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은 있다.
'대안'은 있다.
  • 이원영
  • 승인 2011.08.2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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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수원대 교수, 운하반대 전국교수모임 정책위원장)

지난주에 오랜만에 만난 죽마고우 소설가와 함께 동해안을 갔습니다.
모처럼의 휴식입니다.
물속에서 놀다가 술도 한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었지요.
모래사장에 가서 시커먼 동해바다를 보며 우두커니 앉았습니다.
하얀 포말을 일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바닥을 알 수 없는 밑으로부터 눈덩어리처럼 커진 분노가 치솟아 올라 명치를 치받습니다.

4대강의 전신인 운하얘기를 듣고 분기탱천하여 바깥세상에 나온 게 2007년.
그때부터 자다가도 한밤중에 깨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왜 그런가했더니, 사람은 잠자면서도 무의식의 세계에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다 보니 화가 치밀어서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 나는가 봅니다.
잠을 깨면 멀뚱한 눈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다가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한 사람을 몇년씩이나 식지 않고 미워해본 적은 전두환 이래 처음입니다.
그땐 젊기도 해서 그럴 수 있었겠다 했는데
나이 들어서 그런 팽팽한 분노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제 자신에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올봄 후쿠시마 핵 재앙이 터졌습니다.
이건 정말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건입니다.
스리마일과 체르노빌까지는 우연의 산물이었다고 인정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반세기가 안 되는 세월동안 3개가 터졌습니다.
하나는 작업자의 실수, 또 하나는 원자로장치의 결함, 또 하나는 지진.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고, 이번이 인구밀집지역이라는 점에서 훨씬 치명적입니다.

같은 사고가 세 번 반복되면 우연이 아니라 확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건 무얼 뜻하는가?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어떤 확률로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대치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천년동안이면 같은 확률로 발생한다면 사고의 기대치가 몇 개일까요?
60개입니다, 60개!
그 정도면 지구 전체가 방사능으로 오염됩니다.
지구상에 남아날 생물이 없습니다.

'현세대가 미래세대에 가하는 테러'?
이건 약과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동료교수들의 태도였습니다.
필자의 4대강 반대 활동을 열심히 성원해주는 공과대학의 교수 두 분(화학공학과, 전기공학과)께 이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당연히 저의 생각과 비슷할 줄 알았던 기대가 무참히 깨졌습니다.
이 분들이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 정말 제 정신인가?
평소에 동지처럼 지냈던 분들이라 충격이 심했습니다.
절벽을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4대강은 문제되는데, 더 심각한 핵발전은 대안이 없으니 받아들여야 된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그분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과연 대안이 없는가?
아닙니다.
둘러보니 독일은 너무도 훌륭하게 대안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장 가보고 싶었습니다.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하고 해서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갑작스런 독일견학요청에 스무분이나
그것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들이 호응해오신 것은
벌써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일 겁니다.
견학 후 결론은, ‘대안은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은 매우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으로 리포트책자도 내고 국회에서 발표도 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보셨습니까?'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대안 없다고 말하지 마시라' 하고 말입니다.

다음에 사고가 난다면 무슨 이유일까?
내부적으로 아무리 만전을 기했다하더라도
외부변수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번 사고에서 명확해졌지요.
핵발전소는 테러나 전쟁으로 인한 사고 앞에 무력합니다.
9.11 테러 보다 무서운 게 핵발전소 테러입니다.
나라마다 수십개씩 널려 있습니다.
원전자체의 안전에 자신만만해하는 프랑스는 역설적으로 늘 테러의 불안에 떨고 있죠.

요즘은 집중이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후손들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눈을 돌려 다른 가능성을 봅시다.
과학계에서 거론되는 핵융합은 핵발전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수소융합이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며, 핵발전과는 별개의 존재입니다.
이론은 나온 지 오래전이었지만 실용화연구가 반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서
언제 실용화될지 모르는 에너지 대안입니다.
이 또한 안전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안전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수소융합에너지의 결실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핵분열발전방식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것이지요.
핵발전은 원래 안전문제와 핵폐기물 두 가지 모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칼끝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와 후손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은 모두 백척간두에 서있습니다.

성선설은 누가 주장한 것인가?
뻔하게 죽어가는 생명들을 보면서 ‘대안이 없다’는 괴상망측한 핑계를 신문일면 광고로 내걸지를 않나.
좀 더 따지고 보면 '자본권력이 현재의 삶을 미끼로 미래 환경을 착취하고 미래 삶을 파괴하는 테러' 이지요.
심리적 공황마저 느낍니다.

원래 이만한 위험을 가진 존재를 일상적 공간속에 존치시키려면 상식적으로 국민적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국가권력은 이러한 상식을 지키지 않고 경고도 없는 채
국민의 일상적 삶속에 '꿀과 폭탄'을 강요한 것이지요.
권력의 소리 없는 폭력이자, 그를 내버려둔 우리세대의 직무유기입니다.

원전을 옹호하는 이들이야 원래 그렇다치고
막대한 연구비를 받는 학계나 로비를 받는 정치권이나
1년에 100억씩 홍보비 받는 언론이나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막막합니다.
오염된 세상, 보편적 가치가 상실된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로
탈핵은 우리뿐 아니라 인류의 지상과제라는게 명확해졌습니다.
사고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고 이전에 있었던 원전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은 이해해줄 수 있어도 사고 이후는 다릅니다.
전혀 다른 것이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실현시기가 현재냐 미래시점이냐 그리고 어느 정도의 미래냐에 대한 의견의 차이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핵발전’이라는 데에는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급적 그 시기를 앞당기자는 의식입니다.

의견일치를 보인 지점이 나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번 사고의 수확이라면 가장 어렵고 중요한 그 지점이 찾아졌다는 것이겠지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길은 멀더라도 거기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겠지요.
불행히도 시간이 충분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요.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길은 있는 것인가?
독일은 잘도 가는 것 같은데 과연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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