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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당의 삶과 건강(1)
단식과의 만남
2019년 01월 23일 (수) 08:55:40 이승봉 kmtim@hanmail.net

한심당의 삶과 건강(1)

단식과의 만남

광명시민신문 창간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새롭게 구성된 이사회에서 신문을 재 창간 수준으로 변화시키자고 결의한 뒤 “한심당의 삶과 건강”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연재하려한 까닭은 필자가 33년째 계속해 온 단식 수행 때문입니다. 사실 단식 30년째 되는 해에 건강에 대한 책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던 차에 이 기회를 빌려 연재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인생에서 큰 몫을 차지하게 된 단식을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전두환씨의 공로였다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한 1977년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감리교청년연합회 활동을 통해서입니다. 엄혹했던 70년대 후반을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교회청년운동 학생운동을 하였던 저는 80년 광주항쟁을 겪으며 민중들을 위한 목회자의 삶을 결심합니다. 1986년 구로공단의 작은 낚싯대 공장에서 일하다가 블랙리스트에 걸려 공장을 나온 뒤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87년 3월 구로역앞 상가에 작은 교회를 세우고 노동 선교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 무렵 전두환씨의 호헌 선언이 나왔습니다. 1987년 4월 13일 이었습니다. 호헌 선언에 대해 잘 모르시는 문들을 위해 잠깐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1979년 종신대통령을 꿈꾸었던 박정희씨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비명횡사한 뒤 우리 사회는 민주화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가 12.12 구테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지요. 정치군인들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는 또 다시 끔찍한 군부 독재의 터널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듬해 시작된 민주화 투쟁은 5.18 광주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조국 산하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신군부는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획책하게 됩니다. 전두환씨는 그 해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선거 쇼를 통해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그리곤 임기 내내 백성들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고 민주인사들에 대한 고문, 투옥 등의 탄압을 일삼게 되죠.

하지만 역사는 독재자들의 뜻대로 되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내려집니다. 신생야당인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 돌풍이 그것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정치인 탄압을 위해 만든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자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정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1985년 1월 18일 신민당 창당일이 결정되자 전두환은 12대 총선 투표 날짜를 겨울인 1985년 2월 12일로 정합니다. 신민당의 돌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신민당은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급부상하죠.

창당 25일 만에 이 같은 성과를 보이자 무소속과 민주한국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거 입당하였고 신민당은 103명의 의원을 가지는 거대야당이 되었습니다.
신민당의 출현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불타오르게 하여 각계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봇물 터지게 됩니다.

이런 범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요구에 밀려 국회가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발족합니다. 민정당이 여론에 국복한 것이죠. 하지만 여야의 입장차이가 너무 커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폭로됩니다. 1987년 1월 14일입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정부와 경찰의 발표에 우리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 노동자, 직장인, 종교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였습니다. 시위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격해지자 결국 전두환은 위험을 느끼고 중대 선언을 결심합니다.

4월 13일 전두환은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합니다. 이것이 전두환의 호헌 선언입니다. 담화문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여야가 합의해서 개헌하기를 바랐으나 야당이 어거지를 부리니 합의가 안 된다.

-고로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후임 대통령 을 뽑겠다.

-개헌 논의는 다음 대통령 임기 중인 88올림픽 이후로 미룬다.

-대신 임기 중에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검토하겠다.

-폭력 시위는 북한을 돕는 일이며 경제를 파탄 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위하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 엄벌하겠다.


이 담화문을 읽다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결론은 곧 올림픽도 있고 하니 개헌 같은 개소리하지 말고 입 닥치라는 것입니다. 권력 내려놓기 싫으니 체육관 선거를 통해 바지 대통령을 세우고 대리 통치를 하겠다는 것이죠.
결국 이 호헌 조치는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6월 항쟁을 촉발하게 됩니다.

장황하게 호헌 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사건이 필자를 단식과 만나게 한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종교적 이유에서 금식 기도는 많이 했지만 이론이 뒷받침되는 단식은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호헌 조치가 발표되자 당시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목회를 하던 성직자들은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에 돌입하기로 합니다. 주로 빈민 선교와 노동 선교를 지향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이었습니다.

40여명의 목회자들이 서대문 소재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에 모여 즉각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습니다. 마침 단식을 공부한 유경험자들이 있어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체계적인 단식 지도를 해 주었습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아현감리교회에서 열린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위한 목회자 대회에 참가하기까지 10여 일간 단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단식이라 함은 무조건 굶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몸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물을 하루에 2L 이상 섭취야 한다든가, 식사시간이 되면 분비되는 위산을 중화시키기 위해 마그밀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처음으로 관장이라는 것도 해 보았습니다. 여자방과 남자 방을 나누어 관장을 했는데 참 민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럿이 함께 해야 하니 병원에서 링거 병을 얻어와 벽에 걸고 마그밀 현탁액을 조금 섞은 미지근한 물을 채웁니다. 화장실 개수에 맞춰 일렬로 벽에 물구나무를 선 뒤 차례로 링거 줄을 항문에 삽입합니다. 링거 병의 물이 다 들어가면 몸을 좌우로 마구 흔들어 대장이 잘 씻기도록 합니다. 견디다 못 참을 만큼 되면 화장실에 가서 모두 쏟아 내죠. 관장은 하루에 한 번씩 꼭 했던 기억입니다.

   

6월 항쟁은 민정당 차기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씨의 6,29 항복 선언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수출주도형 경제체제에서 가장 고통을 받았던 노동자들의 욕구가 분출됩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7-8월 전국의 사업장에서 쟁의를 일으키죠. 생존권을 요구하며,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전개된겁니다.

당황한 정부와 언론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최근 노동쟁의의 실상과 특징>이라는 보고서를 인용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을 왜곡합니다. 노동자들의 쟁의를 ‘비윤리적, 패륜적’ 행위로 매도하고 노동자들의 폭력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여론몰이를 한 것이죠.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선교교육원에서 단식을 함께 하였던 목회자들이 다시 모입니다. 민중교회 목회자들, 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이 중심이 되어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단식농성기도회에 들어갑니다. 정당한 권리에 대한 요구를 패륜으로 몰고 가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전경련 회장실에서 사복 경찰에게 연행 당하는 목회자들

단식 농성 이틀째, 목회자들은 노동 탄압 선봉에 서있는 전경련에 항의 농성을 가기로 합니다. 23명의 목회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의심받지 않게 전경련 회장실로 향합니다. 일시에 회장실을 점거하고 우리의 요구를 주장하며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직원들에게는 우리가 전경련 회장실에 찾아온 이유를 적시한 유인물을 나눠주었습니다.

우리는 회장단 면담을 거듭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서너 시간 뒤 전경련 측의 연락을 받은 사복경찰들이 대거 진입하였고 우리 모두는 영등포 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1987년은 우리 역사에 민주화의 큰 획을 그은 해지만 저에게는 처음 단식을 접하게 한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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