 부대에 복무하던 나는 면회 온 친구의 놀란 눈을 등지고 영문을 모른 채 경찰서로 끌려갔다. 알고 보니 병역법 위반으로 수배상태였다. 나는 졸지에 대한민국 치안이 행정의 난맥을 초월해 유지되고 있음을 경험했다. 군에 입대한 사람이 여전히 수배 중이라니. 아니 더 놀라운 것은 여관에 투숙한지 단 몇 시간 만에, 수배자를 연행하는 경찰의 순발력이다. 이 일로 나는 군 법원에서 정식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군대생활에 충실할 것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무사히 제대했으나 길을 잃었다. 지치고 힘들어 좌초한 내 인생, 이 인생을 나보다 더 복구하려 애쓰며, 가장 큰 에너지원이 된 이가 있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고 여관에서 연행되어 되어가던 내 뒷모습을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켜보던 그 여인이다. 이 여자가 나를 구제했다. 나 보다 한 살 위인 이 여자는 꺼져 가던 나의 심지를 돋우고, 자신은 기꺼이 내 주변의 어둠을 사르는 공주 산 양초가 되었다. 나는 그 여자를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만났고, 98년부터 한 집에서 산다. 우리 사이엔 우리의 존재증명을 해 줄 여섯 살인 딸과 세 살 아들이 있다. 내가 다시는 처량한 뒷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 여인은 환경운동과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더니 모 국회의원과 함께 일하면서 나를 구제했던 그 에너지로 대의를 좇고 있다.

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나는 범생이다. 막일을 하시던 아버지와 지금도 파출부를 나가시는 어머니, 1400만 원 짜리 셋집에 살던 나랑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착하게 공부하는 일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네모형 인간처럼, 정해진 규칙과 법규 안에서 성장했다. 그에 맞게 고교시절 반장이란 책임은 내게 딱 어울렸다. 담임은 학비가 저렴하고 취직이 거의 보장된 교원대에 지망하기를 바랬고, 나는 그 바람을 어기지 않았다. 
그런 내가 전두환 정권 때 교권을 장악하고자 세웠다던 대학에 가서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다. 이 세상에 네모 말고도 세모와 동그라미 등의 도형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앎이란 고난이란 친구를 동행해 찾아왔다. 과거의 반장은 총학생회장으로 바뀌었다. 반장이 오른쪽이라면 총학생회장은 왼쪽이다. 순종과 저항의 차이이다. 세월이 얼마나 더 가야 김원일이 <겨울골짜기>에서 꿈꾸던 이념 대립이 끝나는 통일세상이 올지 모른다. 나도 내 인생의 담보일인 15000일 중에 얼마를 더 지불해야 이 간극을 하나로 보아 어울림을 이룰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왼쪽에서 나를 부른 전대협이라는 단체는 내 인생을 변화시켰다. 아니 내가 변하려 선택한 것이 전대협이다. 이내 동생도 이 길로 따라왔다.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청주대로 도피했고, 그래서 병역법 위반으로 수배된 것이며, 뒤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아버지는 운동권 학생을 둘 둔 죄로 충격을 받고 아프시더니 내가 군복무 하던 시기에 돌아가셨다. 전대협은 내가 대학을 10년 만에 졸업하게 만든 공신이다. 긴긴 터널 지나 졸업, 그러나 할 일이 없었다. 이 백수 시절에 아내가 나를 구제했고, 지금은 반대하시던 장인, 장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시기 나는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가족의 생계를 우선 해결해야 할 소시민이 되어 있었다. 
중국의 현대 신유가 철학자인 량수밍은, “나는 20세 이후 사상이 불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줄곧 그대로 나아가 만 마리의 소가 끌어도 되돌릴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지금은 이미 바뀌었다”면서 공자의 길인 유교로 돌아선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인가. 짐 싸들고 후배 기숙사로 들어가 6개월 간 임용고시 준비를 했고, 합격했으며, 다음 해인 99년에 발령을 받았다. 광명시 소재 모 고등학교였다. 이것이 나와 광명이 인연을 맺게 된 연유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

부임한 학교에는 낭만도 자유도 없었다.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 인연인가. 내가 교사가 된 그 해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합법화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전대협’ 대신 ‘전교조’라는 새 간판을 달고 개점했다. 참을 수 없는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분투하던 7, 8명의 교사들과 함께 전교조에 가입했고, 나는 분회장이 되었다. 일각에선 전교조를 비판한다. 심지어 최근에 국회를 통과한 개정사립학교법을 놓고, 한나라당과 사학법인 연합회 쪽에서는 ‘전교조가 학교를 장악한다’, ‘전교조 홍위병에 점령당했다’며 전교조를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선동이다. 개정 사학법이 규정한 개방이사는 학교운영위원회가 2배수로 추천한다. 그 중 이사 정수의 1/4만 선임되는데, 현재 초중고 학교운영위원회 위원 중 교원이 36%정도이고 그 중 전교조 교사는 반 정도이다. 이것은 전교조 교사가 학교 당 한 명도 이사가 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해 준다.
교원평가제와 관련해서는 철밥통 사수라는 비판이 들린다. 그러나 평가란 공정해야 하지만 학교 현실은 봉건영주 같은 학교장이 다스리고 있다. 그래서 학교는 군대처럼 경직되고, 수직화 되어 있다. 일례로 담임이 재량권은 보충수업 시간에 학생의 사정을 들어 먼저 보내는 일도 못한다. 학교운영에 있어서 참여도 힘들다. 공사는 수의계약이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학생들의 건강을 위한 우리 농산물 급식 조례 같은 일의 서명을 하려다가 고발하겠다는 엄포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해야할 교사들은 순종형이 많은 편이다. 선생이라는 직업 특성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비판과 반대는 승진에 불이익이 따름을 염두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서 가뜩이나 전교조 교사는 승진 불이익이 큰 터에 교원평가제는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전교조는 교원평가를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교장 자격과 선출제 같은 것을 선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 하는 것이다. 
광명시에 있는 교사는 약 2000명이다. 이 중 전교조 교사는 400여 명이다. 이 조직으로 학교의 민주적인 운영과 투명성, 교사의 권리를 지켜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진행 된 전교조의 역사는 작은 것도 신념이 확고하면 역사를 바꾼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지 않았던가. 나는 선배들이 이뤄놓은 터 위에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전교조 광명지회장으로 활동했다.   

고교 평준화 운동에 열정을 쏟다

모 고등학교에 발령받고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학생들이 거칠었고, 나는 매를 들었다. 학생들은 이상하게도 교사에게 반항과 분노 같은 감정이 높았다. 그 원인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입시에 내몰린 학생들 세계에서 차별화된 서열의식 때문임을 몰랐다. 그 통에 광명에는 학교나 학생 간 교류가 거의 없다. 비평준화 지역 특색이다. 
1300여 년 전, 중국의 수나라 때부터 시행되었다는 과거제는 귀족들을 통제하려는 황제의 통치 수단으로 출발했다. 명나라 때 시행된 학교 제도도 마찬가지이다(참고, 『중국의 시험지옥-과거』, 미야자키 이치사다). 조선의 과거제도도 사회 통치 수단이었고, 현대의 수능시험은 그것의 연장이다. 마치 화학으로 말하면 정성분석에서 정량분석으로 조금 선회한 것뿐이다. 인재선발이라는 원칙 하에 원소 하나 씩 뽑아내던 방식에서 그룹별로 뽑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특목고, 외고, 명문고 같은 망령이 살아난 것이다. 이 그룹에 들어가면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주류층으로 편입되는 일이 수월하다. 그래서 라이프니찌가 말한 단자(monad)처럼 개별화 된 학생들은 마치 화학에서 분쇄된 가루처럼 살다가 그 그룹에 들어가 용해되어 끈끈한 하나의 용액으로 뭉쳐진다. 그것이 학연이다. 
나는 교사 초년병으로 그 실체를 다 알지 못하고 그만 기죽어 있는 학생들을 윽박질렀던 것이다. 실수였다. 청년이 된 그들을 가끔 만난다. 술도 마시고 사죄도 한다. 못 만난 제자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미안했다.” 아무리 말해도 그 시절로 어찌 환원할 것인가. 김기덕 영화 <해안선>에서 장동건 분이 애처롭게 부른 노랫말처럼 “과거는 흘러갔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 분이 “나 돌아가고 싶어” 외치고 기차에 치어 죽을 때, 흘러나온 노래를 아는가. “나 어떡해”였다. 그러니 현재 만이 내 것이니 올바른 방식으로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모택동처럼 ‘귀아의 도덕률’로  자신을 반성하고, 평준화 일에 열심을 내었다. 그리고, ‘광명시 고교 평준화시민연대’ 사무국장을 맡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평준화는 시대의 대세이다. 광명시에  어서 그 날이 와야 한다.

기억에 남는 교사가 되고 싶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유기체적 과정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공 안에서 홀로 살지 못한다. 그러나 국경마저 초월 해 불어오는 신자유주의 바람은 더욱 인간을 고립화시킨다. 교사로서 자괴감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교육현장을 사수하려고 마음 단단히 다진다. 여기 감명을 준 책이 『교사와 학생 사이』(하임 G.기너트, 양철북)라는 책이다. 작년에 광문고로 전근하면서부터 수업 시간에 잔소리가 많아졌다. 잔소리만한 진리도 없다. 잔소리는 애정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학생들이 내 손가락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라고 간화선 화두처럼 시사 문제들을 말해주고 있다. 공교육 특성 상 이런 시간은 많지 않다. 
올해 2학년 3반 담임을 맡으면서 제자들에게 3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 ‘절대 때리지 않겠다’. 둘째, ‘차별하지 않겠다’. 셋째, ‘나로 인해서 너희들이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연말이다. 이제 점검해야 할 때가 왔다. 미안하게도 지키지 못한 점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늘 제자들에게 모범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청소도 가장 열심히 한다. 제자들은 시키면 다 잘한다. 그렇지만 나는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몸으로 보여주고 느낌을 공유하는 마음을 얻고 싶다. 2-3반 아이들은 그 어느 해 보다 어느 때 제자들보다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있다. 정도 많이 들었다. 
연말이 되어 벌써부터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서운하다. 세월은 가지만 여전히 밀려오는 동해의 밀물처럼, 나는 그들의 기억에 남는 선생이 되고 싶다. 그리고 당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파출부로 수고하시는 어머니의 겨울 인생에 봄바람을 보내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우루과이 사람 에두이르도 갈레아노가 말한대로. “어설프고 복잡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매일 밤을 마지막 밤처럼, 매일 아침을 첫 아침처럼" (『60억 번째 세계시민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후기> 『주역』에 있는 말로 일인칭 화법을 쓴 기자의 변을 대신한다. “서불진언언불진의(書不盡言言不盡意)”-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노용래 선생님의 학생 사랑, 민주적 학교운영, 고교 평준화, 그리고 좋은 아빠로 남고 싶은 그런 소박한 꿈들이 성취되시길 기원한다. 아울러 <광명사람들>을 사랑해 준 독자분들의 가정과 하시는 일들 위에,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 드린다. 

* 이 기사는 이재길 기자가 노용래 선생을 인터뷰하고 나서 본인이 된 심정으로 1인칭 화법을 써서 쓴 글이다.(편집자 주)

2005. 12. 14  /  이재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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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선 2006-01-09 01:38:58
노용래샘..평준화하면 떠오르게 되는 사람들중 가장 우선이지요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구요..올 해부터 광명에서 자주 뵙지는 못 할지 모르나.. 더 큰 일 하셔야 하니..건강하시고 새로운 활동에서 많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노용래샘이 걷는 발자욱.. 분명
많은 교사들에게 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 2006-01-07 00:33:21
일부의 사람들이 양심에 불 화살을 맞아 아침에 했던 말도
밤이 되면 언제 "내가 그랬서"라고 한다고들 하더군요.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한 양심가 이고 이 시대의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뵐 때마다 나의 모습은 작아지지만
선생님 같은 분들이 이 사회에 가득차 진실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민들레 2006-01-04 19:05:23
노샘.. 올 한해 힘든 일이 많을 것 같네요. 그래도 언제나 건강하시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열심히 사시길...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노용래 화이팅!!!

천지간 2005-12-27 02:48:43
오랜만에 왔는데 아직도 끼리끼리 놀구 있군.
조금 다른 말하면 용납못하는 것도 똑같구.
전교조, 참 재미있단 말이야.

하ㅏ안 2005-12-21 16:28:50
이기자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ㅂ니다.
제가 도움도 못되고....,
하여튼 미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