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활 계획표
엄마의 생활 계획표
  • 조경숙
  • 승인 2011.05.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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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숙(연세언어치료연구소장)

아이가 목이 쉬고 배가 아프다고 하여 소아과에 갔었다. 소아과 선생님은 아이에게 "지난 겨울부터 몸무게가 늘지 않았으니 밥을 잘 챙겨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월요일이 되어 다시 병원에 들렀다. 감기 기운보다도 몸무게가 더 걱정스러워 상담 받을 작정을 하고 갔다.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어서 이러저러 하여 지난 겨울부터 식욕을 잃은 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럼 지금 얘가 먹는 양은 어떤 것 같아요?" 하신다. "네에~ 뭐 밥 먹는 양은 줄었어요. ...음...근데... 먹는 양이 적지는 않아요. 요즘 라면이 맛있다고 하루에 한 개씩 먹어요. 밥은 아니지만... 배고프진... 않을... 거예요." 나는 단어들을 주섬주섬 꿰어 맞추며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눈에 힘을 주고 묻는다. "왜 생라면을 먹어요?" 나는 또 주섬주섬 "음... 생라면을 좋아해서..." (ㅜㅜ) '내가 먹이려고 먹인 것도 아니고, 아빠가 자꾸 라면을 사다놓아서 그런 건데... 변명이라도 해볼까?' 나는 겨우 구실을 하나 찾아냈다. "제가 집에 있질 않다보니 먹을 걸 챙겨주지 못 해요." 어느 날인가부터 아이가 밥을 잘 먹지 못 하는 게 식성이 좋지 않고 때마다 맛깔스런 음식을 챙겨주지 못 해서라고 생각해왔었다. 선생님은 직장 맘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먹을 게 없다고 아니면 챙겨주지 못 해서라고 말하지만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먹거리가 가득 차 있단다. 밥을 안 먹으면 간식이라도 먹여야지 하는 생각에 눈감아 주고 어느새 간식이 밥을 대신한다는 거다.

선생님과 나의 상담 릴레이는 도무지 그칠 줄 몰랐다. 다 맞는 말씀인데 실천되지 않는 이유가 무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이번에는 아이를 내세워 변명을 할 셈이었다. "이제는 제 말은 안 들어요. 선생님이 말씀해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 아빠는 아침을 먹느냐고 물으신다. 먹고 싶지만 잘들 안 먹어서 안 먹게 되었다는 대답에 "아침에 일찍 일어납니까?" 하신다. 아차! 피곤할까봐 안쓰러워서 조금 더 재우자 하는 마음이 많았는데... 등교시간에 늦지 않고, 학교에 가서는 참하게 집중하기를 바라고, 꼬박꼬박 학습하기를 바라고, 독서량이 늘어나기를 바라고, 아이의 먹거리이니 안전해야 한다며 성분표시와 함량을 꼼꼼히 따지지만 정작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천천히 기쁘게 먹고 등교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병원을 빠져나와 머리 속이 헝클어진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생활 속에서 일정을 지켜야 하는 상황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하루 세 끼 식사, 하루에 세 번 식후 3분 이내 양치질하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등교하기, 일요일은 쉬기,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들기,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기,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월 1회 공과금 내기, ^^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규칙적인 일정의 범위는 끝이 없다.

일상생활부터 학교나 직장 생활, 의사소통의 과정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언어치료도 정해진 시간과 활동 계획을 되도록 지켜야 한다. 루틴을 잘 지키면 본래 목적을 쉽게 이해시켜 치료를 효율적으로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일하는 장면이 아닌 일상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쉬는 거라고 착각했었다. 늘 짜여진 일정을 지켜야 하는 압박이 많았나 보다. 아이가 점점 자라 이것저것 챙겨주어야 할 게 많아지자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이의 생활 계획표는 물론이고 나의 생활 계획표도 세세하게 써보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일정을 꼬박꼬박 지키자면 틀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 하다. 하지만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베이면 탄력이 붙고 효율이 생기며 리드미컬해진다. 해야 할 일을 모두 하고도 시간 여유가 생겨 많은 일을 손쉽게 척척 해낼 수 있게 된다. 내 아이의 건강은 엄마의 생활 계획표에서 나온다고 말해야겠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 학사, 동대학원 불어학과 석사
연세의료원 언어치료사 과정 이수
한국언어치료전문가협회 언어치료사 (1급), 감독자
노원을지병원 이비인후과 언어치료실 근무
서울특별시립 아동병원 재활의학과 언어치료실 근무
김효재언어장애연구원 근무
현 연세언어치료연구소장 (구 광명 연세 언어연구원)
치료실: 02-2683-7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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