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산산행학교 교장 노신복 목사
구름산산행학교 교장 노신복 목사
  • 이재길기자
  • 승인 2006.01.04 18:04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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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인생, 뒤돌아볼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난한 삶이다. 해방둥이 노신복(62세) 목사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통해, 삶의 파고를 넘어야 하는 나그네들인 우리들 마음에 비움과 청빈이라는 낯선 단어들이 새로운 에너지가 되어 다소나마 여유를 찾길 기대한다.      



▲ 노신복 목사


과거 - 1.4후퇴 때 피난 해 남한으로

저는 소설 『장길산』 무대인 구월산이 보이는 황해도 송화 풍천 땅에 해방둥이로 왔습니다. 집안은 부농이었는데, 과수원도 했고, 할머니를 제외하곤 가족 모두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우습지만 할아버지께서 양말 바꿔 신는 꿈을 꾸고 난 뒤에 이것은 종교를 바꾸라는 계시라고 받아들여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이 계기였다고 합니다. 제 이름 신복은 ‘믿어서 복 받았다’, 동생인 성복은 ‘복을 성취했다’, 영복은 ‘영원히 복 받다’란 의미로 지을 정도로 믿음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재산이 많은 관계로 십일조가 내기 싫어 끝까지 안 믿으셨습니다. 당시 황해도 지역은 일요일에 일하러 논밭에 나가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기독교화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지간한 고집이셨던 겁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지고, 우리 가족은 숙청대상 1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피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사과를 싣고 평양에 갔다가 몸만 빠져 나와 작은 아버지와 초도로 숨었습니다. 어머니, 이모, 동생 둘과 저는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집에 남았던 할아버지는 손자조차 없으면 너무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손인 저를 데리러 왔다가 함께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만 재산 지키겠다고 남으셨는데, 후에 38선을 넘은 피난민들이 들려준 소식에 따르면 정신이 이상해 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피난을 떠난 저희 가족은 남하 해 군산에서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대구로 이주

군산에서 3년을 살다가 대구로 이주했습니다. 피난민들이 임시로 지은 초등학교에서 2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갈 줄 알고 2학기는 안 다녔는데, 이주가 늦어져 대구 칠성초등학교 가선 3학년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적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다가 5학년 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준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칠성초교엔 전국에 10개 정도 밖에 없던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그 야구부를 결성한 김기언 선생님이 담임이셨는데 선생님은 제게 ‘강냉이 빵 실 컷 준다’고 하시면서 야구를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각 학년 10반 중 반은 남학생, 반은 여학생인데, 그 중 체격이 크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을 야구선수로 선발했는데,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저를 뽑아준 일은 극히 이례적이었지요. 야구를 하면서 먹을거리가 해결되자 건강과 안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김기언 선생님은 방학 땐 따로 학습 지도까지 해주셔서 초 6학년 때엔 반에서 5등 안에 들 정도가 되었어요. 야구부는 전국대회 우승까지 했는데, 중학교엔 야구부가 없던 시절이라 2년 동안 담임이셨던 김 선생님이 영신중고교에 추천한 결과 6년 동안 장학생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집은 피난민 수용소였는데, 정부에서 제방에 판자촌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나는 바람에 철거령이 내렸고, 동대구 근처 과수원이 있던 곳에 피난민들이 정착촌을 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저는 집 바로 근처에 있던 신성교회(통합 측)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 1때부터 교회학교 교사와 어린이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길

목사가 되기 위해 한신대 신학과에 갔는데, 교회에서 신신학 한다고 반대가 심했어요. 그래서 2학년 때 기독교교육학과로 전과했는데도 아무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막상 한신대에서는 교단을 안 옮긴다고 장학금을 주지 않는 설움을 받았습니다.  한신대 기숙사에 거주하다가 2년 후 자취를 하기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그룹 지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9시부터 4시까지 학과 공부하고, 6시부터 10시까지 아르바이트 하는 통에 데모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수유리에 있던 한신대는 매일 데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면학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65년에 삼양동 신성북 교회(통합)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이후 청년회장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광나루에 있던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고 나선 학교 근처에 있던 광장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했습니다. 장신대 신대원은 신학과 40명, 목회학과 20명으로 분위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2학 년 마치고, 71년에 입대해서 34개월 복무 후 74년에 복학하니, 120명으로 늘어 분위기가 달라졌더군요. 거기서도 한신 출신을 따돌리는 경향이 있었어요. 
학교 내부 뿐만 아니라 시국이 혼돈스럽다보니 참 힘들었어요. 제가 65기로 입학 했는데, 동기들 대부분이 피해를 많이 봤어요. 제도 교회에서 부임을 취소하자 갈 데가 없는 동기들이 개척하거나 외국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저는 개척의 길을 택했습니다. 잠실에 잠실중앙교회를 개척 한 것입니다. 개척은 실패였습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개척한 것이 아니라 제의지가 많이 작용한 것입니다. 
개척 4년이 지난 뒤 시흥교회 부목사로 옮겨갔습니다. 3년이 지난 뒤에 제 마음에 든 생각은 ‘큰 교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거였습니다. 이후 목감동의 논곡교회에 가서 5년 하고, 87년도에 광명시 한광교회로 오게 되어 광명과 인연을 맺었지요. 한광교회에서 5년을  지냈습니다.  목회도 결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동화되든지 변화시키든지 해야 합니다. 저는 둘 다 못했어요. 그래서인지 20년 이상 한 곳에서 꾸준히 일하시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결혼과 가족

저는 육군으로 강원도 원주 육군 헬리콥터 정비대에서 복무했는데, 인생에서 처음으로 집에서 돈을 가져다 썼습니다. 제대 후 답십리 소재 태평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교회 여 전도사님께서 식사하실 때마다 저를 불렀는데, 어떤 여학생도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 칸타타를 하려던 때였는데, 그 여학생과 저랑 눈이 맞았어요. 하나님께 헌신한다면서 독신을 결단한 사람인데, 3월에 만나 5월에 약혼하고, 그해 10월에 결혼했습니다. 제 나이 서른이었습니다. 제 자식들은 큰 딸 31살, 큰 아들은 30세이고 둘은 결혼을 했고, 막내아들은 28세로 미혼입니다. 부친은 예전에 돌아가셨고, 81세인 어머니는 대구에서 홀로 사십니다. 

목회와 시민운동

저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자유하신 분이십니다. 초월자란 그런 의미입니다. 자유는 방종과 다릅니다. 이웃과 평화하면서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런 제 생각은 교회생활 전반에 걸쳐 저를 지배하고 이끈 원동력입니다. 어디에도 메이지 않은 자유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논곡교회나 한광교회를 사임할 때에도 임지를 미리 정해 놓고 사임하기보다 가는 날짜를 먼저 정해 놓고, 사임했습니다. 
광명과 인연이 된 한광교회에는 87년 3월에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92년 2월 사임했는데, 90년도에 미리 2년 후 사임할 것이라고 말해 놓았습니다. 한광교회는 전임자의 진보적 성향 때문에 요시찰 교회였는데, 제가 인명진(구로동 갈릴리 교회) 목사의 친구라는 이유로 저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당시 담당 형사를 만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2년 동안 일주일에 이틀을 막노동하러 다녔습니다. 세상을 너무 모른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 교회를 사임한 후 바로 노온사동에 온사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노회에서 1억 천만 원을 지원받아 대지를 구입하고, 건축비 7천만 원은 모금을 통해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9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5식구는 광명 6동에 있는 낡은 연립 지하 4평짜리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건축 완성 후 다음 해인 93년 봄에 광명시 최초로 공부방을 열었습니다. 95년엔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회원이 주인이 된 800평 주말 농장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지역 중심,  생활 중심이 되어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봉사를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 일환이 시민운동 참여였고, 어린이 사역을 계속한 배경입니다.
교회 건축 중에 현 경실련 자문위원인 김성배 씨와 공선협을 결성해 공동대표를 역임했습니다. 제가 논곡교회에 시무하는 동안 안산과 안양교회들을 연합 해 KNCC(한국기독교협의회) 지회를 결성한 경험이 있습니다. 광명에 와서 시민운동으로 유명했던 유인열 씨를 만나 것은 제가 시민운동을 하는데 커다란 이정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분과 저는 교육문제를 같이 공감하면서 고민하고, 전교조 지회 결성을 중점적으로 해냈습니다. 그 시기에 광명생협을 결성하고 제가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또 KNCC 지부도 결성해 총무를 맡았습니다. 
광명의 시민운동은 광명NCC의 공로 때문에 가능했다고 자부합니다. 목사들은 물질과 시간 제공이 용이합니다. 그 점에서 기독교 목사들이 중심이 된 NCC는 시민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신학교 동기들이 감옥 다녀오는 동안 편하게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못내 마음의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회에 나가서 자리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진보적이다가 보수적이 된 사람과 보수적인데 진보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원래가 보수적인 사람인데, 진보를 넘어 자유로운 사람으로 변했다고 봅니다. 그 근본을 제공한 것은 한신대를 나온 것이라 여깁니다. 한신대를 나온 것은 제게 복입니다. 여기서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배움이 가슴에 자리한 것입니다. 시민운동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기장 신학이 시민운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역시 시민운동을 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아직도 화두입니다. 
사실 광명의 시민운동은 4년 전만 해도 융합이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이 안정을 추구하고, 위탁 사업 등을 진행 하면서 시정감시 기능의 약화와 함께 시민단체들끼리의 연합도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광명 경실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시민단체에 도전을 줄 만큼 열심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은 돈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내어야 하고, 회원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점이 크다고 봅니다. 요샌 회원들의 연락이나 만남이 부쩍 줄었습니다. 지역 경실련 모임에 가서도 같은 처지인 것을 들었는데, 시민운동이 위기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이유를 초대된 강사는 '재미가 없다'라는 점에서 찾더라구요. 

현재-구름산 산행학교 



▲ 구름산산행학교 전경

온사교회를 노회에 헌납하고, 2001년엔 ‘구름산 자연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7월에 ‘구름산행학교’로 분리 해 나와 교장을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자세한 사항은 시민신문 메인 화면 우측 베너 광고에 나오는 구름산 산행학교 홈페이지를 참고하세요-기자주-)
제가 어린이를 좋아하는 것은 고 1때부터 어린이 사역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어린이와 함께 해 온 인생 여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신성북 교회에서는 한국 교회의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 손자를 지도했고, 논곡 교회에선 김익두 목사 증손주를 지도하기도 했는데 가슴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린이 사역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유와 건강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이 병들어 갑니다. 자유는 건강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건강제일주의를 내세웁니다. 건강은 자연과 함께하고, 먹을거리와 하늘(영혼)을 중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제가 산행을 중시하는 것도 건강 때문입니다. 산행은 정상에 반드시 올라야 하며, 산에서 나는 물을 마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세 가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건강과 무속 그리고 교육입니다. 
무속은 제가 어린이 성가대를 지도할 때, 학생 중에 무당 딸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속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대원 논문도 성경과 무속에 대한 것을 비교 분석할 만큼 연구도 했고, 그 분야의 책을 거의 소장하고 있습니다. 
건강 요법은 문익환 목사를 통해 배웠는데, 그분이 감옥에서 했던 요가, 파스법, 음양감별법 등을 배우거나 독학으로 연마했습니다. 
교육은 교회 다니는 자녀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도록 교육할 것이냐 하는 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대인식의 교육을 중시합니다. 고통 주고, 인내 가르치면서 도전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린이의 자유를 구속하는 교육이 팽배합니다. 일례로 학교에 갈 때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합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이들과 달라야 한다. 특별한 아이가 되라’고 한답니다. 생각을 깊이하면서 뭔가 다르게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예전에 어머니들은 가난했지만 얼마나 고고했습니까? 저는 일상에서 기본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밖에 나갔다 실내에 들어올 땐 반드시 손을 씻게 합니다. 이런 일에 잔소리가 많은 편입니다. 사실 잔소리보다 제가 그렇게 삽니다. 제가 그렇게 살면 아이들이 보고 따라하는 것 아닙니까?

미래- ……

저는 지난 해 7월부터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제 꿈은 깊은 산 속에 가족들과 움막을 짓고 사는 것입니다. 제가 더 마음을 비워내고 청빈을 실천한다면 가능할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인터뷰는 1월 3일 오후에 구름산 산행학교에서 3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노신복 목사는 현재 광명경실련 공동대표와 시민협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2006. 1. 4  /  이재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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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선 2006-01-09 01:24:03
목사님...늘 건강하시고 일구며 살아가시고자 하는 길
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기도합니다.
많은 이들이 목사님과 손잡고 함께 갈 것입니다~

박상대 2006-01-07 14:34:38
목사님! 뵌지가 꽤 오래 됐네요.
얼마전 시청앞에서 시위하시는 모습을 멀치감치에서
뵈었읍니다만, 이렇게 사진으로 뵈니 세월이 무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늘 건강을 소재로 말씀하시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올해도 건강하시고
늘 우리의 희망이심에
감사드립니다.

푸른솔 2006-01-07 12:32:30
양말을 바꿔신는 꿈을 꾸시고 종교를 바꾸셨다는 할아버지 말씀이 인상깊게 자리합니다.. ㅋㅋㅋ, 아이들에게 건강한 자유를 주시고자 애쓰신 교육자의 삶을 존경합니다.. 걸어오신 수 많은 희생의 삶의 발자취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리라 믿습니다. 남은 노년의 삶도 하나님안에서 건강하게 보내시고 더 큰 뜻을 이루시는 목사님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늘지기 2006-01-05 17:03:54
외유내강의 목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늘 밝은 미소의 사모님과
건강한 산행학교를 만들어가시길 기도해요

조은주 2006-01-04 18:59:01
목사님을 만나뵌지 벌써 15년 정도 되었네요. 그 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조용히 몸으로 실천하시는 모습, 맑은 미소를 가진 모습은 여전하십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미소지으며 실천하시는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산행학교 아이들도 건강한 산행을 통해 목사님의 모습을 많이 닮아가길 바랍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