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들에게도 인생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20대들에게도 인생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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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5.0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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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 장편소설 '퀴즈쇼'를 읽고...'퀴즈로 비유된 자본주의와 오늘날의 20대'

인생이 하나의 퀴즈쇼라면 어떨까? 매순간 마주하는 상대와 토너먼트로 퀴즈대결을 펼치며 마침내는 최후의 생존자만이 남는 냉정한 서바이벌게임.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에서 우리의 젊은 세대들의 청춘은 이런 끔찍한 은유를 통해 묘사된다. 27살의 주인공 민수는 대학원까지 마친 고학력 인텔리지만 뭐 하나 하려는 의지도 없이 유유자적하며 빈둥빈둥하는 백수다. 민수의 낙이자 취미는 인터넷 채팅방인 퀴즈방에서 회원들과 즉흥퀴즈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러나 생존경쟁에 적극적이지 않은 백수에게 이런 한가한 퀴즈놀음은 곧바로 생존을 담보로 하는 퀴즈쇼로 전환된다.

사실 오늘날의 20대에게 주어진 청춘이란 비극적이다. 지옥과 같은 입시경쟁을 뚫고 대학에 입학해봤자 더욱 피터지는 취업경쟁을 위해 신입생 때부터 긴장의 끈을 조여야 한다. 지난 세대들에게 ‘대학’으로 연상되던 낭만이나 감상 따윈 이들에게 사치다.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선택하기 위한 학점경쟁과 자격증 준비로 여념이 없다. 동아리활동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닌, 생존경쟁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느냐로 선택된다. 오늘날의 20대들은 동아리활동은 사회활동을 위한 예비적 인맥구축의 장으로 활동되거나 ‘영어동아리’나 ‘자격증스터디모임’과 같은 실용적 영역에만 한정된다.

이름하여 오늘날의 20대들에게 굴욕적인 호칭이 주어졌으니 그것이 ‘88만원세대’이다. 상위 5%를 제외한 나머지 95%가 평생 월급 100만원 내외의 비정규직으로 생을 마감하는 ‘승자독식의 사회’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대. 오늘날 20대의 모습은 이미 그러한 위기감을 체득한 어쩔 수 없는 대응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퀴즈쇼>의 주인공 민수에게는 낙오자의 삶이 예비되어 있다. 월 29만원짜리의 창문도 없는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시급 4000원도 되지 않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 이 희망없는 20대에게 주어진 여가란 사이버공간에서 유목하며 타인과 소통을 벌이는 것뿐이다. 이들에게 휴대폰과 컴퓨터 등의 네트워크 기기는 존재의 근거로써 작동한다. 가상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차라리 이들에게 사이버공간은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민수에게 주어진 실제 세계란 2평도 되지 않는 고시원과 빚 독촉을 하는 채무자와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이다.

민수가 스카우터에게 픽업되어 퀴즈대결에 뛰어드는 것은 상징적이다. 가상공간으로 도피하던 그가 작가의 표현대로 ‘운명과 맞장’을 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체모를 건물에서 합숙하며 살벌한 게임의 규칙들을 학습하며 결국 ‘세상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다는 것, 인간은 변하지 않고 문제는 반복되고 세상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민수가, 그리고 오늘날의 20대가 게임의 규칙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퀴즈쇼라는 형태로 비유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고쳐질 수 없다는 것, 애초에 적자생존의 게임이 인간사회에 운명처럼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소설 <퀴즈쇼>의 전망은 그 경쾌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우울하다 못해 비극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20대는 작가의 말처럼 비극을 희극으로 인식하고 희극을 비극화시켜버리는 세대다. 현실 속의 치열한 경쟁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가상공간의 기호들을 통해, 그리고 그 기호들에 대한 소비를 통해 해소한다. 그 기호들 중 ‘사랑’의 기호는 가장 강력하다. 대중가요와 드라마, 영화, 소설 할 것 없이 사랑에 울고 웃는다. 마치 살벌한 생존경쟁 따위는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퀴즈쇼>의 민수는 소심하긴 하지만 아직 건강하다.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하더라도 투항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정원이 딸린 평창동의 저택에 살고 있는 지원의 사랑에 쉽게 자신의 안위를 기댈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민수의 생각은 확고하다. “사랑하니까 이해한다”는 지원에게 “사랑은 사랑이고 이해는 이해고,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민수는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지만 복종하지는 않겠다는 각성의 표현이다. 자본주의 전복의 거대담론은 무너졌지만, 자본주의의 규칙에 적극적으로 따르지는 않겠다는 것. 이것은 민수와 같이 ‘고학력 인텔리들의 막장 코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기원하는 것처럼 기호와 이미지들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자라난 오늘날의 20대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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