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화살을 맞고 계신 부처님을 뵙다
연꽃 화살을 맞고 계신 부처님을 뵙다
  • 최영숙시민기자
  • 승인 2006.07.14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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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후불탱화로 유명한 용주사를 갔다.

용주사는 여느 사찰과는 다른 면이 많았다. 일주문이 대갓집 대문처럼 생긴것이며, 이곳 삼문처럼 출입구를 세 개 두는 것은 궁궐이나 사당, 서원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인데 이곳에 있는 것은 이 절이 신주를 모시는 사당의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었던 원찰이었던 것이다.

마침 7월4일은 백중 49일 지장기도 및 조상천도제를 하는 날이었다. 세월이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정조대왕도 저 분들이 정성들여 기도 들이고 있듯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서 정성껏 천도제를 지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현세계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여인들의 몫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이어서도 그렇겠지만 거의가 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빗속에 천보루에서 대웅보전을 향해서 기도들을 드리고 있었다. 꼭 보고 싶은 후불탱화는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었기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웅보전의 뒷 쪽으로 돌아갔다

외벽에 그려진 벽화들을 보았다.

대웅보전의 뒷면 벽화에는 여느 사찰과는 다른 그림들이 있었다. 풍만한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낸 여인이 질펀하게 앉아 유혹하는 장면, 술잔을 건내는 마귀, 칼로 위협하는 마귀, 그러나 정작 놀라웠던 것은 연꽃 화살을 날리는 장면이었다.

더러운 물에서 맑은 꽃을 피우는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상징인 연꽃을 화살에 달아 불법을 일으킨 장본인인 부처님께 날리는 장면은 파격이었다.

부처님께 가장 견디기 힘든 유혹은 근본을 향해 날아오는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가장한 연꽃 화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 술, 칼, 연꽃의 유혹을 물리치고 오랜 수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드디어 깨달음을 얻으셨다. 오랜 고행 끝에 뼈가 앙상히 들어난 모습과 그러나 편안하고 세상을 모두 껴안은 듯한 얼굴을 뵈면서 숙연해졌다. 내가 믿는 종교와는 틀려도 지향하는 것은 어느 종교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면으로 돌아왔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우는 제자들을 위하여 살짝 내놓으셨다는 맨발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  문태준의 시가 생각났다.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 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7월 6일 다시 용주사를 찾았다. 천보루 아래에서 대웅보전을 올려다 보았다. 용주사는 정조대왕이 뒤주 속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을 돌보는 원찰로써 지었기에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들이 사찰 곳곳에서 묻어났다. 

정조의 친필 대웅보전 현판과, 직접 심으신 회양나무, 단원 김홍도로 하여금  [부모은중경판]  대웅보전의 후불탱화를 그리게 하면서 그리기에 앞서 7일간 기도를 시켰다고 한다. 정조대왕께서 그만큼 정성을 들였던 것이다.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성된 대웅전 후불탱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탱화에 서양화기법 (태서법)을 도입하여 그린 탱화이다.

이 탱화를 두고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정조는 용주사를 창건하고 단원 김홍도에게 불전의 탱화를 그리게 하니, 더 이상 보충할 데가 없이 정교하여 가히 입신의 경에에 든 듯 묘(妙)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화의 음영기법을 도입하여 그린 후불탱화의 모습은 야윈듯한 모습이 인간적이어서 왠지모를 친근감이 들게 했다. 사근사근 말씀드리면 고개를 끄떡일 듯했다.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다시 한 번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귀한 후불탱화를 보았다.

 7월4일 비를 맞고 삼문 입구를 지키고 있던 해태상의 귀여운 모습이다. 옳고 그름을 알아서 판단한다는 해태. 머리에는 뿔이 나 있어서 시비가 일어났을 때 옳지 않은 사람을 그 뿔로 받는다고 한다. 저 천진난만해 보이는 해태가 화가 났을 때는 감당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주사는 독특한 절이었다. 해태 머리에 뿔나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일주문을 빠져나왔다.

* 이 기사는 인터넷언론연대 회원사인 시흥시민신문과의 기사제휴에 의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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