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그 어느날....
가을그 어느날....
  • 최옥자
  • 승인 2002.10.22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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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그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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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엔 끝없는 가로수 사이로 황금빛 낙엽이 뒹굴고 있었고
깊은 가을을 재촉하는 가을비는 엷은 회색빛 레인코트를 촉촉히 젖어들게 하였다.
따끈한 차 한잔을 그리워하며 가을의 여인이 되어 마냥 걷고만 싶었던
내 40대의 멋진 자화상 그러나 예전에 내가 꿈꾸던 2,30대의 희망사항이 있었다.
결혼생활 15년동안 여행이라고 해봐야 남편 친구네가 있는 월악산을 두번가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서울랜드,에버랜드 서너번이 고작이다.


나도 꿈이 있던 아줌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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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꿈이 있던 아줌마였다.
우리동네에서 다섯 손가락안에 꼽히는
삼겹살 아줌마로 남는 것은 내가 바랬던 모습이 절대 아니다.
예전에 다가오는 계절을 음미하며 첫눈이 올때면 “첫 발자욱”을 되뇌이며
가슴이 시려오는 사랑도 고독도 그리움도 느낄줄 알았고
비록 발음은 안되어도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을 열심히 외워가며 클래식을 들었으며
영어공부는 못했어도 외국의 유명 영화배우와 영화음악 제목은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었다하면 수업을 빼먹고라도 다 챙겨서 보았기에
나마저 여주인공 인양 착각하는 병이 있었던 것 같다.
박식한것은 아니었어도 대화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았다.


꿈을 접고, 티격 태격 싸우며 지내온 세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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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내가 결혼해서 본 영화라곤 아이들 좋아하는 만화영화 빼고
작년에 보았던 “반지의 제왕” 그리고 문누군가가 보여준 “오아시스”가 전부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내가 나에게 자문을 해보니 내 남편의 엄청나게 현실적인 모습에
ESTJ 적인 내 모습이 소외되어 내 삶속에 점점 녹아드는 것 같다.
봄 여행 한번 가자하면 여름엔 꼭 데려간다하고
여름이 되면 가을여행 기대하라 해 놓고
가을엔 눈썰매장이라도 꼭 데려가주마 했던 남편믿고
우리 아이들은 정말이지 눈썰매장 눈구경도 한번 못해 봤다.
(얘들아 미안해 엄마가 버스라도 타고 갔어야 했는데)
티격태격 이런 저런 일들로 싸우며 지내온 시간들이 되돌아 보니
우리 부부는 참 철없이도 산 것 같다.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들 키우며 인생 공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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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아이 낳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순간 그 맑은 눈을 바라보며 내심 두려웠던 나
“내가 정말 이 아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엄마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기 보다도
나도 아이가 크면서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배우고 느끼며 나의 생각이 열리는 것 아닐까?
단칸방에 살던 시절, 늦둥이 건희가 처음 집에 오던 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두리번 거리던 그 모습은 마치
”엄마는 경제적 정신적 여유도 준비도 없이 왜 나를 맞이 하는 거야?
하는 듯한 눈빛에 내 자신의 부끄럽고 초라함에 서글퍼졌다.
하지만 건희야 너도 살아보렴 내가 너 낳고 IMF 맞을 줄 어떻게 알았겠니?
엄마 아빠도 한때는 돈걱정하는 사람들 이해 못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겸손하라고 ,교만을 감추라고 비싼 수업료내고
철없는 엄마,아빠 인생공부를 시켜 주셨기에
고생은 좀 했지만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우리 가족이 되지 않았을까?
너희들은 엄마,아빠에게 제일 중요한 영양소인 것 알지?
가을 여행 한번 안가면 어떻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커피좀 못 마시면 어떻니?
물왕저수지 한바퀴돌아 보리밥 한 그릇 비벼먹고
자판기 커피뽑아 라이브 카페앞에서 분위기 한번 잡고
아줌마들끼리 수다한 번 풀어내면 스트레스해소에 그만이지

건희야 엄마가 며칠은 너무 고마웠단다.
아빠한테 바가지 긁고 투정부리다 아빠가 너만 집나가면 조용하겠다는 쇼킹한 말에
“알았어 너희 셋이 잘 살아봐라” 해놓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는 거야
그래 이참에 혼자서 오대산 정상에서 1주일만 버티다 오자 싶어 가방싸고 있는데
네가 얼른 장난감 몇 개 가방속에 넣어놓고 내 손 꼭잡고
“나도 엄마따라 갈꺼야”했을 때 엄마는 차마 표현을 못했지만
천군마마를 얻은 듯 그때처럼 행복했겠니?
네가 있었기에 엄마가 자존심 덜 상하고 마지 못한척 가방을 다시 풀수가 있었단다.
(특별히 네게 간식한 번 더 챙겨줄게)


내 삶의 한가운데를 정리해 보며 희망의 싹을 다시 틔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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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한가운데를 정리해 보라고?”
난 20대 초반에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었다.
살아본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았던 시절에 읽었던 그 글은
내 삶속에 서글픈 철학만을 만들었던 것 같다.
생활에 젖어 책 한번 읽어볼 마음의 여유는 없지만
이제 인생의 황금기 40대에 접어들었으니 다시금 루이제 린저를 만나봐야 되겠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생의 한가운데”를 남겼을까?
내삶의 한 가운데는 무뚝뚝하지만 믿음직스럽고 우리가족의 커다란 버팀목인 남편과
아빠닮아 표현력은 없지만 성실한 범생이 세은이
사슴같은 맑은 눈망울이 트레이드 마크인 건희
그리고 그 몸매 그 얼굴로 밤늦게 돌아다니면 남자들에게 혼날꺼라는 소리를 듣는 나이지만
그래도 내 삶의 중심에는 내 가족이 내손길을 필요로 하기에
조금더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잊혀졌던 마음 한구석에 나를 찾는 희망의 싹을 움틔우고 있다.

<최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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